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낮춰 지칭하는 이유.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서 예(禮)는 시작된다.

by 발검무적
邦君之妻, 君稱之曰夫人, 夫人自稱曰小童; 邦人稱之曰君夫人, 稱諸異邦曰寡小君; 異邦人稱之, 亦曰君夫人.
나라(제후국) 군주의 妻를, 그 군주가 일컫기를 夫人이라 하고, 夫人이 스스로 일컫기를 小童이라 하며, 나라 사람들이 일컫기를 君夫人이라 하고, 다른 나라에 〈말할 적에〉일컫기를 寡小君이라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일컬을 적에도 君夫人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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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계씨(季氏) 편의 마지막 장으로, <논어(論語)>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내용이 잘못 들어왔다는 식의 비판을 받는 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 해설서에서도 이 장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굳이 해석하려 들지 않으면서 앞서의 내용과 같이 제(齊) 나라의 기록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못 들어왔다는 정도로 폄하하고 넘어가는 장이기도 하다.


주자의 주석 역시, 아래와 같이 내용에 대한 부분보다는 그저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되짚어주는 정도로 그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寡(과)’는 덕이 적은 것이니, 겸사이다.


그래서 오 씨(吳棫(오역))도 이 장의 내용에 대해 공자가 직접 했던 가르침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무릇《論語(논어)》에 기재된 내용 중에 이와 같은 종류들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혹은 예로부터 있었는지, 혹은 夫子(부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것인지 상고할 수 없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일까? 나는 그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공자가 직접 그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고증은 별개로 하더라도 최소한 <논어(論語)>를 편집하는 후대의 제자들이 이토록 허술한 실수로 전혀 무관하고 상관없는 내용을 잘못 집어넣을 정도로 무책임했다고 보는 것은 기존의 편집 내용에 대한 신뢰도마저 떨어뜨릴 수 있는 심각한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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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장을 다시 조심스레 뜯어보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설명했던 후대 몇몇 학자들은 이 장의 내용이 뜬금없는 사전적 설명만을 열거하고 있어 어떤 가르침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치는 다양한 방식 중에는 그저 사전적인 지식을 정의하는 것이나 사실관계를 핍진하게 묘사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촌철살인 그 이상의 가르침을 남기는 형태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실제로 이 장의 내용은 <예기(禮記)>의 ‘곡례(曲禮)’ 하편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한 이유로 후대 학자 중에서도 이 장의 내용에 ‘자왈(子曰)’만이 빠졌을 뿐 공자의 말씀인 분명하다고 본 양백준(楊伯俊) 같은 이도 있었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원문의 ‘邦君’을 제후라고 풀이하였고, ‘君稱之’를 임금이 궁중에서 부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형병(邢昺)은 夫人의 夫는 도울 扶(부)로 말한 것으로 임금의 덕을 도와서 이룰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풀었다. 또, 다산(茶山)은 ‘自稱曰小童’을, 부인이 임금에게 스스로를 일컬을 때라고 설명하면서 小童을 ‘무지함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왜 이 장에 대한 의미를 풀이한 후대 학자들의 설명을 나열했는지 눈치챘는가? 계씨 편을 마무리하는 이 장에서 계씨 편을 통해 공자가 배우는 자들에게 전달하려던 메시지를 정리하는 것을 위정자의 부인을 어떻게 호칭하는가에 대한 사전적 기술로 대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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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장식(張栻)은 본 장의 의미를 정명(正名; 이름을 바르게 함)의 뜻이라 풀이하면서, 그 당시 그렇지 못한 실제를 나무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전적 의미를 진술하는 것만으로 사실관계를 지적하는 경우라면, 당대의 현실이 그 명명법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의도가 컸을 것이다.


