늘 군자이고 싶어 하면서 정작 소인처럼 행동하는 이들에게.
子曰: “君子不可小知, 而可大受也; 小人不可大受, 而可小知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작은 것으로 알 수는 없으나 큰 것을 받을 수 있고, 小人은 큰 것을 받을 수는 없으나 작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장은 다시 군자와 소인을 등장시켜 두 존재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비교한다. 일견 들어보면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초심자들이 많은 문장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 어려운 문장 중에 하나이다.
후대의 학자들도 이 장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입장차를 고수하고 있는데, 군자와 소인의 임무가 다를 수 있다고 하는 대지(大旨;큰 뜻)는 같으나 知와 受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갈린다.
먼저 주자는 그 두 가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 장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知(지)’는 내가 아는 것이요, ‘受(수)’는 저(상대방)가 받는 것이다. 군자는 작은 일에 있어 반드시 볼 만하지는 못하나 재질과 덕이 충분히 중임을 맡을 만하고, 소인은 비록 器局(기국)과 度量(도량)이 얕고 좁으나 반드시 한 가지 장점도 취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다.
즉, 주자는 知와 受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보아 知는 ‘내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라 풀이하였고, 受는 ‘저 사람이 나에게서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풀이하였다. 그에 비해 다산(茶山; 정약용)은 知와 受를 모두 ‘맡아본다’의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다. 受는 그렇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知를 같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 이채로운데, 다산(茶山)은 일에 참여하여 주관한다는 뜻의 ‘與知(여지)’로 풀이한 것이다. 다산(茶山)의 이채로운 의견은 참고로 하되, 나는 기본적으로 주자의 견해를 견지한다.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 ‘작은 것’을 풀이하면서 ‘아는 것이 쩨쩨하다’는 식으로 풀이하여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는 식으로 해설하거나 ‘작은 지혜’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긴 하는데, 그런 식의 끼워 맞추기 해석으로는 소인과 대비되는 풍모가 제대로 대비적 의미를 드러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만약 그 해석대로라면 ‘소인은 아는 것이 쩨쩨해도 괜찮다’라는 다소 어이없는 해석이 나오거나 ‘소인에게는 작은 지혜정도만 기대할 수 있다’는 두루뭉술한 해석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주자의 설에 따르면 이 장은 “군자는 작은 임무를 가지고는 능력을 알 수 없으나 큰 임무를 받을 수 있고, 소인은 큰 임무를 받을 수는 없으나 작은 임무를 가지고 능력을 알 수 있다”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 해석은 군자는 군자대로 큰 중임을 받아야 하지만 작은 일은 할 수 없다는 식의 해석이 될 수 있는데, 공자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소인도 처리할 수 있는 작은 일 따위는 군자나 소인이나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에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기준이나 변별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반대로 큰 중임을 맡기게 되었을 때야 말로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군자가 굳이 소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맡아 일일이 그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기도 하다. 큰 일을 할 수 있는 군자가 작은 일을 하지 못해서 맡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범한 이들이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않고 좀 더 큰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은 그야말로 효율적인 결정이고 선택인 것이지 작은 일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장과 비슷한 표현으로 제시된 공자의 가르침은, 이미 앞서 ‘위정(爲政) 편’의 14장, ‘이인(里仁) 편’의 11장, ‘술이(述而) 편’의 36장, ‘안연(顏淵) 편’의 16장, ‘자로(子路) 편’의 23장, 25장, 26장, ‘전문(憲問) 편’의 7장, 24장 등 다양하게 등장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장의 가르침을 조금 더 깊이 있고 다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이 일깨우는 정수는 결국 군자가 해야 할 중임(큰일)과 소인이 맡아도 될 작은 일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는 일이다. 실제로 공자의 가르침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고 풀이해 주면서 내 삶에 끊임없이 적용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것은 평생의 화두였다.
도대체 어떤 일을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할 것이며, 어떤 것을 큰 일이라고 할 것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익으로 나누기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을 보인다. 의사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향이 대부분 그러한 논리면에서는 단순 명료한 편인데, 나와 같은 침대를 쓰는 분은 큰 일과 작은 일을 일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경제적인 규모를 가지고 판단한다. 예컨대,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것이 바로잡아 되찾는 이익이 최소 100만 원 이상이 되어야만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질구레한 일이라고 지칭하는 일의 기준이 이익이 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의견에 선뜻 동의해 주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비유컨대, 길을 걷다가 10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당연히 그냥 지나가고, 100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잠시 쳐다보다가 지나가며, 만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달려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연 있는 자가 강남 한복판에서 만 원짜리 수백 장을 뿌리면 차가 사고를 낼 듯 멈춰 서서 저마다 그 돈을 줍겠다고 난리를 부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익을 기준으로 삼는 자들의 논리에 따라, 길에 뿌려진 만원 자리 돈을 줍는 것은 큰 일인가? 그것도 갑자기 뒤에 차가 와서 사고가 나서 다칠 수도 있다 하더라도 더 많은 돈을 줍겠다고 목숨을 담보로 그런 짓을 할만한 큰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길을 가다가 할머니의 돈 가방을 들고 날치기를 하는 소매치기들을 쫓아 달려가 망연자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쫓아갈 엄두를 내지 않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그들을 잡겠다고 하는 일은 어떠한가? 명동의 입구에는 그렇게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지도 않는데 소매치기들이 날치기한 돈을 찾겠다고 쫓아가다가 그들의 칼부림에 희생된 의인의 동상이 서 있다. 물론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본인도 아니 그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아무리 황금 동상을 세워준다고 한들, 사람의 목숨보다 더 대단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에 유학 가서 자신도 모르게 지하철 선로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아무 주저함이 없이 선로에 뛰어내려 다른 사람은 살리고 정작 자신은 지하철에 치여 희생된 유학생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그렇다면, 명동에서 날치기를 쫓아가다가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죽은 이나 일본 유학생의 죽음이 의로운 것이라고 칭송하는 이들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혹은 자신의 남편이 아니면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권장할까?
