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보지도 못했으니 감히 행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자들에게.
孔子曰: “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吾見其人矣, 吾聞其語矣. 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吾聞其語矣, 未見其人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善을 보고는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不善을 보고는 끓는 물을 더듬는 것처럼 하는 것을,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고 그러한 말을 들었노라. 숨어 살면서 그 뜻을 구하고 義를 행하면서 그 道를 행하는 것을, 나는 그러한 말만 들었고 그러한 사람은 보지 못하였노라.”
이 장에서는 크게 두 가지 수준의 행위에 대해 비교하여 논하고 있다. 얼핏 읽으면 그 두 가지의 경지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듯 하지만 공자는 전자(前者)의 사안에 대해선 ‘그러한 사람을 보았고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평가하였지만, 후자(後者)의 사안에 대해선 ‘그러한 말만 들었고 그러한 사람은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여 후자의 경지를 보다 높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공자가 실천의 양상을 확인하였다고 설명한 부분부터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전자(前者)의 사안은, 선(善)을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공자는 이 선(善)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양상을 설명하면서, 선(善)을 보면 마치 도망가는 것을 뒤쫓되 아무리 뒤쫓아도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善을 추구하고, 不善을 보면 마치 熱湯(열탕)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델까봐 재빨리 손을 빼듯이 주저 없이 不善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善과 惡을 제대로 알아서 진실로 善을 좋아하고 진실로 惡을 미워하는 것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주자가 <대학(大學)>에서 부연설명을 하면서 언급했던 ‘惡惡如惡惡臭 好善如好好色(악을 미워함은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함은 여색을 좋아하듯이 한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한 맥락에서 주자는 공자가 가리키는 이 전자(前者)의 사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과 악을 참으로 알아서 진실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 顏子(안자) · 曾子(증자) · 冉伯牛(염백우) · 閔子騫(민자건)의 무리가 아마도 이에 능하였을 것이다. ‘語(어)’는 옛말인 듯하다.
위 주석에서 실제로 이 경지에 올랐던 인물이라고 공자가 언급한 이들의 실명을 지칭하여 설명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자가 존경하는 선배 세대의 인물이 아닌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공자를 기준으로 전자(前者)의 경지는 누구라도 노력하면 이를 수 있는 실제적인 목표점이 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후자(後者)는 그리 쉽지 않은 경지임을 전자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미 앞서 공부했던 ‘은거(隱居)’라는 단어를 단순히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다는 상투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문자그대로의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숨어 살면서 그 뜻을 구하고 義를 행하면서 그 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정의에서는 특히,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여 당위의 의미로 쓰인 ‘그 뜻’과 ‘그 道’라는 의미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성취하고 완성하기 어려운 경지인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 뜻을 구한다는 것’은 행할 바의 道(도)를 지키는 것이요, ‘그 도를 행한다는 것’은 구하던 바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오직 伊尹(이윤)과 太公(태공)의 무리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당시에 顏子(안자) 같은 분도 또한 이에 가까웠으나 숨어서 드러내지 않았고 또 불행히 일찍 죽었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석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당위의 의미로 강조된 두 가지 개념은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닌, 한 가지로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쇄적 의미를 갖는다. 그 뜻이란 결국 자신이 지키려했던 그 도(道)이고, 그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앞서 그렇게 지키고 구하려던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전자(前者)에서 명백하게 구분지어 선(善)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보고서 본능적으로 가까이 하지 않고 손절하는 것보다 복잡해보인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의미도 복잡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단계별도 아닌 어떤 것이 선후(先後)라 딱히 규정할 것도 없이 상호보완적으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후자(後者)의 사안이 어려운 것은, 앞서 공부했던 ‘은거(隱居)’에 대한 공자의 개념이 이 장에 명확하게 드러나, 기존 고정개념의 ‘은거(隱居)’와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공자의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현재까지도 소위 ‘은거(隱居)’라는 개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는 벼슬자리에 물러나서 시골에 낙향하거나 사람들이 없는 산속에 들어가 세상과 등지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상당히 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전에 공자가 제대로 정의한 바와 같이, 이 장에서는 ‘은거(隱居)’의 명확한 개념은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기존의 개념과 차별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더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은거(隱居)’라는 개념을 완성시키는가를 설명한다.
자신의 뜻이 통하지 않는 세계하고, 자신의 충심어린 조언을 들어주지 않는 위정자가 권력을 잡은 세상이라고 하여 그저 그 꼴을 보지 않겠다고 산속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서 독야청청(獨也靑靑)을 외치며 유유자적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은거(隱居)라 불려서는 안된다는 공자의 세계관이 오롯이 반영된 가르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후자(後者)의 사안을 이룬 인물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설명한 공자의 의도에 대해 주자가 주석에서 아마도 이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라면 伊尹(이윤)과 太公(태공)의 무리정도가 되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공자의 시대에 그 경지를 보여줄뻔한 안연(顏淵)조차도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언급하며 그것이 얼마나 궁행(躬行)실천하기 어려운가를 역설하였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명제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고 구체적이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간단해 보이는 명제조차도 실천하는 것이 녹록한 일이 아님을 우리는 매일같이 현실을 통해 직면한다. 혼자만 착해서는 바보가 되고 이 현실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라는 볼멘 소리가 그저 변명만도 아니게 들려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가 당연하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식이라 한다. 그런데 그 상식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늘어나고 사회적 규범이 무너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은 법률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그 법률은 명문화되어 사회라는 조직에서 사람들을 규제하고 넘어서는 안될 선을 명확하게 규정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을 방지한다.
