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함부로 그 말을 입에 담지 마라.
周公謂魯公曰: “君子不施其親; 不使大臣怨乎不以; 故舊無大故, 則不棄也; 無求備於一人.”
周公이 魯公에게 이르셨다. “君子는 그 친척을 버리지 않으며, 大臣으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하며, 故舊(옛 친구나 선임자)가 큰 연고가 없으면 버리지 않으며, 한 사람에게 完備하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 장에서는 이제까지 등장했던 은자(隱者)가 등장하지 않고, 갑자기 공자가 존숭에 마지않는 주공(周公)이 등장한다. 원문에는 주공(周公)이 그대로 서술하는 형식으로 노나라에 분봉(分封)된 아들 백금(伯禽)에게 훈계하는 것처럼 되어 있긴 하지만, <논어(論語)>에 실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그 일화를 공자가 제자에게 설명하며 말한 것을 직접 인용의 방식으로 기록한 듯하다.
원문에는 노공(魯公)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했는지에 대해 주자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노공은 주공의 아들 伯禽(백금)이다. ‘弛(이)’는 버림이요 ‘以(이)’는 씀이다. 대신(大臣)은 그 사람(적임자)이 아니면 버려야 할 것이요, 그 자리에 있다면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大故(대고)’는 惡逆(악역, 패륜이나 반역 등의 죄악)을 이른다.
또 원문에서는 ‘버리다’로 해석한 ‘施’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본래 버리다의 의미를 가진 ‘弛’라고 기록된 판본도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施(시)’는 육씨(陸德明(육덕명))의 본에는 弛(이)로 되어 있으니, 福州本(복주본)도 같다.
아버지 주공(周公)이 아들에게 독자적인 통치권을 하사하며, 이제 아랫사람들을 어떻게 거느려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이 내용을 공자는 왜 새삼 다시 정리해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었을까? 그리고 이제 ‘미자 편(微子篇)’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이런 내용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이며 전체 편을 관통하는 의미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을 풀이하기 위해 가장 첫 번째로 풀어야 할 실마리는 바로 원문의 의미를 온전히 해독하는 일이다.
공자가 주공(周公)을 존숭 하는 여러 이유 중에 가장 표면적인 이유를 들라면, 주공(周公)이 노나라를 분봉받은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본래 노나라를 분봉받은 주공(周公)은 정작 중앙정권의 정무로 바빴기 때문에 직접 노나라로 부임해서 다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아들을 대신 노나라 지역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였으니 어찌 보면 이것이 노나라 정치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공자는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먼저 첫 번째 주의사항으로 지목된 ‘君子는 그 친척을 버리지 않는다.’의 내용을 살펴본다. 현대어로 친척이라 번역하기는 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고문에서의 친(親)이란 부계 친족만을 의미하는 용어로, 모계 즉, 아내를 포함한 처가 식구들은 포함하지 않는 용어이다. <논어(論語)> 가장 첫 번째 편에 해당하는 ‘학이(學而) 편’의 13장에 나온 ‘不失其親’ 역시 이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술 하겠지만 이것이 자기 혈연을 칼같이(?) 챙기라는 의미가 아님은 네 가지 주의사항을 모두 살펴보고 나면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두 번째 주의사항인 ‘大臣으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하라’는 의미 역시 대신(大臣)을 무조건 등용해서 원망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적임자가 아니면 아예 쓰지를 말 것이고, 적임자라면 그 자리에 써서 파면(罷免)이든 등용(登用)이든 지극히 도리에 합당(合當)해서 그 어느 누구도 원망함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 주의사항인, ‘故舊(옛 친구나 선임자)가 큰 연고가 없으면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자칫 지연, 학연으로 점철하여 측근을 강화하라는 말도 안 되는 의미로 오독할 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굳이 괄호 안에 ‘선임자’라는 용어를 넣은 이유는, 선왕(先王)이 이미 임명하여 그 자리에 있는 이를 의미한다는 속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앞서 공부했던 ‘태백(泰伯) 편’의 2장에 유사한 가르침이 있어 함께 살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마지막 주의사항인, ‘한 사람에게 完備하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은 앞서 공부했던 ‘자로(子路) 편’의 25장에서 살펴보았던 소인의 행태를 빌어 권계 했던 내용과 맥락이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경(書經)>의 ‘周書’ 가운데 ‘군진(君陳)’편에 보면, ‘無求備于一夫’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 의미인즉,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남에게 完備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단순히 완전무결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닌, 군주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기사(器使; 그 사람의 器量을 헤아려 적절한 임무를 내리는 행위)를 강조한 말에 다름 아니다.
이 네 가지 주의사항의 공통점은 주공(周公)이 아들에게 일러준 위정자인 군주로서 어떻게 사람을 부려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인데, <논어(論語)>의 곳곳에 공자가 그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새겨 제자들에게 다시 일러주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의미와 연관성을 모두 파악한 이 씨(李郁(이욱))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간명하게 정리한다.
“네 가지는 모두 군자의 일이니, 충후함이 지극한 것이다.”
호씨(胡寅(호인))역시 공자가 평소 자신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연원을 밝힌 듯 주공(周公)의 일화를 일러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백금이 封(대)함을 받고 本國(본국, 노나라)으로 갈 적에 주공이 훈계하신 말씀이니, 노나라 사람들이 전송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은 것이리라. 혹은 일찍이 夫子(부자)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셨던 것인가 보다.”
