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알진 못할지언정 알려고 노력은 하고 있나

잘못하고서도 인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by 발검무적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上等이요, 배워서 아는 자는 다음이요,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애써서)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니,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도 배우지 않으면 백성으로서 下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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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배움의 조건과 태도를 기준으로 삼아서 인간을 네 부류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른바, 生知(생지) 學知(학지) 困知(곤지) 下愚(하우)의 넷이 바로 그 네 가지 부류이다. <논어(論語)>를 읽었다고 티 내고 싶어 하는 빈수레들이 생각보다 많이 언급하는 장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많이 언급되고 인용되는 것을 읽고 보고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들 중에서 이 장의 뜻을 오롯이 이해하고 파악하여 입에 올리는 자를 나는 아직까지 만난 본 적이 없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해석하면 되는 것인데, 왜 오롯이 이 장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절하(?)하는가를 투덜거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오늘 공부를 마치고 나서도 그런 의아함이 남는지를 곰곰이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볼 것을 권하는 바이다.


이 장을 이해했다고 인용하는 이들에게 이 장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검증(?)하는 가장 간단한 질문 중 하나는 바로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존재하기는 합니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존재한다고 上等에 둔 것인가? 실제로 우리는 앞서 ‘술이(述而) 편’의 19장에서 공자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자신은 生而知之者(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을 통해 이 장의 예고편(?)을 본 바 있다. 공자의 겸사대로라면 공자는 이 장에서 두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해설을 할 수 있다면 이 장을 절반은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 장을 오롯이 이해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또 다른 검증의 기준은 바로, ‘두 번째 등급으로 설명된 배워서 아는 자와 세 번째 등급으로 소개된,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배우는 자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이다.


오히려 세 번째 등급에 대한 이해는 마지막 가장 하등(下等)으로 소개된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도 배우지 않으려는 자’와 차별성을 확연히 갖기 때문에 둘만 두고 봤을 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나 두 번째 등급은 세 번째 등급과 비교할 때, 도대체 어떤 차이를 갖는지에 대해서 원문만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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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서 통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아래 주자의 해설에 의거한 것이니 아래 주석을 참고하길 바란다.


‘困(곤)’은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이른다. 사람의 기질이 똑같지 않음이 대략 이 네 가지 등급이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 자신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할 정도의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라는 상등(上等)의 등급은 무슨 기준으로 정해진 것일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는 없다. 절대 기준을 삼기 위해 상등(上等)으로 둔 것이다.


비슷한 언급은 사실 <중용(中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며, 어떤 이는 곤혹을 겪고서 알되 앎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며, 어떤 이는 편안히 행하고 어떤 이는 이로움으로 행하며 어떤 이는 힘써 행하되 성공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선천적 조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학문과 수양을 통해 誠(성)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결국 같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설정의 설명임을 알 수 있다.


<중용(中庸)>에서도 그렇고 이 장에서도 그렇고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이는 없다’는 명제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설정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困而不學(통하지 않는 것을 직접 당하고 나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이 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통해 이미 살짝 힌트를 준 것이기도 한데, 이 문장에는 도대체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배워서 안다는 것인지 목적어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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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수차례 반복적으로 공부하면서 공자의 논법에 대해서 익혀서 지금쯤이면 이미 익숙해졌을 만큼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공자가 목적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것이 너무도 모든 이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기에 생략되었을 경우가 그러하고, 두 번째는 그 첫 번째의 경우가 갖는 빈틈을 이용하여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감추거나 은미하게 보이지 않게 하여 더 강하게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그 목적어가 당연히 지식, 학문이며, 천하만물에 대한 이치 정도라고 이해하고 있던 이들은 혼란을 겪게 된다. 스스로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막연히 넘겼던 습관을 고치는 것에서 학문은 또 한 단계 진전하게 된다.


그 단계를 배움의 과정을 통해 이미 넘어선 양 씨(楊時(양시))는 공자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라며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의미를 정리한다.


“生知(생지)와 學知(학지)로부터 困學(곤학)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그 기질이 똑같지 않으나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오직 배움을 귀하게 여기니,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도 배우지 않은 뒤에야 하등이 되는 것이다.”


