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마칠 즈음까지도 욕심을 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하노라.” 子貢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만일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무엇을 전술하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런데도〉 四時가 運行되고 온갖 물건이 生長하나니,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이 장은 공자의 말년, 어찌 보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가장 말년의 대화를 기록한 가르침이 아닌가 후대 학자들이 추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굳이 ‘유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유언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에 가깝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세속적인 표현으로 가리기에는 이 장의 가르침 역시 다른 <논어(論語)>에 기록된 가르침과 같이 평생에 걸친 일관된 공자의 올곧음이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친아들 리(鯉)도 죽고, 그토록 아끼던 제자 안회(顏回)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던 가장 나이가 많았던 다혈질의 자로(子路)마저 덧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난 상황에 이제 자신의 끝을 예감하고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던 공자는 혼자서 읊조리듯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물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마치 이 상황과 공자의 워딩만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공자가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공자가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이들을 위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의도를 유추하여 해설한다.
배우는 자들이 대부분 언어로써 성인을 관찰하고,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실제는 말씀을 기다리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을 살피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한갓 그 말씀만을 알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夫子(부자)께서 이것을 말씀하여 깨우쳐 주신 것이다.
주자의 이 주석은 그가, 공자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 아닌 다음에야 공자의 본래 의도가 그것이라고 100% 장담할 것은 아니지만, 공자의 말씀을 충실히 새기고 연구하고 공부해 온 주자의 심오한 의문이 오롯이 담겨 있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주자의 주석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적는 방식이 아닌 역대 공부한 학자들의 의견을 모두 열람하고 연구한 후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 분석한 결과물이기에 그 의미는 더더욱 크다 할 것이다.
요컨대, 말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 전부라고 여겨 성인의 말씀만을 통해 뭔가 얻어가려고 하는 자들의 얕은 태도에 대해서 일침을 가함과 동시에 그 가르침의 문구만에 집착하여 그것만을 이해하는 것에도 허덕이는 자들에게 도대체 왜 그 말을 했는지에 대한 행간의 의미를 길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안일함에 호된 회초리를 들고 있는 것이 공자가 아예 말을 더 이상 내지 않겠다는 선언의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그러자, 공자의 그간의 시간을 동행하며 가장 측근에서 공자를 보좌하고 결국 임종까지 곁에서 따르며 지켰던 자공(子貢)이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 그러는 것인지 묻는다. 그 의도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자공이 바로 언어로써 성인을 관찰한 자이다. 그러므로 의심하여 물은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왜 자신이 그런 말을 꺼냈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구체적이고 명확하다고 말한 이유는, 공자는 늘 그런 의도로 가르침을 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듣고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이해하며 행동의 변화로 이어나간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답답함에 대해 공자는 하늘이 아무런 말이 없지만 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가르침을 주고 있음을 대비시켜 하늘도 아무런 말씀이 없지만 저리 큰 가르침을 주시는데 내내 말하고 가르치고 일갈을 외쳤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익히고 배워 실천하는 자들이 없음에 대해 한탄하고 탄식한다.
주자는 공자가 평생에 걸친 이러한 답답함을 토로한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四時(사시)가 운행되고 온갖 물건이 생장함은 天理(천리)가 發現(발현)하여 유행하는 실제 아님이 없으니,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볼 수 있다. 성인의 一動一靜(일동일정)은 오묘한 도와 정밀한 의리의 발현 아님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늘〔天(천)〕일뿐이다. 어찌 말씀을 기다려 드러나겠는가. 이 또한 자공에게 열어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하신 것인데, 자공이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위 주석의 설명에 의하면, 공자의 본래 의도도 그러했지만,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대한 자공(子貢)의 반응에 대한 공자의 아쉬움이 한층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제자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고 자신의 최측근이라고 하는 자공(子貢)마저도 스승께서 말씀을 가르침으로 남겨주지 않으신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배우고 익혀 진정한 도를 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니 더욱 답답했던 것이다.
궁극적인 가르침인 도(道)란, 굳이 말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말을 해주었음에도 그 말 이상의 것을 행간에서 길어 올려야 함이 진정한 공부이고 배움이거늘, 그렇게 하지 못하며 그저 스승의 입만 바라보며 가르침을 기다리는 현실에 답답함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음이 더 안타까웠던 것이다.
이것은 처음 공자가 했던 말이 그저 ‘나는 이제 말을 하지 않으련다’가 아니라 반어적으로 ‘나는 하늘과 같이 말로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하늘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겠다’라고도 해석할 중의적 여지가 생긴다. 다시 말해, 내가 이제 하늘의 부름을 앞둔 시기가 되니 하늘이 하는 것과 같은 궁극의 가르침을 방법으로 삼겠다고 천명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공자가 사용한 ‘述’이라는 용어에 있다. 이미 앞서 ‘술이(述而) 편’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述’이라는 용어는 가르침을 부연(敷衍) 해 나가는 조술(祖述)을 의미한다. ‘술이(述而) 편’의 1장에서는 ‘술작(述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술(述)’을 ‘전인(前人)의 설(說)을 논술하는 일’이고, ‘작(作)’은 새로운 설을 창작하는 일로 구분하여 설명한 바 있다. 즉, ‘작(作)’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성현(聖賢)이어서 그것이 될 수준이었으나 그러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럴 수준도 안 되는 자들은 성현(聖賢)의 말씀을 가르쳐준다는 빌미(?)로 방자하게 그 입을 가벼이 놀려댔다.
