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이 仁을 갖춰야 하는가에 대한 공자의 일침.
子曰: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仁에 있어 (필요함이) 물과 불보다도 심하니, 물과 불은 밟다가 죽는 자를 내가 보았지만 仁을 밟다가 죽는 자는 보지 못하였노라.”
이 장에서는 仁이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대조의 개념으로 물과 불이 등장한다. 공자가 물과 불을 비유개념으로 등장시킨 의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마융(馬融)이 처음 주장하고 주자가 그에 동의하며 지지한 것으로, 물과 불이 인간생활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듯 仁이 그만큼 인간을 완성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필요조건이라는 설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정확하게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이 물과 불에 있어서는 의뢰하여 사는 것이어서 하루도 없을 수가 없으니, 仁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단 물과 불은 외물(外物)이고 仁은 자기 몸에 있으며, 물과 불이 없으면 사람의 몸을 해침에 불과하고 인하지 못하면 그 본심을 잃으니, 이는 仁의 필요함이 물과 불보다도 더 심하여 더더욱 하루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물과 불은 혹 때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있으나 仁은 일찍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 또한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가.
이 설명에 따르면 물과 불, 그리고 仁은 모두 사람들이 그것이 반드시 필요해 그 덕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요소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보이는 외물(外物)에 해당하는 물과 불에 비해 보이지 않는 仁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물과 불을 밟으면 때로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만 仁은 밟아나간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거늘 무엇을 꺼리기에 仁을 행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여 그 중요성을 반대로 강조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하나의 설은, 왕필(王弼)이 처음으로 주장하고 다산(茶山; 정약용)이 동의하고 지지한 내용이다. 원문에서 죽음을 언급한 것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이 물과 불을 위험하다고 여겨 피하듯이 어리석게도 仁역시 그와 같이 위험한 것으로 여겨 피한다는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사람이 물과 불보다도 더 심하게 仁을 어겨서, 물과 불을 밟은 사람은 보았으나 仁을 밟아나가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한 것으로 앞의 설과 비슷한 듯 하지만, 그저 필수요소라서 중요하다는 설명보다 더욱 강한 역설적 방식으로 물과 불의 긴요함보다 훨씬 더 仁을 행함이 간절하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방향이 다른 해설인 듯 하지만, 결국 어느 쪽이든 仁의 중요성에 대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수를 역설한 것에는 이견이 없기에 두 의견 모두 참고할만하다. 그래서 이씨(李郁(이욱))는 깔끔하게 한 줄로 아래와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이는 夫子(부자)께서 사람들에게 인을 하도록 권면하신 말씀이니, 아래 장도 이와 같다.”
그렇다면, 물과 불이 갖는 다양한 함의와 다각적 공자의 비유가 얼마나 화려하게 이 장의 면면에 담겨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살펴보았던 두 가지 설 모두, 물과 불이 인간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들이고 필수적인 요소인가에 대해서는 공자가 비유했던 의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물과 불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 왜 공자가 굳이 인(仁)과 비교하기 위해 두 요소를 가져왔는지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아무리 가물어도 물을 구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강에 가서든 땅을 파서든 물을 구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불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내 물속에 있거나 비와 폭풍으로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꺼진 불도 다시 피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仁)은 외물(外物)에 해당하는 물과 불, 두 요소들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仁)이 없으면 사람은 질서가 없어지고 폭력이 난무하고 염치가 없어지며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물과 불은 하루 없다고 하더라도 불편할 뿐이지만, 인(仁)은 단 하루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를 바로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요소이니 동일한 정도로 비교할 수조차 없는 개념인 셈이다.
또 다른 층위의 재미있는 이해도 가능하다. 물과 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상해 보면 왜 공자가 같은 동사인 ‘밟을 도(蹈)’를 사용하며 극단적인 죽음까지 언급한 것은 그와 같은 부분도 열어둔 안배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그것에 빠져 죽고, 불이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나서 화재로 사람이 죽는다.
그런데, 仁이 많아진다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가? 이 장의 마지막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이 질문을 완곡하게 던진 것에 다름 아니다. 정작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지만 그것이 당장 없어도 불편할 뿐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데 물과 불이 중요하고 무서운 줄은 알면서, 정작 단 한시라도 없게 되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仁은 갖추고 키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안일한 인식을 후벼 판 것이다. 仁을 많이 쌓고 모두가 수양하여 갖추게 된다고 하여 仁에 빠져 죽고 타 죽는 일은 결코 없다는 점을 노력하지 않는 인간만이 투덜거리는 행태를 공자는 탄식하고 또 탄식한 것이다.
인(仁)...
2년 가까이 매일 아침 <논어(論語)>를 한 장(章)씩 읽어오면서 공부하고자 하겠다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공자가 말하는 ‘仁’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싶더라도 행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볼멘소리들이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로 ‘仁’을 이해하지 못해서 행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에게 공자의 인(仁)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 달라고 묻거나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들이 인(仁)이 무엇인지를 누군가에게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에 의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더 큰 범위에서 보자면 ‘仁’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옳지 못한 것을 보고 그것은 잘못이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도움이 필요한 힘겨워하는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를 돕는 것, 자신이 가진 힘이나 더 많아지고 강해질수록 또 지위가 더 높아질수록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이들과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논어(論語)>를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상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럴진대, 그 어려운 한자투성이의 법전을 공부하여 법조인이 된 자들이나, 의학용어가 가득한 원서를 읽어 의사가 된 이들, 그리고 어려서부터 고액과외로 명문대를 간 재벌 2세와 3세들이 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해서 그렇게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은 기가 막히게 편법까지 써가며 악착같이 챙겼던 것일까?
