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아도 될 것은 무엇인가?

정작 사양할 것들을 제 욕정을 못 이겨 기어코 저지르는 것들에게.

by 발검무적
子曰: “當仁, 不讓於師.”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仁을 (행할 일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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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그렇게 행하기 어렵다는 인(仁)을 구체적인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나와 있다.


지난 시간 공부하면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행하는 것이 어렵다거나 진정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도대체 仁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질문을 받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옛사람들이 그 인(仁)을 도대체 무엇이라 정의했는지 대략적으로 소개하며 개념을 잡는 것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仁을 행하는 근본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근본은 사람의 本心에 있되, '仁'이라는 명칭은 실천한 이후에 붙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맹자는 ‘측은(惻隱)한 마음이 바로 仁의 端(단; 실마리)이다.’라고 하여, 仁을 행하는 근본이 역시 인간의 본심에 있다고 보았다.


이후, 仁이란 개념은 그 범위가 확장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각자 본분을 극진히 행하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순(舜) 임금은 아버지 고수(瞽瞍)의 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해드림으로써 孝를 이루었고, 비간(比干)은 은나라 주(紂) 왕이 포악(暴惡)했지만 그를 위해 간절하게 간언(諫言)함으로써 忠을 이루었으며, 文王은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사궁(四窮)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자(慈)를 이루었다. 그 孝, 忠, 慈의 실천이 종합적인 개념 仁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듯이 仁을 理로 본다면, 이 장의 원문에서 언급된 ‘當仁’의 仁만이 아니라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언급된 仁이란 글자를 모두 풀이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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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언급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仁을 하나의 정의개념이라고 규정지은 초심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라 여겼는데 저기에서는 저렇게 사용되니 더욱 혼란스럽고 심오한 형이상학적인 애매모호한 개념이라 어렵게 여기게 된 원인을 제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이유로, 일단 이 장에서의 인(仁)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주자가 이 장에 대한 해설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當仁(당인)’은 仁(인)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것이다. 비록 스승이라 할지라도 또한 사양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마땅히 용맹스럽게 가서 반드시 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은 사람이 스스로 소유하여 스스로 행하는 것이요 다툼이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사양함이 있겠는가.


원문에서 인(仁)의 실천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능동성을 강조한 것으로 ‘양보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해도 괜찮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제자가 뛰어나서 스승을 뛰어넘는 것은 좋은 것인데 굳이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이상해 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원시유학의 기본 개념에서 보면,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었다고 하더라도 대놓고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지라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스승의 입장에서 기뻐하는 일이지 제자가 스스로 나대며 확인받고 인정받는 것은 아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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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우열을 가리는 행위를 벌이는 자체가 볼썽사나운 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仁)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서는 ‘當仁’이라는 용어에 대해 ‘인을 나의 임무로 삼아서는’으로 풀이했으나 공안국(孔安國)은 ‘인을 실천하는 때를 당해서는’라고 해설하여 미묘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위 해석에서 나 역시 두 가지를 섞어 풀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설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장에서 공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이 장의 정수를 확인할 시간이다. 주자의 주석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스승에게도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양하지 말라는 그 인(仁)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자율의지에 의해서 행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장의 핵심을 이해한 주자도 ‘스스로’에 방점을 두고 두 번 이상 그 용어로 강조를 하였고, 역시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정자(明道(명도))역시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을 행함은 자신에게 있으니 사양함에 관여되는 바가 없지만, 선한 명성이 밖에 있는 것으로 말하면 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인을 행하는 것은 유기(由己;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라는 설명에 다름 아니며, 그 가르침의 부연설명은 앞서 ‘안연(顏淵) 편’에서 공부했던 “하루 극기복례를 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온다. 인을 함은 자기에게서 비롯하나니, 남에게서 비롯될 것인가?”라는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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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설명해놓고 나니 무언가를 양보한다는 말이 새롭게 들린다.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실상 인(仁)뿐만이 아니다. 여러 자식들이 있는데 부모에게 효도를 서로 하겠다고 양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누구도 탓할 이가 없다. 부모의 재산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전에 어떻게 해서든 독점하겠다고 부모를 가두고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두렵기까지 하다.


웬만한 패륜범죄는 이제 기레기들조차 선별해 가면서 뉴스로 다룬다고 하는 점을 최근 여러 제보 건을 접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더 자극적인 살해방법이거나 경악할만한 수준이 아닌 그저 재산을 노리고 그런 짓을 한 범죄는 더 이상 확정된 것만을 받아쓰기하는 기레기들조차 다루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도덕적 잣대가 어느 수준까지 바닥을 치고 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누구에게도 양보해서는 안될 것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가 있음에도 새로운 자극을 찾아 바람을 피운 이른바 ‘ㅇㅊ(‘유책자’라는 신조어의 새로운 형태)’이들이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한술 더 떠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짓는 배우자에게 “요즘 바람피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놈의 인터넷 네트워크 세상이 무엇인지, 이제는 불륜을 조장하는 만남의 카페부터, 간통이 2015년 폐지되고 나서 상간녀, 상간남에게 위자료 청구소송을 하기 위한 증거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복수하는지를 컨설팅해 주는 카페가 인기 만발이라고 하니 수천 년 전의 공자가 이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의 개돼지들이 달래 개돼지가 아니구나 싶은 탄식을 길게 내쉬었을 것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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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내가 양보해야 하지 말 것을 설명하면서 효도나 부부간의 사랑을 설명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어제 공부한 바와 같이 결국 공자가 궁극적인 군자의 완성된 목표지향점으로 보는 ‘仁’이 위정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거대한 담론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주기 위함이다.


