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기 전에 늘 생각하라, 어떤 것이 옳은 지를.

사리사욕에 대한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동물들에게.

by 발검무적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으니, 봄에는 밝음을 생각하며, 들음에는 귀 밝음을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함을 생각하며, 모습(용모)은 공손함을 생각하며, 말은 진실함을 생각하며, 일은 공경함을 생각하며, 의심스러움은 물음을 생각하며, 분함은 어려움을 생각하며, 얻는 것을 보면 義를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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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덕을 닦으며 군자를 목표로 하는 배우는 자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무려 아홉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방법에 아홉 가지나 되는 방식이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으나, 이 장을 읽고 공부하고 풀이해 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렇게 많다는 아홉 가지 중에 우리가 단 하나라도 부합하는 것이 있는지에 대한 자성(自省)이 가장 크다.


한편, 이 장에서 제시한 視, 聽, 色, 貌, 言, 事, 疑, 忿, 見得의 아홉 가지에서 요결(?)은 <예기(禮記)>에 언급된 九容과 아주 밀접한 연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예기(禮記)>에 언급된 九容이란 군자의 용모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마음가짐을 설명한 것으로, ‘군자의 용모는 점잖고 조용해야 하기에, 발은 진중하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듬직하며 말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으며 기운은 엄숙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도록 해야 한다’라 하였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서로 다르면서도 연관된 아홉 가지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하며 율곡(栗谷; 이이)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려면 九容이 절실하고, 학문을 진취시키고 지혜를 더하려면 九思가 절실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또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명이던 최한기(崔漢綺)는, 九容과 九思를 표리(表裏)라고 이해하여 神氣를 밝게 닦아 변화시키면 용모도 변화되어 강유(强柔)와 화열(和悅)의 기상이 일마다 마땅하게 될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이 장의 원문을 뜯어보면, 생각뿐이 아닌 용모에 대한 부분이 섞여 녹아들어 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홉 가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끌어내다 보니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생각이나 그 마음자세가 얼굴빛이나 외견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음을 은미하게 강조하기 위한 것임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일깨워주려는 안배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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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자는 그 부분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여 九思에 대한 이유와 배경을 하나하나 상세히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봄에 가리운 바가 없으면 밝아서 보지 못함이 없고, 들음에 막히는 바가 없으면 귀 밝아서 듣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色(색)’은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요, ‘貌(모)’는 온몸을 들어 말한 것이다. 물음을 생각하면 의심이 쌓이지 않을 것이요, 어려움을 생각하면 분함이 반드시 징계될 것이요, 의를 생각하면 얻음에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있어 밝음을 생각하라는 다소 형이상학적인 설명에 대해,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거둬내고 온전히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집중하라는 설명은 의미하는 바가 심오하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결국 사실관계에 대한 것인데 사람이 끼게 되고 저마다의 사욕(私慾)에 의해 의견이 간섭하게 되면 오롯이 사실관계를 보고 듣는 것에 방해를 받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계속해서 의심하지 않고 의문을 물음으로 환치시켜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의심과 의문에 대한 질문이 결코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분함은 어려움을 생각한다는 것은 화가 났을 때는 당장의 감정에 휘둘려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患難(환난)을 고려해서 이성으로 절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見得思義(얻는 것을 보면 義를 생각하는 것)’은 앞서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見利思義의 대의와 같은 의미이다.


이렇듯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늘상 접하고 반복되는 행위들이 결국 나의 인격을 형성하고 내 주변을 변화시키며 종국에는 사회를 더 낫게도 혹은 더 혼란스럽게도 만들 수 있음을 공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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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공자의 의도를 읽은 정자(明道(명도))는 이 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이 한 줄로 정리한다.


“九思는 그때그때 그 한 가지 일에 오로지(專一)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생각함이란 반드시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물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과거에는 물론이고 지금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미용실에 갈 때만 쓰는 것이 당당할 일은 아니기에 생각이라는 자체를 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인간이라 부르고 동급으로 취급해 주는 것은 충분히 재고해 볼 문제이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른바 ‘九思’는 철학적인 구분으로 보면 動에 대한 공부라 규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위 주석에서 언급된 ‘專一’이라 함은, 敬의 자세이므로 궁극적으로 九思는 未發의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달아나지 않게 하는 靜의 공부라 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공자의 가르침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있어 한쪽만을 강조하는 방식은 찾아볼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침만이 아홉 가지 열거된 것으로 여겼다가 그 안에 담긴 복합다단한 공자의 가르침을 깨달으며 탄성을 내지를 중급자 이상의 배우는 자들을 위해 사 씨(謝良佐(사양좌))는 다음과 같이 생각함에 대한 논의를 확장시켜 정리한다.


“從容(종용, 여유롭고 자연스러움)하게 道(도)에 맞는 데 이르지 못하면 때마다 스스로 살피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록 본심이 보존되지 못함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니, 이것을 ‘성실히 함을 생각한다.〔思誠(사성)〕’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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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석에서 방점은 성실함에 있다. 고문(古文)에서 성실함이란, 어느 때에고 결코 마음을 느슨하게 두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양고전에서 꽉 찬 숫자에 해당하는 아홉을 들어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하고 그것보다 더 줄여 축약할 수도 있었는데 그리 하지 않고, 그보다 더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자면 끝도 없었을 텐데 그리 하지 않은 이유를 다시 한번 배우는 자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의문을 던진다.