교육현장은 물론이고 정치 현장에서 자신의 주변에서 만나온 수많은 가식 어린 이들의 민낯을 대하며 공자는 그 모든 이들이 배우지 못해서 仁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제대로 알라고 묵직한 일침을 이 장을 통해 던진다. 물과 불이 비유의 대상이 된 것은 돈이 많은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신분이 높은 자이든 그렇지 못한 자이든 모두에게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과 불은 돈이 더 많다고 해서 비싼 것을 쓰고, 돈이 없다고 하여 싼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배우는 자들이 다시 한번 생각할 부분임을 공자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라고 일깨워준다. 그것은 인(仁) 또한 물, 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 많이 배운 위정자라고 하여 仁을 더 우아하게 실현하고 제대로 실현한다거나 배움이 짧아 지식과 교양이 없는 백성들이라고 하여 仁을 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성현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었지만 결코 배움이 짧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배웠다고 나대며 지위가 높으면서도 제대로 仁을 행하지 못했던 위정자들을 훨씬 더 매섭게 질정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것이 바로 공자가 강조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자가 갖추어야 할 책임이자 의무였다. 둘째는 그것을 제대로 배우고 익히지 못한 이들에 비해 배웠다고 하는 자들이 배운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지적이자 비판인 셈이다.
올바르다고 배운 것, 잘못이라고 배운 것이 실제로 현실과 배치된다고 볼멘소리의 구차한 변명을 하는 자들의 그 현실이라는 기준을 보면, 공자가 그렇게까지 역설적인 강조를 하며 일깨우고자 했던 仁의 정체는 이미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양심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배운 대로 실천하게 되면 자신의 이익을 온전히 챙길 수 없다는 내용을 완곡하게 감춘 그야말로 구차한 변명이다.
꽉 막힌 명절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당당하게 9인승 차량이라며 운전자와 보조석에 앉은 두 사람정도밖에 안 보이는 차량이 버스 전용도로를 질주하거나 사고 시 사용되는 갓길을 신나게 달리는 외제차를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죽하면 그 얌체족들 때문에 경찰차가 아닌 일반차로 위장한 암행차량까지 단속하겠다고 등장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단속된 자들은 하나같이 투덜댄다. 재수가 없어 다른 사람들은 다 걸리지 않고 바로 앞을 지나갔는데 자신만 잡혀 단속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9인승 차량이 8인이상 탔을 때 버스전용차량을 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랬을까? 다들 꽉 막혀 서 있는데 뻥 뚫린 갓길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누군들 없어서 바보같이 그 정체 안에 참고 조금씩 움직인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말이다.
일 잘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한 권익위라는 곳에서 연초에 아주 노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어이없는 뉴스를 요 며칠 전 접하게 되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방역 제한이 강화하던 한창시절, 한 사람당 많게는 100여만 원까지 코로나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의 틈새를 타고, 한 사립대학의 정규직 교직원들이 비정규직 직원들이 받을 수 있는 이 지원금을 버젓이 부당하게 타갔단 의혹이 수사로 밝혀진 것이다.
질병청은 명백하게 ‘국가 지원을 받는 사립학교 근로자에게 코로나 생활지원금을 줄 수 없다’고 정해놓았다. 다만, 비정규직 근로자 등이 유급휴가를 받지 못할 경우만 예외적으로 지원한다는 단서조항을 두었다. 그런데 정규직이라 지급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대학직원들이 버젓이 그 돈을 타간 것이다. 심지어 교수마저 그들의 범행(?)에 동참하여 돈을 챙겨갔다.
해당 교직원들의 단톡방에 이 신청을 주도한 팀장이라는 자는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악센트, 우리는 ‘등’에 악센트”라는 표어 같은 말을 던지더니, 이내 “유급휴가를 받지 않은 사실만 확인되면 돈을 줘야 하는데 공무원들이 거시기하다.”라고 설명한다. 정작 그 팀장은 경기도에서 돈을 못 받았고, 다른 직원들은 서울시에서 1인당 96만 원씩을 챙겨 받았다. 이렇게 공범이 되어 돈을 챙긴 교직원만도 무려 40여 명, 총금액은 무려 4천여만 원이 이르렀다.
이 기가 막힌 사건의 압권은, 이 사실을 취재하는 기자의 ‘비정규직 등에 정규직이 포함된다고 보시는 거예요?’라는 질문에, 후안무치하게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확인자살을 한 팀장의 답변이었다.
대학원 시절,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적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으면서 학생들 앞에서는 물론 언론 인터뷰나 다른 교수들 앞에서도 점잖은 척은 온투 다 하던 교수가 황급히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며 쓰던 문서를 확인하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우연히 보게 된 서류를 들킨 것이 쑥스러웠는지 그는 구차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띠며 묻지도 않은 말을 내뱉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고 체크하면 부양수당이라는 게 나오는데 다른 데에서 두 분이 알아서 살고 계시기도 하고 내가 함께 살며 모시지 않긴 하지만 자식이니까 부양하는 것은 맞는 거 아이가?”
과연 그가 그렇게 돈 몇 푼 더 챙겨 받는 것이 편법이 아닌 불법임을 몰랐을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엄연한 구분이 있음에도 그 틈새를 악용해 놓고서도 언론인터뷰에 당당히 그 뻔뻔한 태도로 일관한 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돈을 환수하는 것에 앞서 그들을 얼른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줘야 맞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