다시말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인 선에서 행동하면 법률이란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각자의 이익을 생각하며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보호하기 위해 ‘법률’이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기준을 만들어, 어떤 행위를 범법으로 보고, 그 범법행위에 대해 어떤 처벌을 어떻게 주는가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둔 것이다.
한자어가 가득한 두꺼운 법전을 보면, 지레 겁을 먹는 일반인들이 많긴 하지만, 결국 법률의 기본 토대는 사회적으로 당연히 그러하다는 상식에서 출발한 것임을 우리는 간혹 잊거나 간과한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아 법을 집행하거나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법률이라는 분야를 설명해주고 그 일을 대행해주는 자들이 어느 순간 일관된 기준도 아닌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해석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내 평생에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공정하고 정의를 구현하려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경찰이나 검사, 혹은 정말로 불공정한 판결로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원고나 피고나 어느 한 사람의 억울함도 일어나지 않도록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올바른 판결을 내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판사가 그 어디엔가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법조계의 언저리에 있는 동안에도 아니 이후에 은거(隱居)한 이후에도 내가 보고 들은 법비들은, 불과 몇 년도 공무원으로 일하지 않고서, 사익(私益)을 챙기겠답시고 설치다가 사고를 쳐서 의원면직을 당한 판검사가 뻔뻔하게 ‘전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더 많은 돈을 움켜쥐겠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자들뿐이었다.
이제는 세상을 먼저 떠버린, 속이 여리디 여렸던 CEO의 등을 쳐서 상장되지도 않은 주식을 그나마도 돈을 빌리는 형태로 구매하는 방식을 해서 거액의 이익을 챙긴 자가 검사장급 인물이었다는 이유로 법원의 판결에 그 놈의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같잖은 전제를 시작으로 지음(知音)사이였기에 뇌물수수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문을 쓴 자가 대한민국의 판사였다는 사실이 아무 상관이 없는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던 것은 단지 내가 은거(隱居)한 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대부분의 사특한 조직들은, 그것이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경찰과 검찰에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꾸준히 그들을 관리해왔다. 위 판결을 내린 정신나간(아니, 정확히는 양심이 나가버린) 판사의 판결에 의하면, 당장 무슨 일이 있어 그 일을 해결해달라고 돈을 주는 것은 뇌물에 해당하지만, 아무런 청탁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꾸준히 그 조직이나 사람들을 관리하며 돈을 지원해주었다면 그것은 대가성이 없기에 돈을 준 사람이나 돈을 먹은 사람도 아무런 처벌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꾸준히 적금도 아니고 용돈도 아닌 형태로 지원을 받아온 공직자가 지음(知音)사이라 뇌물수수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벼룩도 낯짝이 있지, 먹은 용돈 값을 해야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업을 하면서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현실을 감안하건데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은가?
회사에 정식으로 출근조차 하지 않으면서 사외이사라는 이름으로 거액의 연봉을 받고 대접을 받는 자리에 전직 판검사출신의 법비들이 버젓이 들어가거나 멀쩡한 제조업이나 IT기업의 대표이사에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전관 판검사들이 낙점되어 평소부터 그 분야에 관심이 많았네 어쩌네 인터뷰까지 하는 속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미 검사출신이 가장 똑똑하고 올그라운드 플레이어라며 고위공직의 요직을 차지하는 검찰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정권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미 율사(律士)들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법비들의 회전문 인사로 운영되고 있다는 수년전 드라마 속 풍자는 풍자가 아닌 논픽션 다큐멘타리였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왜 오늘의 가르침과 무관해보이는 법비들에 대한 성토가 이리도 날이 서있는지 그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가? 대통령의 멘토랍시고 특정인이 여당의 당대표가 되면 대통령이 탈당하네마네 누가 말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대낮 어느 약수터의 술이 거나하게 취한 노인네의 헛소리라고 착각할만한 말이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에 전직 판사라는 원로 법비의 입에서 나왔다는 뉴스를 보며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많은 이들은 모르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가 갑툭튀가 아닌, 판사시절 썩은 법원에 바른 소리를 하겠다며 대법원장에게 쓴소리를 했다가 재임용에 탈락하여 대구로 낙향한 인물임을 잘 안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없어 그 상황에 대해 보이지 않는 저간의 사정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감안해보면, 이제 원로의 입장이 되어 대통령의 멘토라고 자신의 앞에 휘장까지 버젓이 달고 목소리를 내며, 지금의 황당한 소리로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던 그가 소싯적 한때라도, 법원이 썩어가고 있다며 사법개혁을 외쳤다는 사실이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은퇴라는 것을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였다. 노쇠해져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의견의 개진이 이전에 자신이 이뤄놓은 손톱만한 업적마저 박살내버리고 망령난 노친네로 후배와 제자들에 무시당하는 이들이 역사적으로도 적지 않았던 것은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단한 자리에 모시지 않더라도 정말로 은거(隱居)한 이 시대의 어른이라면 그가 있는 자리에서 분명히 파고(波高)가 작지 않은 영향력을 분명히 발휘할 수 있을 것임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이들이 분명히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