그 내용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논어(論語)>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참람(僭濫)’이라는 ‘무례(無禮)’의 실체에 대해 공자가 지적했던 부분이 이 마지막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금만이 자신의 아내를 부를 수 있는 고유명사가 예(禮)에 맞춰 규정되어 있음에도 그 의미를 뭉개고 제멋대로 그 아래 신하된 자들이 그 호칭을 멋대로 쓰면서부터 사회의 규율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자신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나 그 아내가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렇게까지 한 장을 차지할 정도나 되냐고 의아해할 초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논어(論語)>를 강독하면서 늘 강조해 온, 그리고 매일 아침 <논어(論語)>를 공부하고 풀이해 주었던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주 작은, 사소해 보이는 호칭 같은 것들이 무너지고 대강 넘어가고 대단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덮어주는 사이 사회는 조금씩 좀먹게 되고 어느 순간 손을 쓸 여지조차 없는 쓰나미가 되어 올바름이란 것은 모두 앗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논어(論語)>를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않은 이들이 <논어(論語)>를 껍데기만 핥으면서 투덜대는 가장 큰 것들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의 개념어를 도통 와닿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다. 물론 철학적 의미를 규정하는 데 있어 개념어가 등장하지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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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자는 애매모호한 형이상학적인 철학용어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공허한 담론을 내뱉던 수준 낮은 이들과는 판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대단한 거대담론을 펑펑 터트리며 떠들어댔기 때문이 아니다. 누차 강조했던 바와 같이 그가 일생의 삶을 통해 자신의 배움과 가르침을 실천으로 몸소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인들은 고사하고 배웠다고 하는 이들은 더더욱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공자는 성현(聖賢)이라 칭송받게 된 것이다.


‘계씨(季氏) 편’을 관통하는 가르침은, 중세봉건제에서 이미 정해진 신분제를 감히 넘보지 말라는 어설픈 정치논리였던 조선시대 성리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회가 올바른 형태로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유지라는 것이 예(禮)이고 그것은 결코 신분에 의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에서부터 남편과 아내 간에 그리고 친구 간에 나아가 임금과 신하 간의 것으로 그 어느 하나 분리됨이 없음으로 인해 확대되어 우리가 이루는 사회를 의미하게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논리나 삼강오륜이 정치적 의도로 중세 봉건제를 유지하려는 위정자의 논리로 악용되거나 조선시대 정치적 논리로 썩은 성리학으로 변질되기 전 본래의 의미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이 단순한 사전적 정의만으로 된 ‘계씨(季氏) 편’의 마지막 장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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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어퍼컷을 들어 올리며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 검사에 대해 그가 외교 무대에서 보이는 연이은 헛발짓에 해당하는 ‘실수’가 내내 인구(人口)에 회자되면서 그가 과연 이 나라의 가장 윗자리에 서서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자질론이 계속해서 국민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는 이미 모든 국민들의 토종 한국인인가 아닌가 하는 듣기 평가로도 유명해졌지만, 미국의 국가가 제창되는 상황에서 그 나라의 국민들만 보이는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모습도 도대체 왜 그런 실수(?)가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자아냈다.


문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면서 늘 사태를 크게 키워나갔다. 연일 언론보다 더 많은 의견을 내놓는 대통령실이라는 곳에서 ‘우리 대통령이 상대국인 미국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배려된 행동’이라는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는 허접한 변명이 또 튀어나온 것이다. 듣기 거북한 강한 표현으로 그들의 논평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원수와 함께하는 외교 무대에서는 다시 그 지적 이후 상대 국가의 국가가 흘러나올 때 슬그머니 가슴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는 데 있다. 앞의 변명 같지 않은 그 헛소리가 앞뒤 논리가 맞으려면 당당히(?) 상대국의 국가가 울려 퍼질 때마다 가슴에 손을 올렸어야 하는데 미국 이외의 국가는 존중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의도를 표하기 위함인지 그의 손이 가슴에서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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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으로 수장이랍시고 그를 옹호하는 빨간당의 의원들이나 그 무리들이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그리 트집(?)을 잡냐고 구시렁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부인과 그 부인이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 이 장의 가르침에서 보자면, 그 작은 일들만으로도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지 못하고 대통령에서부터 그를 보좌하며 간언 해야 할 이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공자가 위정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를 하기 위한 정답이자 정도(正道)로 일관되게 가르침을 전달했던 것은 단 하나, 솔선수범(率先垂範)이었다. 백성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들 것이며,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힘으로 누를 것을 생각하기 전에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고자 하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치라고 늘 강조에 마지않았다.