공자가 자기 운명이 다해감을 알 그즈음, 모든 제자들에게 직강(?)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공자의 말씀은 수제자급으로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그 교육은 다시 어린 제자들에게 재생산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원문에서 자공(子貢)이 스승에게 ‘스승께서 아무런 말씀을 해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도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걱정은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아주 직설적인, 중간의 제자들이 교과서를 잃어버리고 마는 꼴임을 자인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공자가 아무런 말씀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그 말을 듣고 받아 적어 겨우 아래 어린 제자들에게 강설하던 중간 제자들은 더 이상 가르쳐 전달할 것이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공자의 마지막 답변이자 궁극의 가르침이 가리키는 바는 변함이 없다. 결국 아무리 대단한 성현의 글을 읽고 성현의 말씀을 받아쓰기하고 형광펜에 빨간색으로 밑줄을 그어도 그것이 온전히 자신이 것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말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편에서 꾸준히 강조해 왔던 자기의 것을 만드는 공부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걷고 어떻게 뛰는지를 하나하나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치지 않아도 어느 사이엔가 말도 못 하는 아기들이 그것을 해내고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들이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시행착오와 생각을 거듭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익혀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며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다.
몇 마디 말로 가르쳐서 될 것이라면 말 못 하는 나무나 꽃이나 대자연들은 그 웅장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생할 수 없었을 것임을 공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지극히 단순한 가르침마저도 스스로 자신이 막혀서 자신의 생각을 통해 깨닫지 못한다면 어렵지 그지없는 것이다. 매일같이 똑같은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학 일타강사가 술술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눈으로만 따라가자면 막힐 것이 어느 하나 없어 보이지만, 정작 시험장에 들어가 자신이 그 문제를 풀려고 할 때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풀어보지 않아 어떻게 풀지도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난주 출판지원사업에 지원하고 싶다며 한 출판사 사장이 원고를 좀 출판할 수 없겠느냐며 물어왔다. 그래서 바로 이 <논어(論語) 읽기> 시리즈를 가져가보면 어떻겠느냐고 되물었다. 당장 해당 사업에 통과될 흥미로운 단행본 원고를 원하는 그의 생각이 빤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얄팍한 생각이 빤히 보였길래 나는 부러 그리 물었다.
하루에 한 장씩 2년 가까이에 걸쳐 한 장의 분량이 A4 4장이니, 삽화를 집어넣지 않더라도 한 달에 한 권 분량이 나오니 정식 출판을 한다면 단행본 논어 해설서로는 20여 권이 넘는 두꺼운 책이 되는 것을 선뜻 출판하겠다고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완곡히 내 제안을 피해 가듯 이렇게 말했다.
“<논어(論語)>는 대형 서점에 가면 한 서고를 꽉 채울 정도로 책들이 워낙 많이 나와 있어서요. 출간을 해도 영 티도 안 날 것 같고....”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의 말처럼 대형 서점의 한 서고를 꽉 채울 정도로 <논어(論語)>와 관련해서는 책을 낸 사람들이 한 수레도 넘을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인문학에 관심이 좀 있다는 중년의 남자 독자층에서부터 동양학 전공자들에까지 <논어(論語)>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들 말한다.
그런데 나는 제대로 <논어(論語)>를 일독(一讀)한 자조차 만나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물론 옛날 학자들의 기준처럼 <논어(論語)>를 읽고 암송할 정도가 되어야 겨우 내가 ‘읽었다’라고 표현한 것을 비유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 자칭 <논어(論語)>를 읽었다고 하는 자들은 수학 일타강사의 술술 넘어가는 문제풀이를 눈으로 풀고 자신이 그 문제를 풀 줄 안다고 착각하는 둔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수학처럼 시험장에 들어가 자신이 눈으로 모두 풀었다며 자신이 풀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결과를 호되게 확인할 계기가 없어서 그랬을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결코 <논어(論語)>를 읽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깨달을 수준이 되지 못하는 이들뿐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90%는 <논어(論語)>를 원문도 아닌 해설서나 축약본으로 읽은 것이 대다수이고, 나머지 10%조차 직역본이나 번역본을 통해 겨우 대조하는 방식으로 원전을 만져만 본 수준이었다.
전공자도 아니고 한글도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한문고문을 술술 해독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항변하고 싶은가? 굳이 그럴 필요가 그렇게까지 있겠느냐고 묻고 싶은가? 내가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 이 장에서 공자가 직접 회초리를 들어 외치지 않는가? 그걸 말을 해줘야 알겠느냐고. 절반이상이 저자라는 자조차도 제대로 씹어 소화시키지 못한 오독(誤讀)한 내용으로 인쇄된 책을 읽고서 공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본래 공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그 행간의 의미까지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정자(明道(명도))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공자의 도는 비유하면 日星(일성, 태양과 별)처럼 밝은데도 오히려 문인들이 다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안자라면 묵묵히 알았을 것이요,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의문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자공이〉 ‘저희들이 어떻게 도를 전술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는데, 공자께서 또 ‘하늘 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런데도〉 四時(사시)가 운행되고 온갖 물건이 생장한다.’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지극히 명백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에 마지막으로 주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부가설명으로 마무리하였으니 그 뜻을 곰곰이 잘 새겨보길 바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전편의 ‘숨김이 없다〔無隱(무은)〕’는 뜻과 서로 발명되니, 배우는 자들은 자세히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