이 주석의 방점은, 통하지 못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않는 자가 백성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않은 ‘뒤에야 하등이 된다’는 부분에 있다. 즉, ‘통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풀이된, ‘곤(困)’은 단순히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 한정된 개념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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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어의 의미로 전성된 ‘곤(困)’의 의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뜻은,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알지 못해서 통하지 않아 곤란할 수도 있지만,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실수를 해서 곤란한 처지에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라면 실수는 잘 몰라서 그럴 수 있지만 악의를 가진 의도성을 가지고 역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공자를 비롯한 모든 배우는 자라면 알고 있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실수나 잘못을 하고 난 다음이다. 그래서 마지막 주석에서도 잘못을 알게 된 후에도 그것을 배우려 들지 않는 자가 하등이 된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배우다’라는 의미가 실수와 잘못을 통해 배워나가는 행위를 통칭하는 의미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에 대한 목적어가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며 태어나면서부터라는 것은 그 자질을 강조한 것으로 천부적인 자질을 의미한 것이지 태어나면서 인지능력조차도 없는 아기가 말도 배우기 전에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풀어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장의 의미는 인간의 배움 정도를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으로 자성(自省)하고 끊임없이 그 잘못과 실수를 보완하고 배워 익혀 나가는 수양을 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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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하고서도 고치려들지 않는 것(過而不改)’이 진짜로 잘못이라는 공자의 설명은 바로 이 장의 가르침으로 연계되고 완성된다. 공자에게서 비롯된 성선설(性善說)의 기본전제에 따르면,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언젠가는 알게 된다. 문제는 얼마만큼 뉘우치며 어떻게 반성하며 그것을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성(自省)의 과정을 통해 배워나가는 수양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한 번의 잘못이 다시 또 반복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것이 이 장에서 지적하는 최악의 하등(下等)인 자신이 한 행실이 잘못되었음을 직시하고서도 그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나가지 않으며 반성하지 않는 것으로 최악을 갱신하게 된다.


이 장에서 반대 사례까지는 부연설명하지 않았지만,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오히려 변명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하(子夏)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소인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꾸민다(小人之過也 必文)’라는 부연설명을 한 것이다. 소인들이 가득한 이 현실을 우리는 매일같이 목도한다. 이것은 더욱 큰 잘못을 낳는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


나라의 수장이라는 대통령이 국내도 아니고 해외에 나가 버젓이 말실수와 잘못을 연이어 저질러도 외교부 수장이라는 자가 바로 곁에 있었으면서 그것이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대강 덮으려 넘어가려 들지 않나, 국제적 무례에 해당하는 발언에 이란에서 한국 대사를 초치하는 강수로 항의했음에도 사과나 수습보다는 똑같은 이란 대사의 초치를 통해, ‘너희들이 잘못 이해한 것이다.’라는 외교사에서는 듣지도 보고 못한 해괴한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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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잘못된 행위임은 말한 나위도 없지만, 그 실수를 여당이라는 이유만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고, 노쇠하여 권위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자를 음성전문가랍시고 등장시켜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 대다수가 들었던 그 단어가 아니라고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일련의 사태들이 의미하는 바가 그들에게는 한낮 해프닝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 현상은 그리 가볍지도 쉽게 지나갈 것도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아주 잘 알고 있다.


평생 직업을 통해 배운 것이라,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곧 피의자의 자백이고, 그것은 죄의 인정이라고 몸과 머리에 익혀온 터인 검찰공화국의 무리들에게는 그리 인식될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어려서부터, 아니 최소한 제대로 된 정의구현을 하는 검사였다면 작은 잘못이라도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게 된 순간,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고 수습하는 것이 최선임을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에게 그것도 아니면 그들의 자식에게라도 배웠어야만 했다.


공자가 안연을 극찬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같은 잘못을 두 번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언뜻 들으면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는 것이 바보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실수나 잘못이 아닌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 아니라 평생 반복하는 이유는 거의 단 한 가지이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것이 실수이고 잘못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래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잘못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진정한 바보짓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공자는 이 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네 등급 가운데 生知와 下愚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生知는 그야말로 聖人이므로 보통 사람과 달라 성품의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下愚는 곤혹(困惑)을 겪으면서도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이들이기에 더욱 변화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더 많이 배우고 그 배운 것을 가지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른 자들이 그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공자는 이 부분을 훨씬 더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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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의 변명이 진실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진실이 등장하면 거짓이 사라진다. 진실이란 본래 사람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하고 실수를 했더라도 진심을 담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자, 즉, 배우고 익혀 그것을 실천해보지 않은 자는 그 진실이 갖는 힘을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단 한 번이라도 부모에게 혹은 친구에게, 운이 좋다면 스승에게 그것을 배워서라도 익혀 마음이 움직여 실천을 통해 그와 같은 경험을 해보았다면 그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그러한 이들이 많았더라면 공자가 굳이 이 장의 가르침을 통해 그 시대부터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는 웃픈 현실은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에게 교통질서를 잘 지키라고 했던 부모가 유치원에서 나온 아이의 손을 잡고 신나게 무단횡단을 하다가 경찰에게 잡혀 단속되어 이른바 딱지라는 과태료용지를 받으면서 끝내 자신이 잘못한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경찰에게 바로 앞에 그냥 뛰어간 아이와 부모는 왜 잡지 않느냐는 둥, 무단횡단한 사람이 경찰이면 단속하지 않았을 거 아니냐는 둥 떠들어대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짓이기도 하지만, 그 추한 꼴을 부모의 손을 잡고 보고 듣는 아이에게도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인지 상상만으로도 내 얼굴이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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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부모에 그 아이라고, 그 아이가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떳떳하다며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것은 그 아이에게도 문제가 있겠으나 그 부모나 그 주변의 모든 어른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아이도 아닌 성인이라면 더이상 무슨 말을 더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