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욕하는 서민들은 결코 없다.
孔子曰: “天下有道, 則禮樂征伐自天子出; 天下無道, 則禮樂征伐自諸侯出. 自諸侯出, 蓋十世希不失矣; 自大夫出, 五世希不失矣; 陪臣執國命, 三世希不失矣. 天下有道, 則政不在大夫; 天下有道, 則庶人不議.”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天下에 道가 있으면 禮樂과 征伐이 天子로부터 나오고, 天下에 道가 없으면 禮樂과 征伐이 諸侯로부터 나온다. 諸侯로부터 나오면 10世에 〈정권을〉 잃지 않는 자가 드물고, 大夫로부터 나오면 5世에 잃지 않는 자가 드물고, 陪臣이 國命을 잡으면 3世에 잃지 않는 자가 드물다. 天下에 道가 있으면 政事가 大夫에게 있지 않고, 天下에 道가 있으면 庶人들이 〈함부로〉 議論(비난) 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계씨(季氏) 편’의 기본적 메시지를 첫 번째 장에서 이어받아 신하의 입장인 자들이 군주를 존중하지 않고 참람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질정을 담고 있다. 앞서 공부했던 첫 장에서의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정벌행위를 포함하여 그것이 결코 군주가 아닌 자가 할 것이 아님을 분명히 구별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禮樂(예악)을 제정하고 征伐(정벌)을 명하는 일은 천자만의 고유의 권한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자의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해 주자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왕의 制度(제도)에 제후는 예악을 변경하고 정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陪臣(배신)’은 가신이다. 이치를 거스름이 심하면 〈정권을〉 잃음이 더욱 빨라지니, 대략 世數(세수)가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천하가 안정되어 도가 행해지게 되면 천자나 제후가 아닌 대부가 政事를 마음대로 전횡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주자 역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은 명료하게 한 줄로 정리한다.
(大夫가) 정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또 윗사람에게 失政(실정)이 없기 때문에 庶人(아랫사람)이 非難(비난)할 일도 없다고 역설하였는데 주자는 그럴 수 있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윗사람이 실정(잘못한 정사)이 없으면 아랫사람들이 사사로이 의논함이 없으니, 그 입에 재갈을 물려서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주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도가 행해지게 되면 위정자가 정치를 잘못한 부분이 없으니 서민들이 失政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앞서 ‘태백(泰伯) 편’에서 공자가 ‘不在其位하여서는 不謀其政이라.(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政事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의견이다. 함부로 월권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지적과 달리 이 장에서의 의미는 위정자가 먼저 자신의 실수가 없게 하여 失政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주자는 이 장의 해설 말미에, 이 장은 공자가 천하의 대세를 통론한 것이라 논평하였다. 의미심장한 총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장의 말미에 방점을 찍은 내용이 결국 세간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비난하게 되는 이유가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경우에만 그렇다는 반어적 표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기레기 언론사들이 방송사를 종편이라는 이름으로 진출했을 당시 공중파에 익숙해있던 모든 국민들에게 종편은 그저 케이블이라는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 구색만 갖춘 것이었다. 그렇게 기레기 언론사들의 새로운 블루칩의 개척은 허망하게 그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우격다짐으로 기어코 군바리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딸의 국정농단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낮에는 방송되지 않는 공중파의 룰을 깨고 24시간 영양가 없는 옐로 페이퍼만을 내던지던 종편이 실시간 중계와 욹어먹기를 하며 그 국정농단을 계기로 정치이야기를 예능화하기 시작하며 노년층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아무 지위도 가지지 않은 자가 대통령의 뒤에서 실세라는 허세를 부리며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하였고, 자기 멋대로 사람들을 부렸으며 고위 공직자들이 그녀의 앞에서 설설 기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유럽으로 도망간 것까지 추적하며 어디에 숨어서 어떻게 지내는지 기레기들을 파견 보내서 실시간으로 그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것들을 뉴스라며 쏟아냈고,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에게 여러 번 눈도장을 찍어 공천이라도 한 자리받아서 여의도에 배지를 달고 팔자걸음을 걸을까 싶은 판검사출신이라는 변호사, 그나마 전직 판검사라는 전관 스펙도 없지만 얼굴에 분을 떡칠을 하고 여자 변호사라며 얼굴을 팔겠다고 설치는 이들을 포함하여 무엇을 전공했는지 도무지 알길 없는 교수라는 자들이 논객을 자처했다.
