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은인을 총으로 쏴 죽이며 권무십일홍을 말하면 뭐 하겠나?
逸民: 伯夷·叔齊·虞仲·夷逸·朱張·柳下惠·少連. 子曰: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齊與! 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 言中倫, 行中慮, 其斯而已矣; 謂虞仲·夷逸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逸民은 伯夷와 叔齊와 虞仲과 夷逸과 朱張과 柳下惠와 少連이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분은 伯夷와 叔齊일 것이다.” 柳下惠와 少連을 평하시기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의리(조리)에 맞으며 행실이 〈올바른〉 思慮에 맞았으니, 이뿐이다.” 하셨다. 虞仲과 夷逸을 평하시기를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폐함(벼슬하지 않음)은 權道에 맞았다. 나는 이와 달라서 可함도 없고 不可함도 없다.”
이 장에서는 전통적인 은거론의 근거가 되는 계보를 伯夷와 叔齊를 포함하여 총 일곱 은자(隱者)의 사례를 들어 공자가 일일이 평가하고 나서 마지막에 자신이 그들과 무엇이 달랐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전통적인 은거론과 자신의 처세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비교와 대조의 기법을 사용하되, 결론적으로 그것이 서로 배치되는 논리이거나 모순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 있는 ‘일민(逸民)’이란, 학문과 덕행이 높지만 벼슬자리에 나서지 않고서 속세를 떠나 세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자는 간략하게나마 이 장에서 언급된 7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逸(일)’은 遺逸(유일, 벼슬길에서 빠져 있음)이요, ‘民(민)’은 지위가 없는 이의 칭호이다. 虞仲(우중)은 바로 仲雍(중옹)이니, 태백과 함께 荊蠻(형만)으로 도망한 자이다. 夷逸(이일)과 朱張(주장)은 경전에 보이지 않는다. 소련은 東夷(동이) 사람이다.
공자는, 도의 적통(嫡統)이라고 볼 수 있는 가장 꼭짓점에 역시나 伯夷와 叔齊를 근원이라 보는 견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스스로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평가로 그 둘을 높게 평가한다.
사마천(司馬遷) 역시 이와 같은 정통 유학의 맥락에 의거하여, <열전(列傳)>의 가장 첫머리에 ‘伯夷列傳’를 배치하며, ‘온 천하가 혼탁한 뒤에야 청렴한 선비가 더욱 드러난다’고 칭송한 바 있다. 맹자(孟子)도 ‘백이(伯夷)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으며, 治世에는 나아가고 亂世(난세)에는 물러났으니, 백이(伯夷)는 성인 가운데 淸한 분이다’라고 논평했다.
다음으로 공자는 柳下惠와 少連를 두 번째 단계로 평가하되, 그 이유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의리(조리)에 맞으며 행실이 〈올바른〉 思慮에 맞았다’라고 구분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유하혜(柳下惠)의 일은 위에 보인다. ‘倫(윤)’은 의리의 차례이다. ‘慮(여)’는 사려이니, 사려에 맞는다는 것은 意義(의의, 의취와 의리)가 있어 인심에 부합함을 말한다. 소련의 일은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禮記(예기)》〈雜記(잡기)〉에 “그가 居喪(거상)을 잘하여 3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3월을 懈怠(해태) 하지 않으며,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근심했다.” 하였으니, 행실이 사려에 맞았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유하혜(柳下惠)는 노나라 대부 장문중(臧文仲)에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방도를 일러주었고 장문중이 ‘원거(爰居)’라는 바닷새를 제사 지내려 했을 때는 명분이 없다고 말렸다. 또, 하보불기(夏父弗忌)가 희공(僖公) 신위의 반열을 올리려 하자 귀신과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말렸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유하혜가 초년에 벼슬하지 않고 지내되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공자가 그를 일민중 한 사람으로 손꼽은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유하혜가 원거의 제사를 말린 일이나 희공 신위의 반열을 올리지 못하게 한 일이 言中倫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한편, 소련(少連)은 <예기(禮記)>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이름이 나오는 인물로, 상례를 잘 거행했다고 전한다. 東夷(동이)의 사람이라고 하는데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인물로, 虞仲과 夷逸를 들어,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폐함(벼슬하지 않음)은 權道에 맞았다.’고 설명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옹(仲雍)이 吳(오) 지방에 살 때에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고 벌거벗는 것으로 꾸밈을 삼았다. 은거하여 자기 혼자만 선하게 한 것은 도의 깨끗함에 합하였고, 함부로 말하여 스스로 버려진 것은 도의 權道(권도)에 합하였다.
우중과 이일 역시 당대의 대표적인 은자(隱者)들이었다. 앞서 인물들과 차이가 있다면 원문의 설명과 같이 숨어 살긴 하였으나, ‘放言을 했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放言’이란,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높게 평가받은 이유는 그들이 身中淸과 廢中權의 덕목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위 주석에서와 같이 주자는 虞仲을 仲雍으로 보았다. 중옹은 주나라 조상인 古公의 둘째 아들이다. 큰형 太伯이 아우 季歷(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남방으로 피해 吳(오) 나라 太伯이 된 후 중옹을 후계로 삼았다. 하지만 고염무(顧炎武)는 虞仲를 仲雍의 증손인 吳仲이라고 고증하였고, 이후 다산(茶山)도 그의 학설을 따랐다. 夷逸에 대해서는 따로 특별한 기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기서 한 가지, 일곱 명에 대한 평가를 마치면서 마지막 덕목으로 권도(權道)를 녹여 넣은 것에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의 행동이 앞선 일곱 명의 은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피력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권(權)이란, 때와 장소에 맞춰 적절하게 변화하는 ‘權道’를 의미하는 말로,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느끼는가에 따라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규정짓는 것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공자는 열어둔 것이다.
