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익에 따라 바뀌는 正道란 존재하지 않는다.

잘못을 알고서도 내 일이 아니라며 눈감는 자들에게.

by 발검무적
子曰: “君子貞而不諒.”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正道를 따르고 작은 信義에 얽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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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다시 여섯 글자의 짧은 가르침으로 축약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나마도 두 글자가 갖는 의미가 전부인 내용인데, <주역(周易)>의 ‘원, 형, 이, 정(元, 亨, 利, 貞)’의 개념 중에서 ‘정(貞)’의 개념과 앞서 공부했던 ‘자한(子罕) 편’의 4장에서 공부했던 ‘절사(絶四)’의 개념을 연상시키는 ‘량(諒)’이라는 개념을 등장시켜 군자로서 갖춰야 할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주자 역시 짧은 장의 가르침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두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음을 강조하듯 다음과 같은 해설로 이 장을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貞(정)’은 올바르고 굳음이요, ‘諒(양)’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信(신)에만 기필하는 것이다.


앞에 ‘량(諒)’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 ‘자한(子罕) 편’의 4장에서 나오는 ‘절사(絶四)’를 기억할 학도가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한번 복습하는 의미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네 가지의 개념 중에서 ‘무의(毋意)’만 제외하면 ‘무필(毋必), 무고(毋固) , 무아(毋我)’의 세 개념은 ‘반드시 하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고,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버티지 않았고, 자기 고집대로만 하지 않았다.’로 집약된다. 이 의미가 바로 이 장에서 단 한 단어로 설명되고 있는 ‘불량(不諒)’이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이 ‘불량(不諒)’이라는 개념을 번역하며 나는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 법’이라고 풀이하였다. 정도(正道)로 해석한 ‘정(貞)’은 애매하나마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라고 하겠는데 도대체 그 작은 신의란 무엇인가? 두 개념이 한 가르침에서 문법적으로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주시하여 다시 그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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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정도(正道; 올바른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그 형이상학적이고 애매한 정도(正道)의 범위와 개념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부터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방식에 대한 문제까지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正道를 굳게 지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당위적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다양한 상황과 경우에 비추어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져보지도 않고 그저 본래의 뜻을 관철하려고 고집만 하는 것은 안된다고 보는 것이 공자의 입장이고 가르침의 정수이다.


정리하자면, 이 장의 ‘정(貞)’은 절조(節操)가 굳은 형태임을 가리킨다. 그에 대비하여 ‘량(諒)’은 작은 믿음, 융통성 없는 고집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諒은 아량이 좁고 판단을 잘못하여 일시적인 격렬한 감정으로 인해 작은 의리를 매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성어로 유명한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군자라면 굳게 지켜야 하는 원론적인 절개의 의미와 무식하게 그것을 강조하고 고집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공자는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諒이 단순히 貞과 대조되는 개념이 아니며, 貞과 달리 義에 온전히 부합하지는 않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즉, 諒은 貞의 예외적 경우를 지적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념만을 두고 설명하자면 다소 이해가 어려워질 수 있으니 조금 풀어서 생각해 보자.

곧지만 고집스러운 경우가 있고, 곧지만 고집스럽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곧지도 않으면서 고집스럽기만 한 경우도 있다. 여러 경우의 수가 있기는 하지만, 곧다는 대의명분(?)이 있다고 하여 그가 고집스러움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곧음이라 할 수 없다는 의문을 공자는 이 장을 통해 배우는 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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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절개를 가진 올곧음이란 고집스러움이 아니라고 공자는 말한다. 군자의 절개가 굳게 지켜지기만 한다면 사리사욕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변의 여러 유혹으로부터 굳건하며 다른 이들이 그의 의지를 쉽게 흔들고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만이라면 그것을 고집스럽기만 한 것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 질문의 해답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諒이었던 것이다. 앞서 개념어를 설명할 때 어리석은 미생의 고사를 언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諒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는 바로 TPO로 대변되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다.