그 모든 사회적 현상이 어떠한 원인에 기인하여 그 꼬락서니를 연출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공부하는 이 장의 가르침이다. 만약 정치가 올바르게 되었고 위정자가 천하를 바르게 안정시켰다면 국민들이 정치를 예능으로 삼아 논객이라는 허접한 타이틀을 달고 나와 해외 토픽의 원고를 읽으며 낄낄거리는 따위의 가벼운 짓거리를 전 국민들이 볼 수 있는 카메라 앞에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위 판검사출신이라는 변호사들이 국민들을 위한 법률상담도 아닌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 논평이랍시고 자신이 공천을 받고 싶어 목을 내밀고 있는 당을 철저히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그렇게 각 당의 스피커 노릇을 방송에 나와 자처하면서 자신이 공천을 받고 싶은 당의 잘못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자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그것 역시 이 장에서 공자가 설명한 내용에 따르자면, 애초부터 위정자가 나라를 안정시켜 도가 행하도록 만들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공중파도 별반 차이가 없지만 종편이라는 이름의 기레기 방송사들이 정치를 예능으로 만들어 정치에 목을 매는 그 딱한 인종들을 만들어내기까지 모든 상황들은 어찌 보면 필수불가결한 외길수순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낮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던 노년층들을 책은 고사하고 말벗이라도 되어줄 친구나 자식들이 없어 TV라는 바보상자에 자연스럽게 시간 보내기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저 재미있는 시간 죽이기용으로 보기 시작했던 바보상자를 이용해 노년층의 눈먼 표를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만들겠다며 기레기 언론사들은 이제 절대 읽지 않는 그들의 종이신문에서 벗어나 종편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통해 재미를 제공하겠다며 노년층을 TV앞에 묶어두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의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실제로 국정농단으로 안정적인 시청률로 재미를 본 기레기 종편은 공중파에서 사람들을 홀리는 것에 익숙해진 방송제작꾼들을 거액에 영입하여 시청률 굳히기에 들어갔고, 불과 몇 년 만에 트로트 오디션이라는 예능 치트키로 노년층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고, 낮시간은 여전히 정치를 예능화하면서 자신들이 전달하고 덮어씌우고 싶어 하는 방식을 교묘하게 약을 섞듯이 녹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장의 가르침대로 만약 정치판이 올바로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도가 행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이 아무리 적당한 사실관계를 스포이드로 똑똑 떨어뜨려 가짜뉴스를 뒤섞은다한들 지금처럼 개판 오 분 전의 상황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국정농단 끝에 정권을 어렵게 다시 잡고 총선에서 절대적인 다수표를 몰아 정권운영에 걸림돌이 없도록 만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정권은 스스로 제발에 걸려 부정이 이리저리 툭툭 터져 제대로 몇 발을 옮기기도 전에 오물이 모두 터져 나와 온몸에 역겨운 냄새를 여기저기 풍겨댔다.
이 장에서 해석을 ‘잃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한, '실(失)'의 의미는 요즘 시쳇말로 ‘폭망’을 의미한다. 무엇을 잃는다고 나와 있지 않지만 그것이 백성들의 신뢰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여 굳이 밝힐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참람된 짓을 하여 잃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만이 아니다. 공자가 굳이 그 목적어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너무 당연하고 명백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 목적어에 들어갈 내용이 ‘모든 것’이기에 하나로 단정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자가 그것을 세대의 흐름으로 비유하여 이어짐을 말한 것도 그와 같은 유추가 합리적일 수 있음을 뒷받침해 준다. 봉건전제군주제의 특성상 아버지대의 부와 권력은 그 자식에게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즉, 능력이 되는 자가 그 권위를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권력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저 계승된다는 말이다. 원시유학의 적통을 말하면서 자기 자식에게 권력을 자연스레 이양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능력 있는 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을 현군(賢君)이라 칭했던 것은 조선시대 성리학으로만 유학을 오독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일 수밖에 없다.
이미 공자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제대로 배우고 익히며 실천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이들은 모두 수천 년 뒤의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했던 전문경영인제도에 대해 인정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천하에 도가 행해지게 할 수 있는 방법임을 실천으로 보여왔다.
허구한 날 TV앞에 앉아 정치인 어떤 놈이 썩었네 어쨌나 하는 것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정작 먹고살기 어려운 농부와 서민들이라면 당장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고 하루라도 땀 흘려 시간을 쪼개 잠잘 시간도 없는데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시선을 돌릴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할 일이 없어 특별히 무언가 자신을 위해 집중할 일이 없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과 수련을 해본 적이 없기에 그저 쓰레기 종편에서 떠들어대는 것들을 마치 지식인 양 그대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러한 자들에게나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에게나 현대 민주주의의 표가 갖는 가치는 똑같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 캐려 한다면 불안해서 단 한순간이라도 편안히 잠을 잘 수나 있을까? 그 공공연한 비밀을 지금은 부와 권력으로 억누르고 이슈화되지 않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것이 발각되고 만천하에 공개되는 날, 그 사실만으로도 정치적으로 매장되는 것은 물론, 버젓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수치스러운 오명을 자식에게까지 남기게 될 텐데 그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가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여 그 부정이 오래가지 못함을 가리킨 의도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본래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여 융성하고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전 세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에서 잘못을 수정하고 좋은 점은 계승해 나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지만 공자가 보아왔던 역사의 교훈은 인간의 그릇된 사욕(私慾)으로 말미암아 그 간단해 보이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쉽게 부와 명예를 긁어모으고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더 늘리고 누리는 방식을 가르치고 답습하고 심지어 자랑이라고 여겨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 가문이 망하고 사회가 멍들게 조장하고 나라를 말아먹는 일에 그들은 앞장서왔던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에 정치를 하는 자들을 들여다보라. 특히, 자신의 아버지 지역구를 물려받아 2대째 정치를 하는 자들을 살펴보라. 대개 그들의 특징은 형제 중에서도 한 명은 부(富)를 움켜쥐고 또 다른 형제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권력을 움켜쥐어 상부상조(?)하며 그 부와 권력을 자기 자식들의 대까지 대대손손 이어지게 만들고자 안간힘을 쓴다.
비단 정치 쪽에만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다. 법조계가 그러하고 의료계가 그러하며 이른바 전문직이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한평생 파온 그 길의 노하우를 자식들에게 건네주는 것이 가장 간명하고 확실한 유산이라고 어느 순간부터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부모가 자식 역시 자신처럼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비난받을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이 비어보이는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면서 능력이나 자질이 안 되는 자식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편법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그 지저분한 부와 권력을 계승시켜 주려는 것을 눈물겨운 부모의 사랑이라 포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종편을 보며, 서민이라고 자부하며 정치꾼을 욕하는 당신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