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적인 것이 현실에서 늘 틀리는 이유?
子曰: “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자주색이 朱色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鄭나라 音樂이 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 잘하는 입〔利口〕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이 장의 직전 장은 ‘巧言令色(교언영색)’이 언급된 그 유명한 내용이 편집상 실수로 중복되어 실려 나온 내용으로 앞서 공부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 이 장에서는 이번 ‘양화(陽貨) 편’을 가로지르는 사이비(似而非)에 대한 엄중한 경계와 신랄한 비판이 정점으로 올라왔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가짜가 진짜를 공격하고, 사이비(似而非)와 부정부패(不正腐敗)가 眞實과 正道를 압도해 버리는 당대의 현실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원문을 보면 사실 그런 신랄한 비판을 담은 복잡한 의미가 선뜻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공자식 은미한 비유로 한 꺼풀 덮여있기 때문이다. 이번 비유는 세 가지가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는 간색(間色)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鄭나라 音樂’이라고 하는 ‘정성(鄭聲)’이며, 마지막으로는, 내가 말만 잘하는 입이라고 번역한 다소 생소한 표현인 ‘利口(이구)’이다.
주자는 이 세 가지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朱色(주색)’은 正色(정색)이고, ‘자주색’은 間色(간색)이다. ‘雅(아)’는 바름이다. ‘利口(이구)’는 말을 민첩하게 잘하는 것이다. ‘覆(복)’은 기울고 망하게 하는 것이다.
주석으로 간색(間色)과 정색(正色)이라는 설명을 언급하기는 하였는데, 당대의 공부하는 자들이라면 몰라도, 아무래도 현대인들이 이 주석을 통해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조금 한계가 있을 듯싶어 약간의 부연설명을 더하면 다음과 같다.
간색(間色)이란, 빨강, 노랑, 파랑, 흰색, 검정 가운데 둘 이상의 색을 섞어서 만들어낸 색을 말하는데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하게 설명하자면 중간색(中間色)이라고 부르는 게 더 명확하다. 정색(正色)이란, 간색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앞에 언급한 다섯 가지 순정(純正) 색을 의미한다.
원문에서 언급한 자주색은 대표적인 간색으로 청색과 빨간색을 섞어서 만든 색이다. 실제로 대중들의 심리상으로도 그렇고 농염(濃艶)함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당대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했기 때문에 붉은색보다 더 선호되었다고 전한다.
‘鄭나라 音樂’인 ‘정성(鄭聲)’은 그 특성이 음란하면서도 애절함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가 있어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정통 예법에서 쓰이는 아악(雅樂)보다 사람들에게는 더 선호되었다고 한다. 앞서 ‘위령공(衛靈公) 편’의 10장에서 공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음란한 정나라의 음악을 멀리하라는 경고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익숙하지 않은 ‘利口’라는 표현은 공자가 그렇게 경계하고 비난에 마지않았던 ‘말재간만 빼어난 자’를 말하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앞에 사용한 두 가지 비유를 적용시키는 종합적인 설명과도 같은 내용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말재주만이 뛰어난 자는 진짜와 가짜를 교묘하게 섞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며, 올곧음과 사악함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말 그대로 사이비(似而非)의 교묘한 전략을 구사하는 말하기를 이용하여, 마치 紫色이 朱色을 빼앗고 鄭聲이 雅樂을 혼란시키듯이 나라를 전복시키고 말 것이라는 경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공자의 은미한 의도를 파악한 조선의 학자, 이익(李瀷)은 <거자방정(去紫放鄭)>이라는 글에서 이 장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禮服(예복)에 紫色을 쓰고 樂律(악률)에 鄭聲을 쓰게 된 것은 시속(時俗)이 함부로 先王의 예악을 고쳐 아무 기탄이 없게 된 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공자께서 자색(紫色)을 물리치고 정성(鄭聲)을 내쫓으라 일러주신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似而非와 不正이 횡행(橫行)하는 당대의 현실을 우려했던 바는 유학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諸子百家(제자백가)라 하는 이들도 역시 이와 같은 가짜 전성시대가 진실을 가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본성을 타락시키고 사회가 더 올곧은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한 장애가 된다는 우려는 똑같았다.