이 장의 핵심은 앞서 일곱 명의 은자에 대해 공자의 평가가 아니다. 기존의 정통 유학에서 바라보는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에 이어 마지막에 자신을 자평(自評)하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세상에서 벗어나 은거하지 아니하고 직접 쓰임을 구하는지에 대한 변호의 방점을 찍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可함도 없고 不可함도 없다.’는 설명에 대해 주자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그 행간의 의미를 풀이한다.
맹자가 말씀하기를 “공자는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시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시고 오래 머물 만하면 오래 머무시고 속히 떠날 만하면 속히 떠나셨다.” 하였으니, 이른바 ‘可(가)함도 없고 不可(불가)함도 없다.’는 것이다.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고 한 말은 공자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되, ‘나는 지극히 평범해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고 겸손하게 말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대개는 위의 주자가 한 해석과 같이, ‘저 일민들의 立心이나 造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각기 한 가지 국면을 고집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구도행위가 단순한 은거만으로 도드라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선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앞서 공부했던 ‘이인(里仁) 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꼭 해야 한다고 고집하거나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지 않고 오직 大義에 입각해서 행동한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고 했다. ‘無適無莫’이라 하면 可와 不可를 미리 정하지 않고 오직 義를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공자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도저히 세상에 투신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그 맥락의 핵심에는 진정으로 私心을 버리고 大義를 따르겠다고 결의가 필수전제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공자의 의도를 파악한 사씨(謝良佐(사양좌))는 정통 유학에서 우러러보는 일곱 명의 은자(隱者)를 왜 공자가 대명사 ‘시(是)’를 사용하여 일민(逸民)이라 통칭했는지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이 장의 핵심을 정리한다.
“일곱 사람이 은둔하여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은 똑같으나 그들의 입심과 造行(조행, 나아간 행실)은 달랐다. 백이와 숙제는 천자가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가 벗으로 삼지 못했으니, 이미 세상에 은둔하여 무리를 떠난 것이다. 성인(공자)에서 한 등급 내려오면 이들이 가장 높을 것이다. 유하혜와 소련은 비록 뜻을 굽혔으나 몸을 굽히지 않았고, 비록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세상에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에 〈불결한 것을〉 좋게 여기지 않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말이 조리에 맞고 행동이 사려에 맞은 것이다. 우중과 이 일은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니, 말이 선왕의 법에 합하지 않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깨끗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저울질〔權道(권도)〕하여 의에 맞게 하였으니, 方外(방외)의 선비가 의를 해치고 가르침을 손상시켜 큰 인륜을 어지럽힌 것과는 科(과, 등급)가 다르다. 이 때문에 똑같이 逸民(일민)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자가 자신의 입지를 설명한 문장의 의미에 대해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일곱 사람은 각각 한 가지 일을 지켰고, 공자는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으셨으니, 이 때문에 항상 가함에 적당하여 일민의 무리와 달랐던 것이다. 揚雄(양웅)이 말하기를 ‘성인을 관찰하면 현인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 때문에 맹자께서 백이와 유하혜를 말씀할 적에 반드시 공자로써 단정하신 것이다.”
참고로, 이 장의 내용을 감안해 보건대, 앞서 공부했던 ‘전문(憲問) 편’의 39장의 마지막 구절의 ‘子曰 作者 七人矣.’이라는 글이 이 장의 맨 앞에 붙으면 구조적으로나 문맥상으로 훨씬 자연스럽고 매끄러울 것이라는 후대 학자들의 학설이 제기된 것이기도 하다.
공자가 굳이 정통 유학에서 말하는 여러 은자(隱者)들에 대한 평가를 직접 정리하고 등급까지 매겨가며 평가한 방식이나 맨 마지막에 그들의 다양한 방식을 단편적인 편린으로 구별하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궁극적인 공자의 행위임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공자의 은미한 고도의 수사가 아니고서는 완성시키기 어려운 것임을 새삼 깨닫고 탄성이 나오게 만든다.
공자가 만약 평생에 걸친 자신의 삶을 통해 그의 가르침을 증명하지 못하였다면 지금 나를 비롯해 수많은 공부하는 이들은 공자를 성현이라 존숭 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가르침이 담긴 <논어(論語)>를 진정한 동양고전의 대표라고 인정하며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한 수사와 논리로 아로새겨져 있다한들 공자의 70이 넘는 온 평생을 통해 그 가르침을 실천으로 검증하지 못했다면 이 장의 가르침은 물론 <논어(論語)>의 모든 글들은 그저 오래된 퀴퀴한 냄새만 나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장의 마지막에 꾹꾹 눌려 담겨 있는, 공자의 세상에 대한 선언과도 같은 명제는 공자가 그 행위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대의에 두었음을 그가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판에 발을 담갔던 수많았던 이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입으로는 백성을 위합네라고 떠들어대면서 뒤로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결코 해서는 안될 일까지 서슴지 않고 파국을 맞이할 때까지 그 허망한 욕망의 끝을 멈추지 못하였다.
남송의 시인인 양만리(楊萬里)가 지은 ‘납전월계(臘前月季)’라는 시에서 유래한 문구라는 점을 아는 자들은 거의 없지만, 최근 드라마 <카지노> 탓인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문구는 주워 들어본 이들이 많은 듯하다. 하긴 알면 뭐 하겠나,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