자신의 입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백이라고 여기는 직업병 탓인지 검사출신의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실수였다고, 잘못했다고, 처음 이런 자리에 올라서 경험도 없고 부족한 게 많아 벌어진 일인데 앞으로 더 배워나가면서 고쳐가겠다고 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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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온 가족이 아들의 온라인 시험에 집단지성(?)을 이용하여 높은 학점을 받게 해 줬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과락을 면치 못할 수준의 딸아이에게 격려차원으로 수백만 원의 장학금을 주었다는 해괴한 논리가 횡횡하고 아내와 그 자신이 재판부의 꾸지람을 듣고 유죄를 받아도 그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나 반성의 말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봐도 애매모호한 사과인지 유감인지 모를 정치적인 워딩 말고는 제대로 된 사과를 들은 기억이 없다.


강남 명문학교에서 교사라는 이의 잘못을 지적하며 제대로 된 잘못의 인정과 사태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히 생각해 보고 사과하라 기회를 줬더니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버티다가 기어코 교육청에 끌려들어 오고 나서야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기가 막힌 워딩을 내뱉는 것을 들으며 그녀에게 과연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한심스러운 탄식이 절로 나왔더랬다.


범행을 저지르고 현행범으로 잡힌 자마저 억울하다고 하는 것이 구치소이고 감옥이다. 그런데 그들은 검찰에서 검사의 앞에서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하지 않고, 법원에서 판사에게 자신이 억울하다고 ‘감히’ 항변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과 눈높이가 같은 범죄자들을 수용한 그 안에서만 자신은 그렇게 감옥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털어놓는다.


정말로 죄가 없는 사람들이 죄지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할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버리는 일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경찰이나 그것을 마땅히 제대로 살피고 기소했어야 할 검찰과 그나마 최후의 보루라며 억울함이 없는지 살펴봐야 할 법원이 모두 제 몫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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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버스 요금 800원을 개인적으로 챙겼다고 버스 기사직을 해고당한 것에 대해 범죄행위라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결 내린 법원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50억을 챙겨 먹은 이에게 대가성이 없다는 둥 헛소리를 하며 판결을 내린다면 정말로 잘못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왜 나만 이런 처벌을 받아야 하냐며 꽥꽥거릴 것이 자명하다.


자신의 죄에 대해 내 주위의 교수나 국회의원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야만 하냐고 당당히 말하는 후안무치도 어이가 없지만, 결국 죄를 지었음에도 억울하다고 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낸 것은 결국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자기 무리에게 면죄부를 주는 법비들이었다. 호칭 하나가 뭐 대수냐고? 당신의 코앞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 말이다.




이 장을 끝으로 ‘계씨(季氏) 편’까지 공부가 끝이 났습니다.

이제 <논어(論語)> 총 20편 중에서 4편만이 남았습니다.

2021년 어느 봄날,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된 연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식 틀을 갖추기 시작하여 매일같이 A4 4장을 써내려 온 작업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꽉 찬 300페이지 단행본이 한 달에 한 권씩 나오는 분량인 것을 감안하면, 이미 써내려 온 분량만도 스무 권이 넘었으니 <논어(論語)>해설서 중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의 책이 될 듯합니다.

늘 그렇듯 아침공부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합니다.

약속했던 대로 <논어(論語)>를 끝마치기까지는 브런치의 연재를 계속해나갈 생각입니다.

내일아침 ‘양화(陽貨) 편’의 첫 장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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