진정한 절개와 올곧음을 가진 군자는 ‘절대’라고 강조할 부분을 ‘무조건’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앞서 어색해 보이는 듯한 역설이었지만 사람들이 시키지 않아도 저마다 과다하게 몰입하고 더 못 가져서 안달인 사리사욕(私利私慾)이 동한 경우와 달리 인(仁)을 행하고 덕(德)을 쌓는 행동에 있어서는 왜 그리도 인색하고 절제(?)하는가에 대해 탄식했던 것은 바로 균형과 조화는 모든 사물과 개념에 적용되어야 함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이 장에서 말하는 작은 신의는 어찌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집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것이 큰 의미에서의 정도(正道)에 조금은 교집합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결국 그것을 행하는 이의 마음에서 보면,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론적이고 근원적인 부분은 언제나 불변이 아니라 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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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절도’라는 명백한 범죄이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처벌은 언제나 공정하고 엄중해야 하지만, 실제로 국민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더 큰 도둑들과 손을 잡고 법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법의 맹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판검사, 변호사등의 법비(法匪)들이 자신들과 동류인 자들이 정말 어마어마한 경제적인 이익을 본 행위에 대해서는 눈감아주고 변호하고 불기소하면서도, 정작 너무 가난하여 배가 고파 라면을 몇 개 훔친 이에게 묻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절도의 양형기준에 맞춰 실형을 선고하는 짓이 얼마나 모순된 행위인가를 이 장의 가르침은 꼬집고 있다.


앞서 공부했던 ‘자로(子路) 편’의 20장에서 공자는 선비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그 첫 번째 등급은, 부끄러움을 알아 자신을 단속하고 외국에 나가 사신의 重任을 수행하는 선비였다. 두 번째 등급은,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 일컫고 한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다 일컫는 선비였다. 마지막 등급은, 말에 신의 있고 행동에 과단성 있는 소인이라 규정하였다.


뜬금없이 이 장을 소환한 이유는 하나이다. 선비의 세 가지 등급이라고 했지만, 마지막 등급은 명백하게 소인이라고 규정짓고 있는데, 그 소인의 등급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이 반드시 신의를 지키고 행동이 반드시 과단성을 지님은 돌이 서로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내는 소인이다”라고 설명한 바로 그 부분이 이 장에서 말하는 모순을 벌이는 자를 소인이라 지칭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함이다.


분명히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소인이라 칭하였지만 선비의 마지막 등급이고 부류라 한 것은, 그렇게 구는 이도 선비는 선비라 본 것이다. 그나마 작은 신의마저도 없는 이가 발에 차이는 현실을 감안하면 무식하게 융통성 없이 구는 것도 소인임과 동시에 선비의 끄트머리에는 들어간다는 점이 더욱 아이러니한 공자식 유머인 셈이다. 진정한(?) 소인은 고집스러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곧지 않은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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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아침 논어 읽기를 함께 하며 사회를 좀먹는 법비(法匪)에 대해 다양한 형태들을 소개하기는 하였으나 군바리가 정권을 차지한 적도 있고, 오래된 정치경력을 내세운 욕심쟁이 정치꾼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정권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들의 시대에도 법비(法匪)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갔고 그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보이지 않는 강한 콘체른을 형성하다 못해 아예 어느 순간에는 그 덩치와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정도로 드러내면서까지 정권을 가지고 노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하다못해 법비(法匪)들의 농간을 넘어서 그들의 주된 세력들이 정권을 차지한 시대가 도래한 아주 가까운 과거의 오늘. 검찰에서 그리고 법원에서 아니 이제 수사종결권을 가진 경찰의 수사현장과 조사 현장에서 그들이 얼마나 작은 신의를 정도(正道)라 포장하며 스스로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자처하는지를 넌더리가 날 정도로 목도하여 왔다.


