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책처럼 사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게 해보기는 하고 그 뻔뻔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인가?

by 발검무적
子張曰: “執德不弘, 信道不篤, 焉能爲有? 焉能爲亡?”
子張이 말하였다. “德을 잡음(지킴)이 넓지 못하며 道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면 어찌 있다고 말하며 어찌 없다고 말하겠는가.”

이 장 역시 첫 장과 마찬가지로 자장(子張)의 입을 빌어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전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앞에서 이미 공부한 바와 같이 이 이야기가 자장(子張)에게서 나온 오리지널이 아닌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이해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는 다시 정리하는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수준이나 방식에 따라 똑같은 가르침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장(子張)의 이해가 갖는 특징을 자세히 살필 필요성도 분명히 있다.


이 장의 요점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덕을 잡아 지킴이 넓지 못하고 도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면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다’는 권계이다. 개념어로는 덕(德)과 도(道)를 강조하고 있는데 중요한 핵심은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있다.


구체적 실천을 강조하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덕을 잡아 지킨다는 설명이나 도를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그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주자는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얻은 바가 있으나 지킴이 너무 좁으면 德(덕)이 외롭고, 들은 것이 있으나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면 道(도)가 폐해진다. ‘어찌 있다고 하며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라는 말은 족히 경중이 될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주자의 해설에 근거하면, 이 장은 덕(德)과 도(道)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덕(德)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실천의 범위를 넓히지 못하고 편협한 마음으로 자신의 취사선택만으로 한정지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덕(德)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며, 아무리 훌륭한 도(道)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지식만으로 이해하고 갖추고 있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자신에게 적용하여 실천하지 못한다면 공허하게 죽어있는 책 속의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날 선 비판인 셈이다.


날이 서 있다는 다소 살벌한(?) 표현을 쓴 것은 마지막 문장에 사용된 ‘焉能爲有 焉能爲亡’이라는 표현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위에 번역한 대로라면 ‘그런 도와 덕을 어찌 있다고 하겠고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풀이한다면 다소 완곡하게 들릴 수 있을 듯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고 날 선 비판의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송(南宋)의 요로(饒魯)는, 이런 사람은 살아도 當世(당세)의 중함이 될 수 없고 없어도 당세의 가벼움이 될 수 없다고 풀었다. 그 사람 자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어서 당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한 내용이라 풀이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위백규(魏伯珪)는 요로(饒魯)의 설을 기반으로 하되 조금 더 힘을 주어 해석한다.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식으로 간주될 정도로 인식된다면 그 생명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누군가가 왜 그렇게까지 해석하느냐고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살아 있는 것은 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어서 개나 돼지도 반드시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물체로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도 존재감을 상실한다면 이미 물체의 속성도 지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경우 하루에 일만 번을 죽는다고 해도 누가 그 사람이 죽고 없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그렇다면 음식을 먹고 편히 쉬고 있을 때라도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일 뿐이다. ”

이 얼마나 명쾌한 논리인가! 흔히 말하는 개돼지와 사람의 차이,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존재감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존재감을 스스로 갖추느냐 갖추지 못하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을 단순히 사유능력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道德)의 실천양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정의 내린 것이다.


이러한 학설을 바탕으로 이 장을 다시 보면, 자장(子張)의 마지막 표현은, 도덕(道德)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여 그 범위를 일상으로 넓혀 널리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부족하다거나 잘못했다고 비판할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으니 아예 논할만한 수준조차 되지 못한다고 논외로 둔 엄격하기 그지없는 의미로 환치된다.


공자의 가르침이 원론적인 것이었다면 자장(子張)에게 다시 소화된 공자의 가르침은 훨씬 더 엄격하고 실천의 범위나 방식에 있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세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공자가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이 가리키는 바가 저 아래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특유의 방식이었다면, 자장(子張)은 자신이 아우를 수 있는 범위로 확실하게 특정 지어 말한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원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찬찬히 보라. 기본적으로 자장(子張)은 이 가르침을 도덕(道德)이 무엇인지 들어서 아는 자,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다고 자부하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들에 한정하여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일갈을 날리고 있다.

德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넓지 못하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는 단언은 능력이 안돼서 좁은 범위까지밖에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적당히 자신의 사리사욕과 부딪히는 경계에 있어 자신의 사욕(私慾)을 먼저 앞세워 자신의 이익을 해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군자인척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미미한 허장성세하는 자들의 가식을 비판한 것이다.


‘道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다’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독실하게 믿는다는 것은 그들이 책으로 혹은 훌륭한 스승에게 들은 가르침을 믿지 않거나 의구심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독실하게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행실에 있어 묻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에 의거한 표현으로 나온 것이다.


예컨대, 매주 목욕재계하고 가장 정갈한 복장을 하고서 교회를 가서 기도를 하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교인들과 덕담을 나누고 찬송가를 부르며 선한 어린양임을 강조하고 연기하면서 정작 바로 예배가 끝나고,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회사 상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과의 얼굴도장 찍고, 그들과 함께 하는 봉사를 하러 다닌다며 그 관계를 자신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결코 온전한 믿음에서 나오는 신실함이 아니다.


