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이해가 달라지는 이유

그것은 가르침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탓이다.

by 발검무적
子夏之門人問交於子張, 子張曰: “子夏云何?” 對曰: “子夏曰: ‘可者與之, 其不可者拒之.’” 子張曰: “異乎吾所聞. 君子尊賢而容衆, 嘉善而矜不能. 我之大賢與, 於人何所不容? 我之不賢與, 人將拒我, 如之何其拒人也?”
子夏의 門人이 子張에게 벗 사귀는 것을 묻자, 子張이 “子夏가 무어라고 하던가?” 하고 되물으니, 대답하기를 “子夏께서 ‘可한 자를 사귀고 不可한 자를 거절하라(사귀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子張이 말하였다.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다. 君子는 어진 이를 존경하고 대중을 포용하며, 잘하는 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능하지 못한 이를 가엾게 여긴다. 내가 크게 어질다면 남들에 대해 누구인들 용납하지 못할 것이며,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남들이 장차 나를 거절할 것이니, 〈내가〉 어떻게 남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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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자장(子張)과 그의 사형 격인 자하(子夏)가 간접적으로 비교되는 듯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내용은 자하(子夏)의 제자가 자장(子張)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상황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 이상한 기류는 자장(子張)이 자하(子夏)의 제자에게 ‘너의 스승은 무어라 가르쳐주더냐?’라고 묻는 것 자체에서부터 물씬 냄새가 난다.


여기서 냄새라 표현한 것은, 이 부분을 편집한 제자가 자장(子張)의 문하였을 확률이 매우 크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굳이 자장(子張)보다 4살이나 많았던 자하(子夏)의 제자가 자장(子張)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상황 자체가 다소 작위적이기 때문이다.


이 편명의 이름을 차지한 자장(子張)에 대해서는 앞서 두 장으로 살펴보았으니 잠시 자하(子夏)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다시 한번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간략하게 앞서 공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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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子夏)는 ‘팔일(八佾) 편’의 8장에서 난해하기로 유명한 ‘회사후소(繪事後素)’의 형이상학적 논의를 스승인 공자와 더불어 논했을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뛰어난 제자였다. 칭찬에 인색한 공자마저도 자하(子夏)를 평가하면서 그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다고 극찬(?)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공자가 그에게 해주었던 권계를 통해 그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옹야(雍也) 편’의 11장에서는 스승 공자에게서 ‘군자다운 선비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선비가 되지 말라’는 권계를 받은 바 있다. ‘자로(子路) 편’의 17장에서는 거보(筥父)의 읍재(邑宰)가 되었던 자하(子夏)가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자, 스승 공자가 그에게 맞춰, ‘빨리 하려고 하지 말며, 작은 이익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빨리 하려고 하면 일을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권계한 바 있다.


이 모든 가르침과 권계의 핵심에는 자하가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질문한 이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질문한 이에 대한 맞춤형 지도로 부족함을 일러주는 방식을 구사하는 공자만의 지도방식이 고스란히 그 점을 증명한다.


자하(子夏)의 인물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이 장에서 본의 아니게 비교되고 있는 자장(子張)과의 일화 역시 이미 저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된 ‘선진(先進) 편’의 15장에서 자공(子貢)이 이 두 사람에 대해 대놓고 비교하는 질문을 공자에게 묻고 답하는 상황을 통해 정확한(?) 스승의 분석과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느 누가 더 훌륭한 것이 아니라 ‘서로 부족한 점이 다르니 더 보완해야 한다’라는 평가와 가르침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이 장에서 보이듯이 다소 편파적인 흐름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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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는 마치 이러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특히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연상하듯 그 부분의 공자의 평가를 모두 이해한 위에, 다음과 같이 두 사람의 자기 소화방식의 분석에 집중하여 설명을 부연한다.


자하(子夏)의 말이 너무 박절하고 좁으니, 자장(子張)이 비판한 것이 옳다. 다만 〈자장이〉 말한 것도 또한 지나치게 높은 폐단이 있다. 大賢(대현)은 비록 포용하지 않음이 없으나 큰 잘못은 또한 마땅히 절교해야 하고, 어질지 못한 이는 진실로 남을 거절할 수 없으나 손해 되는 벗은 또한 마땅히 멀리해야 하니, 배우는 자가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야말로 위 주석에서 주자는 큰 스승인 공자가 두 사람을 분석하며 말했던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그대로 분석하여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자하(子夏)에 대해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박절하고 좁다’라고 분석하며 자장(子張)의 지적이 옳다고 설명하면서도 자장(子張)의 가르침 역시 너무 나아갔다며, 지나침을 경계해야 한다고 분석하며 그것이 왜 지나친 의견인가를 합리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한다. 결국 공자가 두 제자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자공(子貢)에게 일깨워주려 했던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주자는 모범답안(?)을 제시한 셈이다.