그런데, 원문만을 해독하는 것만으로는 공자가 갑자기 왜 주공(周公)의 가르침을 꺼냈는지, <논어(論語)>를 편집한 후대의 제자들이 왜 하필이면 ‘미자 편(微子篇)’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이 이야기를 넣었는지 논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그 의미를 파악해 보자면, 공자가 주공(周公)을 언급할 때 공자만이 보이는 습관과도 같은 의도적(?) 특징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공(周公)은 공자에게 있어 도통(道統)의 적통(嫡統)에 해당한다. 공자는 자신이 그 도통(道統)의 맥락을 계승한 후계자를 자처하고 그 점을 강조하려고 할 때 주공(周公)을 언급한다. 이미 공자가 패러디(?)했던 주공(周公)의 네 가지 주의사항을 보더라도 공자가 마치 주공의 아들인 듯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뼈에 새겨 늘 실천하고자 했음은 공자가 자처하는 후계자로서의 적통을 강조하려는 듯 보인다.
‘미자 편(微子篇)’에서 공자는 내내, 전통적인 은자로서의 처세를 논하며 자신을 비난하는 은자(隱者)들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전통적인 처세관에 반대되는 행보를 하는지에 대한 항변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어쩌면 항변을 넘어서 그저 은거하는 것으로 은자(隱者)를 자처하는 삶은 군자로서 행할 일이 아니라고 역공을 펼치는 것과 다름없는 듯한 강한 어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주공(周公)의 도통(道統)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공자로서는 주공(周公)이 아들에게 직접 내려주었던, 위정자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 바로 자신이 이제까지 실천해 왔던 가르침이었음을 역설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갖는 당위성의 증명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수 있다.
앞서 분석했던 공자의 처세관이 갖는 가장 큰 핵심조건은 세상을 옳지 못한 것에서 올바른 것으로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본으로 하되, 그렇게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개인적인 것이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익과 적당히 영합하며 나라의 녹을 먹는답시고 시늉을 내면서 뒤로 사리사욕을 챙기는 수많은 당대 위정자들의 지저분한 민낯에 일침을 가했고 제자들을 포함한 배우는 자들이 결코 그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호된 일갈을 내뱉었던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주공(周公)은 실제로 천하를 안정되게 다스렸던 실질적인 경륜을 가진 인물이었고 공자는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실질적인 커리어를 갖지는 못했던 불운한 인물이라는 점뿐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행복이 성적순이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입학의 성적과 행복한 삶이 등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가장 웃픈 농담 중의 하나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왔는데 사시에 합격하지 못하고 사시 낭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서울대학교 의예과를 입학해서 의사가 되지 못하고 낙제하여 폐인이 되는 경우는 없지만, 법학과에 합격해서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해 폐인이 되는 경우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빨간당과 파란당의 정치판의 오래된 고인 물들 중에서 서울대 법학과를 나오고서도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해 우회하여 돌고 돌아 다시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의 정점이라는 정치판으로 기어올라간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함께 입학했던 이들이 학부를 졸업하기 전에 사법고시 수석을 하고 재학 중 패스라는 영광을 누리는 와중에 자신은 시험에 계속해서 떨어져 결국 조금 난이도가 낮은 행정고시를 봐서 공무원이 되거나 언론사에 가서 기자가 되어 고등 학력을 활용하여 그 무리에서 조금 더 앞서가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후배들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사법고시에 십 년을 꽉 채우기 직전까지 내내 낙방했다가 겨우 합격해서 검사가 되었던 지금의 대통령도 있으니,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풀리지 않는 정도도 아니고 자신이 살던 조국을 떠나 천하를 떠도는 신세로 결국 칠순이 넘는 인생을 상갓집 개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공자의 입장에서는 겨우 서울대 법학과출신이지만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했는데 주변의 친구나 후배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보며 속이 타들어가는 정도의 처참함, 그 이상의 울분이 평생 가슴을 짓눌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한걸음에 달려가 그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그 가치를 알아줄 주군을 찾으려 했던 공자가 결국 매번 같은 결과를 맞이하고 심지어 외딴 타지에서 개죽음을 당할 위기에까지 처하면서 어떤 심정으로 다음 갈 곳으로 발길을 돌렸을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사형선고까지 받고 자신의 고집과 욕심을 버리지 못해 민주화를 성공시킬 기회까지 저버리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죽기 몇 년 전에 기어코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도, 최연소 국회의원이니 뭐니 주목만 받다가 집안에 갇혀 제대로 된 활동조차 하지 못하고 역시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민주화의 성과도 보지 못하고 적당히 군바리 정권과 타협 끝에 대통령 직에 오른 자도 그 고난을 함께 겪어왔던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의 권세를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경거망동한 끝에 대국민 사과회견까지 하며 잘못을 사과해야만 했던 사람도, 고등학교만 졸업했다는 비난속에서 함께 고생했던 아내의 서툰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이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최고 군통수권자라고 하는 자리에 올랐던 이들은 하나같이 평탄한 끝을 보지 못했다는 점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들이 그저 소박하고 가족들끼리 행복한 삶을 사는 것에 만족했다면 그런 불명예를 짊어지고 비난을 받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들이 하나같이 입에 담던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라는 말은 이미 빛을 바래버린 지 오래이다. 오직 자신만이 대한민국을 위하는 사람인 것처럼 외쳐대며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더라도 곁에서 돕는 방식을 취하겠다고 양보했던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국익을 위해서라도,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이미 벌어졌던 역사 속에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국민들을 큰 돌덩이 짐으로 표현하는 총리가 버젓이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에서, 아무리 대통령실에서 ‘이 모든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다’라고 외쳐대도 그 새빨간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으니 고치자고 내가 손을 걷어붙이고 먼저 나서겠다고 하는 솔선수범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나서면 자기 주머니를 챙기겠다는 시커먼 속내를 차마 감추지 못하고 제 잇속만 챙기면서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도 참 못할 짓이다. 그 모습을 본 당신은 뭐라 할 것인가, 거울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