이 장의 핵심 정수가 인(仁)의 실천 핵심 포인트가 스스로의 실천의지에 있다는 사실은,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명확히 강조하는 공자의 바람이자 유일하게 사람에 대한 마지막 신뢰이고 희망이 절절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부모님에 대한 효도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것들을 생각하여 나열하다 보면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공통점을 자연스레 발견할 수 있다. 그 공통점은 바로 양보를 하다가는 후회를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다양한 구구절절한 변명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남편이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다거나 아내가 집에서 퍼져있는 꼴이 도저히 매력을 찾을 수 없다는 둥 속궁합이 안 맞아 만족스러운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거나 성향이 워낙 달라서 맞춰 살 수가 없다는 등 말 그대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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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에게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는 대상과는 과연 그 모든 점들이 다 맞느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그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고 한다. 결혼적령기라는 나이가 갈수록 늦어져가는 최근 흐름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서른이 넘도록 다른 원 가정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만나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잘 맞는다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결혼해서 부부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겠지만, 어느 한쪽만이 상대에 대해 불만족하는 결혼생활이란 없다. 위의 저 지저분한 변명을 늘어대며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하려는 자들 역시 불륜을 아름다운 사랑의 끝으로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통계학적으로 확인되어 있다. 불륜은 결혼과 달리 겉으로 보여지는 단편적인 요소만으로 서로의 욕정을 채우는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다시 결혼이라는 생활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배우자나 자녀가 있음을 알고서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단순히 도덕적인 결함이상의 현실도피적인 성향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공자의 양보할 수 없는 인(仁)을 설명하면서 삐뚤어진 정치꾼들의 추악한 행태도 아니고 하필이면 그 지저분한, 요즘 사회에 만연한 불륜에 대한 문제를 비유로 드는 것이 생경한가? 아니. 나는 아침 논어 읽기를 하면서 꾸준히 발검스쿨의 학도들에게 강조해 왔다. 당신들이 정치인이거나 최고위 과정 특강을 듣겠다고 강의실까지 왕림하신 대단한 위치에 있는 CEO들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가장 작은 단위의 가정에서부터 당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대단한 경영철학이나 훌륭한 정치이념 따위를 설명해 준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단한 자리에서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자식이 마약으로 사고 치고 술 먹고 운전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여러 가지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을 때, 그 부모 된 자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사죄하고 자신의 가정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당분간 자신의 직을 모두 내려놓고 가정과 자식을 먼저 추스르겠다고 물러서는 것을 유사 이래 당신이 보고 들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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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단한 자리까지 올라가고 유지하느라고 자식은 과외선생이나 일타강사에게 맡기고 애가 밥을 제대로 먹는지 밥상머리 교육은 고사하고 집안일 잘하는 아줌마에게 두둑이 월급이나 주면서 집안이 잘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당신이 하는 일이 훨씬 더 큰 일이고 돈을 훨씬 더 벌어올 수 있는 대단한 일이라서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 키우며, 부모님을 찾아뵙고 부양하는 일은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정말 그렇다면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묻자. 그렇게까지 해서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진정한 당신의 삶을 찾는 것인가? 집에서 산후우울증과 싸워가며 남편의 아침을 챙기고 아이를 키우느라 시들시들해져 가는 전업주부의 삶보다 애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한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힐을 신고서 화장을 진하게 하고서 저녁 회식에서 싱싱한 젊은 남자 직원들과 부비부비하는 것이 당신이 말하는 당당한 자신의 삶을 찾는 커리어 우먼의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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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원을 집어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 나이가 되었다며 중고생 아이들을 학원에 처넣어 세탁기처럼 돌리고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몸을 만들겠다고 남자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는 희열에 샤워하며 이혼하고 불륜이 엔조이하는 삶이 아니겠냐고 키득거림을 부끄러워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과 언니동생 하면서 돈 주고 사는 여자들에 질려 어떻게 공짜로 생생한 연애질 한 번 하지 못해서 껄떡대는 자들과 술자리를 하며 희희낙락대는 것이 당신이 원하는 즐거운 삶이냔 말이다.


누구에게 묻지 않더라도 당신 스스로가 알 것이다. 100년을 꽉 채워서 산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그리 길지 않건만, 그 짧은 인생을 무엇을 하고 떠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살며 그것이 진정 살아있는 삶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쓰레기들이 아직까지는 그리 넘쳐나지 않을 것이라 기도하고 기대한다.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仁을 어렵다며 손사래 치고 도망치기 전에, 당신이 당신의 본심 안에 담아둔 양심에게 물어봐라. 당신이 지금 양보하지 않고 평생 후회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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