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저서,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고 보옥과 막돌이 뒤섞이므로 이 점을 슬퍼한다(眞僞顚倒, 玉石混淆, 故是以悲)’라는 구체적인 경계의 가르침이 언급된다. 또 <장자(莊子)>의 ‘외물(外物) 편’에는 타락한 유학자를 등장시켜, 그가 <시경(詩經)>의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린 옥구슬을 훔치는 이야기를 그려내며 사이비(似而非)가 사회를 어떻게 타락시켜 가는지에 대해 풍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공자가 이 장을 통해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범 씨(范祖禹(범조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천하의 理(이)가 올바르면서 이기는 경우는 항상 적고 올바르지 않으면서 이기는 경우는 항상 많으니, 성인께서 이 때문에 미워하신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훌륭한 사람을 불초하다 하고 불초한 사람을 훌륭하다 하니, 인군이 만일 그를 좋아하고 믿는다면 국가가 전복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논어(論語)>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아주 가끔씩 어떤 장은 정말로 울컥하는 감정이 와닿아 가슴을 울릴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장은 내가 공부하고 수양하고 살아가는 세월이 거듭되면 될수록 내 가슴의 한구석에 있는 그 무언가가 묘하게 늘 울컥하고 올라오게 만드는 정도가 강해짐을 느끼곤 한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공자가 느낀 그 답답함이 수천 년을 지난 대한민국의 발검무적에게도 아무런 변함이 없이 오히려 더 갑갑하게 수천수만 개의 고구마를 사이다는 고사하고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계속해서 욱여넣는 부정함과 사특함이 승리하는 현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에게 올바름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세상의 어느 사특한 부모도 자식에게 적당히 살라고 가르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밀쳐도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바쁠 때는 그냥 무단횡단하고 과속감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그냥 막 밟아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설마 그들 모두가 성인군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선량한 ‘중산층’ 국민이기 때문이라고 애매모호한 구차한 자기변명이라도 하고 싶은가?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선량하고 착실하게 도덕적인 상식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소시민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뉴스를 통해 검찰의 포토라인까지 서는 부모일지라도 그들은 일단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친다. 거의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자신의 양심이 차마 자신의 자식 앞에서 사회적인 상식을 깨뜨리고 무조건 사리사욕을 챙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라고 할 정도로 소멸되거나 완전히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옳지 않은 것을 행하라고 자기 자식에게 가르치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그 부모의 말로 인해 교육을 받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 부모가 평상시에 하는 언행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정신에 배우고 익혀 아로새긴다. 그러한 과정을 ‘아로새긴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부장검사에서 검사장급으로 중앙지검에서 직업을 권력으로 부린 아버지를 둔 자식은, 친구들에게 그 권세를 자랑하며 ‘아빠는 아는 사람(여기서 아는 사람은 아마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을 통칭하는 말일 것이라 유추해 본다)이 많다.’라던가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입학한 아이가 법조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버지의 발화를 통해서 얻은 정도가 전부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 고위직 검사직에 있던 아버지가 그 아이의 앞에서 혹은 자기 자식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 굳이 거슬러 검증해보지 않더라도 그 상황은 너무도 명확하다. 학교에서 담당교사를 비롯해서 교사들이 아이를 설득하고 현실에 대해서 명확하게 직시하고 학생이 저지른 잘못을 인지하게 하여 어떻게 해서든 진정한 사과까지 도출하려고 했음에도 아이가 반성문을 쓰고 잘못을 인정한다고 다 말했다가도 서울의 집에만 다녀오고 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다고 허탈하고 좌절감을 느꼈다고 기록에 남겼다.