무예를 포함하여 몸을 이용한 기예(技藝)를 익힐 때 모든 달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처음엔 스승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고 모사하고, 모사하고 그것이 내 몸에 스며들 때 즈음에 그 움직임의 의도를 스스로 깨닫게 되고, 그것을 깨닫고 부지불식간에 의도하지 않아도 그 움직임이 나올 때 즈음이면, 그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가 없음이 하나도 없음을 내가 가르칠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처음 무슨 의미인지조차 들어도 깨닫지 못하던 움직임들은 반복적인 수련과 연습을 통해 내 몸에 각인이 되고 나서야 몸이 일러주는 소리를 정신으로 듣게 된다.”


경험한 이들이라면 모두가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고 그 오묘함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리 그 동작이 갖는 의미를 듣고 머리로 새겼다고 해도 온전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몸을 쓰는 기예(技藝)라고 한정 지어 언급하였지만, 몸만 쓰는 기예란 세상에 없다.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기계일 뿐이다. 기계조차도 사람이 그 움직임을 계산하여 왜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면밀하게 계산한 대로 움직이는데, 하물며 그때그때 그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리는 사람에 있어서랴.


그 이론에 의거하자면, 머리와 생각만으로 완성되는 학문은 결코 없다. 공자의 가르침이 한문만이 가득한 서적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면 공자는 결코 성현일 수 없고, 그 가르침은 책 안에 죽어 있을 뿐이고 현실에 실천되지 못한 허무한 담론일 뿐이다. 현대의 무지한 자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떠들어대며 그것이 의미 없고 고리타분한 죽은 학문이라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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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약을 개발하면서 사람에게 그것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는지 그리고 치명적인 부작용은 없는지를 위해 임상실험이라는 것을 한다. 처음 동물실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공여부를 확신하고 나서도 그것이 정작 필요하고 적용되어야 할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임상실험의 시기나 방식은 결코 짧지 않고 그 방법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 임상실험이라는 것은 약이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임상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점이나 부작용에 대한 리스크를 없애고 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연구를 지속한다. 그런데 임상실험에 들어가기 전, 맨 처음 이론적으로만 구상되었을 그 약의 구성성분이나 공효에 대해 개발자들은 작은 실험들을 통해 그 약의 공효를 하나씩 첨가하고 융합하고 조합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해당하는 병을 고치는 것에도 그러한 수많은 과정과 노력이 가해지지만 모든 임상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삐뚤어져 일어나는 병폐를 확인한 성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공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에서부터 그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여 자신의 부와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당대 위정자를 보며 그 사회가 가진 부정과 부패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렇게 끊임없는 인간군상에 대한 관찰과 평생에 걸친 배움과 수양과 실천을 통해 병든 사회를 고쳐나갈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공자의 마음가짐은 결코 안일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았다.


앞서 이 장의 九思가 九容과 유기적이고 불가분의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설명하였고, 九思에도 용모에 대한 언급이 녹아들어 가,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의도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다소 엉뚱한 설명일 수는 있겠으나 아주 오래전부터 관상은 과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소싯적 관상학을 학문으로 공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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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로 먹고사는 연예인도 아니면서 전 국민이 보는 TV 카메라 앞에 인지도를 올리겠다며 꾸역꾸역 잊히지 않겠다고 얼굴을 내밀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정치꾼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러한 생각은 확신이 되고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최고의 학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하여 판검사를 한 이들이 유독 최근 TV에 많이 등장하곤 한다. 수백만 원에 달하는 피부관리를 받는 여자 정치꾼들은 물론이고 분칠을 하고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의 억지웃음을 띄우는 남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밤마다 벌였을 술판으로 다져진 똥배는 그렇다손치더라도 하루하루 일평생 자신의 욕망으로 가다듬어졌을(?) 그 얼굴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텅 빈 머리를 의심케 만드는 경악할만한 한 마디 한마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의 탐욕이 하루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나이 들어 늙고 추하다는 말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허술한 어퍼컷을 휘두르며 대통령이 된 자의 아내가 감히 흉내 내고자 했던 오드리 헵번이 보여준 노년의 모습은, 그녀가 보여줬던 이른바 리즈시절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격의 격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대한민국 정치꾼들처럼 수백만 원을 들여가며 피부과에 가서 관리를 꾸준히 해서도 아니고, 눈수술로 자의와는 상관없이 부릅뜬 눈으로 카메라 앞에 선 추한 남자 정치꾼처럼 의술의 도움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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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容儀(용의)는 神氣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마음가짐이, 그 생각함이 바르고자 스스로 늘 삼가고 수양함에 힘을 기울인다면, 굳이 매번 그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신기가 담긴 구리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떠냐고 굳이 남에게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여과 없는 성적표가 바로 내 얼굴이라는 점에서 관상쟁이에게 자신이 무엇이 될 상인지 묻지 않더라도 그 정답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젊은 날부터 이미 정의에 더 적극적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일기와 같은 심정으로 시를 적어 내려 갔던 윤동주를 모르는 대한국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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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삶의 자세를 따라 올바름을 위해 스스로를 다잡아가는 대한국민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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