주자가 그렇게 분석한 근거는 단순히 자신의 의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장에서 언급되는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의 분석 또한 그들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닌 스승에 배운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의 차이였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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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을 사귀는 것, 좀 더 확대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 것이 배운 자로서의 올바른 태도인가에 대해 공자는 여러 가르침을 제자 각자의 눈높이와 상황에 맞춰 설파한 바 있다. 이 장에서 자하(子夏)의 제자가 자기 스승이 설명했다고 한 부분은, 앞서 공부했던 ‘학이(學而) 편’에 등장했던 ‘無友不如己者(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사귀지 말라.)’라는 가르침에서 연원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초심자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뜻으로 오독(誤讀)되어 모순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내용의 가르침이 같은 편에 실려 있다는 점이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바로 ‘汎愛衆而親仁(사람을 두루 사랑하되 어진 이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문구이다. 자하(子夏)의 제자가 자기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자장(子張)에게 대답했던 내용은 바로 공자가 일러주었던 ‘無友不如己者’의 견해를 따랐을 뿐이니 자하(子夏)의 이해나 지킴이 잘못되었다며 자장(子張)이 지적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이제까지 설명을 듣게 되면 발검스쿨의 학도 중에서도 도대체 왜 공자는 심지어 같은 편에서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언급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느냐고 울상을 지을 만도 하겠다. <논어(論語)>읽기를 처음 시작할 즈음에 풀이했던 ‘無友不如己者’의 내용을 설명하면서도 나 역시 똑같은 문제를 제기한 바 있지만, 자장(子張)이 이 장의 말미에 지적한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남들이 장차 나를 거절할 것이니, 〈내가〉 어떻게 남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은 지극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나보다 못한 자와 사귀지 말라’는 가르침이 옳다면 나야 늘 나보다 더 나은 이를 찾아 사귀려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나보다 더 나은 이는 굳이 나를 사귈 아무런 근거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한 자장(子張)도 그리고 그 의문에 고개를 끄덕였을 당신도 아직 초심자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에, 그리고 공자만의 특별한 가르치는 방식에 익숙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먼저 반성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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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불변의 상황이나 대상을 두고 한정하지 않는다. 똑같아 보이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상황은 언제나 새롭고 그 상황만의 특별함이 있으며, 대상 역시 똑같은 대상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그리고 상황과 맞물리면서 언제나 다른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본질적인 진리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진리가 적용되어야 할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똑같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응대하는 바가 달라져야만 한다.


그렇게 보면,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한 스승의 각기 다른 가르침이라고 설명하는 이 장의 내용은 공자의 가르침이 갖는 특성은 물론, 공자가 왜 그렇게 각기 다른 가르침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 가르침의 방점은 각기 어떤 부분에 방점이 찍혀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거리를 우리에게 의문으로 던져준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숙제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나 자신조차 부족하고 결점 투성이인데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함부로 규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공자가 중급자 이상이 된 배우는 자들이 깨달았으면 하고 바라는 포인트가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다음으로 더 나아가게 되면, 자장(子張)이 당당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내가 어느 정도 어질어졌다고 하더라도 과연 상대가 분명히 옳지 못한 자라는 것을 인지하였음에도 어떤 방식으로 모두 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자신의 수양만으로 가능한 부분이 아니기에 공자는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인 문제와 아울러 나를 수양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계의 이상적인 형성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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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아무렇지도 않게 나보다 못한 자라고 상대를 평가하고 과감하게 관계를 잘라버릴 수 있을까? <주역(周易)>의 ‘태괘(泰卦) 九二’의 효사(爻辭)를 보면 ‘包荒하며 用馮河하라.(거친 것을 포용하며,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 과단성을 지니라.)’라고 하여, 너그러이 포용하면서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해석이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중세 봉건시대였던 당시의 군주들에게 과단성 있는 판단력을 강조할 때 주로 인용되어 왔다.


군주의 시대가 지나버렸지만, 인간의 속성상 무리를 이루고 효과적인 조직을 형성하고 운영하는 것은 국정운영을 비롯하여 회사 경영에서도 필수불가결한 학습의 영역이다. 학습이라고만 썼으나 실제 현장에서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사람을 쓰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용되고 구현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유치원에 간 어린아이에게조차 처음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그러한 가르침은 유효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분석의 연속이고 끊임없는 선택과 판단을 요구한다. 위에서 주자의 주석이 모범답안의 사례를 보여준 것처럼 이 장에서 대놓고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하(子夏)도 그렇고 자장(子張)도 그렇고 동일한 ‘학이(學而) 편’에서의 두 가지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실천에 적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둘 다 옳은가? 아니면 둘 다 틀린가?


주자의 모범답안은 공자의 가르침대로 중도(中道)를 강조한다. 다른 이를 평가하기 전에 스스로가 어진 이가 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되, 나와 상대가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최선의 답안을 찾아야만 한다고 설명한다. 당연히 나를 먼저 가다듬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에서 끝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대와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대에게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더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아지고 그럴수록 더 섬세하게 살피고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아짐을 잊지 말라고 권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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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만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내가 사회구성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내가 배우고 익힌 지식을 실천해야 하는 공간이 인간관계를 배제할 수 없는 사회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다각적인 노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굴욕적인 대일외교를 했다며 도대체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국민 대다수가 궁금증을 가지고 있음에도 납득할만한 답변은 내놓지 못한 채, 그저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뭉뚱그리는 것은, 야당은 그렇다 손 치더라도 향후 정책이나 외교방침을 내놓을 때 국민들의 호응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부에게 마이너스일 수밖에 없다.


전 세계 각 나라들이 보수 우익화 되어가는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현 정부가 보이는 행태가 과연 진정한 보수가 보이는 철저한 자국 이익주의에 부합하는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완용을 필두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역시 입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생애를 통해 확인된 바와 같이, 그들의 행위는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들의 사욕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바른 소리를 한다는데, 죽기 직전 자식에게 이제 ‘미국이 대세이니 일본에 붙지 말고 일찌감치 영어 공부를 하고 미국에 붙도록 해라.’라고 유언을 남긴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우국충정(憂國衷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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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간쓸개 다 내놓고는 국익을 위한다고 하고, 감청논란이 하필이면 방미 직전에 터져 곤란하니 일단 시끄럽게 떠들어 국격을 손상시키지 말라고 무조건 입단속부터 하려는 정부가 진정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보수인지 나는 도저히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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