지금 이 질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로운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그들이 의인인 것도 귀감이 될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그런 일을 하겠다고 하거나 솔선수범이 되겠다고 하면, 미쳤냐며 절대 나서지 말라고 팔을 움켜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자인가? 소인인가? 소인이라 불려도 상관없으니 쓸데없는 정의감에 목숨을 가벼이 버리지 말라고 당신과 당신의 부모님, 그리고 당신의 주변 사람들은 당당히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처음부터 명동에서 날치기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에 그 청년이 쫓아가면 칼부림이 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여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을까? 지하철 선로 아래에 사람이 떨어진 모습을 보고, 그 아래 저 사람을 도와주러 내려갔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그 유학생이 했을까?
이 장의 가르침을 포함한, 이제까지 공자가 뭇사람들에게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올바름을 실천하는 삶을 위해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라고 했던 가르침은, 찬찬히 생각해 보고 주판알 다 튕겨가며 이익대차대조표를 따져보고 계산서가 나오면 그것에 따라 큰 것과 작은 것을 따지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하찮은 일과 대단한 일은 결코 이익의 대소로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눈에 보이는 이익이 과연 진정한 이익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도 결국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심지어 사기를 치는 범죄자들을 통해 살펴보더라도 여지업이 드러난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털기 위한 잔챙이들은 그저 그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눈속임을 만든다. 그런데 정말로 큰 레전드라 불리는 사기꾼들은 어마어마한 이익을 갈취해 내기 위해 자신들이 선투자(사실 이것을 투자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되긴 하지만)를 하는 것에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미 다양한 학습으로 인한 경험이 축적되어 아무런 투자와 노력이 없이 큰돈을 거저 사기 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기는 다른 사람을 기망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일이다. 사기에 큰 사기가 있고 작은 사기가 있느냐고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종종 살인과 살상으로도 환치되어 설명된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게 되면 그것은 살인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살상이 되고, 그것은 대부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개념이 전환되어 포장되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챙기겠다고 유럽연합과 미국, 중국 등 열강들이 포진한 최첨단의 21세기에 구시대적인 무기들을 가지고 그야말로 당나라군 수준의 젊은 러시아 군인 아이들을 전장에 내몰면서 살상한 우크라이나의 희생자들은 수백 명 수준을 넘었다. 한 사람을 죽여도 살인범으로 국제공조하에 체포하여 죗값을 치르게 헤야 하는 것이 당연한 법임에도 불구하고 제국 열강들이 식민지를 만들어내도 문제가 되지 않던 시대도 아니고 지구촌 전역에 그 전쟁의 참혹한 실상이 생중계되는 시대에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아무런 직접적인 처벌이나 제재를 받고 있지 않다. 도대체 그 해괴한 논리를 누가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단순한 선악의 논리로 힘의 논리가 오히려 이전 시대보다 치밀하게 강화된 현대의 국제정치의 알력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가 확대되기는 했지만, 결국 군자나 소인이나 할 수 있는 하찮은 일과 군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이란, 이익으로도 그 일의 규모로도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주관적 가치에 대한 근본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것이 공통적 사회 가치로 향해 있다고 해서 대의(大義)가 되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해서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 폄하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흔히들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라.’고. 그런데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각기 다른 수천수만 가지 상황하에서 그렇다면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 군자가 신경 써야 할 큰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중학생 교복을 입고 버젓이 아파트 놀이터 음습한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지나가는 여자아이를 몰아놓고 삥을 뜯으려는 학생들의 비행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바로잡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수년 전 황당한 뉴스에 보도되었던 것처럼 여섯 살 아들의 앞에서 10대 불량 청소년들을 훈계하겠다고 시비가 붙어 그들에게 말 그대로 맞아서 죽은 아버지가 헛된 죽음을 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 상황을 목도했던 여섯 살 아이의 평생의 트라우마를 누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사회적 공감으로도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마음속으로는 남의 일에 굳이 이익(?)을 얻을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끼어들어 개죽음을 당하는 사례라고 당당히 언급된다면 그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모두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는 풍토가 된다면 그런 비행청소년들이 스스럼없이 폭행을 하고 다닐까?
결국 옳은 것이 무엇인지 사소해 보이지만 큰 일이라고 여기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 매일같이 일어나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리가 평상시 그렇게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며 수양하는 이유는 단 하나를 위함이다. 그 선택의 기로에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 아니라 조건반사처럼 바로 실행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반사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두가 지키지는 않는 바로 이 장의 행간에 강조된 바로 그 기준을 말하는 것임을 당신의 양심이 알아듣기를 바라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