더 심한 경우는, 스스로를 신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내외적으로 연기하며 포장하고서 십일조를 내고 눈물을 흘리며 찬송가를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다른 이의 힘겨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하며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입에 담는 경우까지 번번이 등장하곤 한다.

대한민국 기독교의 원로들에게 자신이 용돈을 챙겨주며 힘을 키워왔다고 당당히 떠들어대는 사이비 목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회 사람들을 선동하여 수백억의 보상금을 받아내겠다고 정당한 철거행위에 무력으로 맞서며 그렇게 얻어낸 보상금을 자신의 자식에게 자연스럽게 승계시켜 놓고는 여전히 큰 소리를 친다. 자신의 교회에 기부하고 십일조를 낸 이들이 결코 어떤 식으로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서류를 꾸며두었다며 껄껄거리며 큰소리를 치는 설교(?)를 해대며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며 교인들을 여당의 당원으로 가입시킨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줘서 코로나 따위의 바이러스는 감염되지 않는다며 괴담을 설파하다가 자신의 교회 교인들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격리되는 일을 겪고서도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없다. 돈을 챙기다 못해 정치가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최고 정점임을 깨닫고는 정치판에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며 광화문에 나가 마이크를 들고 교인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동원하여 선동하고 마치 자신이 여당의 뒷배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도 내 말 안 들으면 맞아!’라고 종주먹을 흔들어댄다.


이쯤 되면 그의 믿음이 종교적인 믿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을 상식을 가진 자들이라면 알지 못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검사 출신의 빨간당 최고위원이라는 자는 그의 곁에 붙어, ‘목사님이 원하는 것은 당내에 의견을 개진하여 들어들이는 방향으로 하겠다’는 헛소리를 서슴지 않고 떠들어댔다. 문제가 불거지자 그는 그저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는 궤변을 연이어 가다가 정작 자신이 다음 총선에 공천조차 받지 못하고 손절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제서야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사과가 그저 자신의 이익이 일소될 위기에 처하여 눈 가리고 아웅 했다는 증거는 그의 망발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미국에서 터졌다. 그는 사이비 목사가 우파를 천하통일 했다며 다시 그를 추앙(?)하는 듯한 헛소리로 다시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실언의 연속이라며 현행 당대표에서 팽을 당했던 설화(舌禍)의 화신이던 어린 당대표도 잘라버린 빨간당은 그를 손절하기는커녕 그저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식으로 대강 뭉개고 말았다.

무식한 사이비 목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검찰출신의 빨간당 최고위원이라는 자는 정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바’라고 일컬어지는 도(道)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저리 좌충우돌 망발을 해대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온갖 방송에 얼굴을 들이밀고 기어코 최고위원의 자리를 꿰차고 나서 보인 그의 행보를 보면, 그가 왜 그렇게 사이비 목사에게 굽신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지 짐작가고도 남음이 있다. 오히려 그는 그런 다지기 작업을 통해 자신의 부와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그런 언행을 했을 확률이 높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논어(論語)>읽기 공부를 하면서 햄릿의 저 유명한 명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에 대한 잘못된 오독(誤讀)을 해석해 준 적이 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영문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원서로 <햄릿>을 읽을 정도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라면 그 대사가 갖는 정확한 의미가 정말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이 장의 가르침을 그 대사에 녹여 설명하자면. ‘사람답게 살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하는 절체절명의 선택에 기로에 선 햄릿의 고뇌가 담겨있는 절절한 절규가 바로 그 대사의 본래 의미이다. 어쭙잖은 일본어 번역을 통해 다시 한국어로 그대로 옮겨 오면서 본래의 의미가 죽을지 살지에 대한 1차원적인 대사로 변질되어 버렸을 뿐, 이 장에서의 지적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의미하는 고차원적인 대사임에는 셰익스피어의 의도에서부터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지난 일요일, 부활절 예배가 있던 교회에서 약속이 있었다. 한국 기독교가 아닌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다소 독특한 교리로 이단이라고 지탄받는, 하지만 분명히 같은 하나님을 찾는 교회였다.

신자도 아닌 내가 그곳에 갔던 이유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법조계 선배가 그곳을 약속장소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선량한 종교인을 표방하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식을 깨고 사회를 좀먹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해서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법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소장판사였던 그가 법원을 박차고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변하지 않는 사실관계를 두고 원고와 피고 간에 자신의 이익을 두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진흙탕싸움을 자신이 중재(?)하거나 시비를 가려줘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간에 어느 한쪽은 분명히 억울하다고 분해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보며 평생 업으로 삼기 어려웠다고 했다.


길게 이야기하거나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핵심만 기술해도 알아들을 정도의 지적 수준과 문해력을 가진 이와의 대화는 언제나 속도가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변 종교인들의 부정이 구체적 사례로 등장했을 때 대화는 급격히 속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이 이번 주 한국에서 벌이는 행사가 결국 자기 욕심만 차리겠다는 표리부동 아니냐는 신랄한 지적에 이어, 정말로 신실한 내부 교인이라면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선배의 표정은 이미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도(道)와 덕(德)은 단 한 번도 그 본질을 바꾼 적이 없다.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입맛대로 축소하거나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도록 변질시키는 인간이 문제일 뿐이다. 이 장에서 자장(子張)은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비난한다.

개돼지들이 국민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그렇게 부를 리가 없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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