가정법원에 아동학대죄로 보호처분을 받아 온 대부분의 피고들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최근 법령이 바뀌면서 사랑의 매조차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사회적 흐름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와 교사를 아이들이 112에 전화하겠다며 협박하는 역전현상이 이제 이상하지도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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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체벌을 인정하던 기존 법령을 폐지하게 되면서 사랑의 매 자체도 인정하지 않게 된 이유는 사실 악랄해져만 가는 아동학대와 그로 인한 어린 피해아동들이 늘어나게 된 배경이 컸다. 그런데 정말로 아이러니한 점은 악랄해져 만가는 아동학대 범죄가 줄어들기보다는 아동학대로 자식이나 제자에게 신고를 당해 약식기소로 벌금을 내거나 가정법원에 보호처분으로 송치되는 부모와 스승들이 훨씬 더 많아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본래 아동보호를 하겠다는 취지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경찰은 폭력 행위가 있었는지 사실관계만을 조사하고 송치과 불송치를 결정할 뿐이라며 제 업무를 다 했다고 하고, 검찰은 수사종결권을 가진 경찰에서 보내온 의견서에 도장이나 찍어주면 그뿐이라고 또 제 업무를 다했다고 하고, 심지어 아동학대법과 관련하여 지자체와 공동으로 문제를 대처하네 어쩌네 하면서 마련된 지자체의 조사관이나, 신고 아동의 조사에 반드시 입회해야만 하는 국선변호인은 정의감은커녕 기소를 해야 실적이 된다는 그 옛날 공안검사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그래서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중2병을 꼭짓점으로 하여 낮게는 이미 초등학교 고학생을 시작으로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생명보다 소중한 스마트폰을 움직여 언제 어느 상황에서고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와 교사를 신고하여 아동학대범으로 낙인찍을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미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왔을 당신이라면 알 것이다. 조금만 악하게 마음먹고 그 날선 시기의 마음에 욱하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어떤 짓이라도 한다. 자신의 마음을 상처 입게 만들었다는 보복으로, 혹은 분리조치라는 혜택(?)을 통해 자신을 가장 억압하는 부모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정말로 말도 하지 못할 정도의 심각한 아동폭력으로 지옥 속에 사는 아이들도 있다. 본래 엄정한 아동학대법의 처벌규정은 당연히 그런 피해 아동을 지옥에서 구해주기 위함이다. 왜 뜬금없는 아동학대법의 현황을 뒤집고 나왔는지 이제 감이 오는가? 맞다. 법은 잘못된 부분이 없다. 그렇지만 법에는 눈이 없고 귀가 없으며 마음이 없다. 법은 그저 법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검찰, 혹은 마지막의 판결을 내리는 법원이 그 진위여부를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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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가 죽기 전 경찰에 지인들을 비롯해 소아과 의사의 신고까지 정인이를 지옥에서 꺼내줘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어떻게 일처리를 했던가? 증거불충분이랍시고 도장 찍어 검찰에 송치한 그 뻔뻔한 경찰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애가 다친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도 못 하는 아기한테 증언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또렷하게 말하는 질풍노도의 아이들이 신고한 명확한(?) 신고에 대해서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실관계를 정리하여 검찰에 송치해 버리는 ‘일처리’를 한다. 매번 집을 나가고 부모에게 욕설은 기본이고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던 경우 그 아이를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으로 강한 충격요법으로 통제를 시도해 보겠다고 했음에도 그 결단에 놀라 아동학대 신고로 도망치려는 아이에 의해 제도나 법령,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까지 그저 방편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걸 그 잘난 경찰대 출신의 경위가, 사시를 패스한 검사가, 사법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판사가 된 이들이 그 얄팍한 10대의 꼼수를 정말로 몰라볼까? 아니다. 그렇게 똑똑하다며 나대는 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안을 보려들지 않는다. 그것이 이 장에서 말하는 그들의 작은 신의인 것이고, 그저 산적해 있는 해결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 안일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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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누구보다 사람들의 그러한 사특한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움직이지 않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며 피하면 그뿐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하면 한도 끝도 없을 뿐 그건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며 제 갈길 바쁘다며 손사래를 치며 자들은 결국 당신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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