자기 아이가 잘못한 일을 했을 때,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른 집에서는 우리 집 아이만큼이나 귀한 다른 집 자식에게 그런 일을 벌였을 때, 부모가 해야 할 올바른 행동이 어떤 것인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그 어려운 사법고시까지 패스하고 중앙지검에서 피의자의 인권까지 보호하겠다는 직책을 맡은 고위 검사가 결코 몰랐을 리가 없다.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며 이례적으로 법무부장관직에까지 오른 역시 인물의 딸과 그의 조카가 대학입시 그것도 미국대학에 보내겠다고 온갖 부정을 저질렀을 때 그는 자신은 딸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는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서 잘 모른다는 어이없는 변명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부정이 있을 수는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법적으로 그것을 입시에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궤변을 내세웠다.(그의 조카는 실제로 그것을 입시에 써서 아이비리그 대학의 치대에 진학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미국의 교육열에 불타는 아줌마들의 연이은 투서로 아직도 곤욕을 치르고 결과를 내지 못한 상태이다.)
그의 아내를 포함하여 처가 쪽 집안에도 법조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게 배치되어 있다는 점만 감안하더라도, 아니, 최소한 그가 이전 법무부장관직을 맡아 검찰개혁에 메스를 대려고 하다가 자녀들에 대한 부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멸문지화(滅門之禍)라는 표현으로 셀프디스를 한 이를 비판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내 어리숙한 머리로는 앞뒤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사람들을 주님의 곁으로 인도하겠다며 강남 한복판에 어마거대한 교단본부를 가지고 있는 그 대단한 교파에서, 단지 지방노회에 돈을 내기만 하면 회원으로 받아준다는 세 키우기를 이용하여 그 권세(그 허접한 목적을 이런 대단한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으나)를 호가호위(狐假虎威)하겠다는 이단자들을 받아들이고는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겨우 관리책임은 내던져두고 회원에서 제명시키는 짓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을 하며 성스러운 주님을 입에 담는 것이 가당키냐 한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자신의 부정함이 폭로되어 이성을 잃고 일반인에게 저주의 기도를 내뱉고 그분을 삭이지 못해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두 살 난 간난 여자아이를 들고 나와 던지려는 현역 목사라는 자의 행동을 현장에서 보고 들은 성인 증인들만 무려 8명이었다. 현장에서 112에 신고를 하고 훌륭한 대한민국 파출소 경찰이 30여분이나 있다가 출동했지만, 아무런 일도 아니라 둘러대는 생쇼를 듣고는 순순히(?) 물러났다.
https://brunch.co.kr/magazine/badcopstory
그리고 그가 진짜 목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버젓이 나온 강남 한복판의 본부가 있는 대형 교단에 연락을 했더니 절대 그런 사이비 목사가 자기네 교단일 리가 없다고 하다가 지역 노회 목사회원 명단이 버젓이 인터넷에 검색되어 나온다고 했더니 나 몰라라 외면했다. 피해자가 지역 노회의 목사들에게 연락해서 사실을 밝혀 명예훼손을 했다며 고소를 진행하자, 노회의 목사들은 피해자를 피의자로 만들겠다는 그 목사의 편을 들어 형사 재판의 증인으로까지 법정에 서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재판이 무죄의 해프닝으로 결말을 맞이하고 나서야 그 노회에서는 그 목사를 제명하며 손절했다.
두 살짜리 갓난아기를 물건처럼 던지려고 했던 명백한 아동학대에 대해 처음부터 대놓고 무시했던 경찰의 행위를 서울경찰청 감사과에 2번, 서울경찰청 본청 감사과에 2번이나 항의했지만 여자 경찰은, 버젓이 ‘피해자가 협박죄와 모욕죄로 고소했기 때문에 아동학대에 대해서는 도저히 인지할 수가 없었다.’라며 당당히 사건을 뭉갰고, 다른 감찰과의 경찰들은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면 시민심의위원회에까지 자신들의 사건처리를 심의회부하였으나 만장일치로 자신들의 수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심지어 정인이가 죽고 나서 신설된 서울경찰청의 아동학대 특별수사팀에서는 사건을 1년 넘게 끌다가 검찰에 직접 이 사건을 다시 살필 필요가 없다고 문서를 꾸며 올렸다.
불의가 정의를 이기지 못하는 당연한 진리가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 되어버린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한두 사람의 미꾸라지에 의해 진흙탕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당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우기고 싶은가?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진다고 믿나,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