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로 사는 것이 잘못 사는 것이라 여기는 자들에게.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
子夏가 말하였다. “비록 작은 道〔技藝〕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으나 遠大함에 이르는데 장애가 될까 두렵다. 이 때문에 君子가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자하(子夏)의 복습(?) 내용이 담겨 있다. 공자가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 이제 더욱 세상이 혼란스러워져, 당시 젊은이 가운데는 인륜의 도리를 닦아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기보다 小道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아진 세태에 그 폐해를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다시 한번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장에서 자하(子夏)가 복습한 내용의 원전을 굳이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위정(爲政) 편’의 12장에서 언급되었던 ‘君子不器(군자는 어느 한 가지 쓰임의 그릇처럼 한정되지 않는다.)’의 가르침을 환기시킨 내용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그렇게 분석할 수 있는 근거의 실마리는 아래 주자의 해설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小道(소도)’는 농사와 원예, 의술(醫術)과 卜術(복술) 같은 등속이다. ‘泥(니)’는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위 주석에서 주자는 원문에서 ‘소도(小道; 지엽말단에 해당하는 작은 도)’라고 쓴 용어에 대해 구체적인 예시로, 농사, 원예, 의술(醫術) 및 점복(占卜) 같은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조금 범주를 넓혀서 생각해 보면, 원문에서의 소도(小道)가 갖는 의미는, ‘한 가지 전문적인 기예가 필요한 일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백여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뭇사람들의 앙망에 마지않는 직업인 의술(醫術)이 구체적으로 예시된 것을 보더라도, 이른바 ‘전문직’에 해당하는 일들을 작고 지엽적인 것으로 후려치는 듯한 논리에 다소 위화감을 느낄 현대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세태를 반영하는 내용이 아님을 다시 한번 예의주시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앞서 ‘자로(子路) 편’의 4장에서 번지(樊遲)가 농사짓는 법에 대해 배우는 것을 청하다가 소인이라는 핀잔을 공자에게 들은 것이 다소 작금의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의술을 업으로 삼는 의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누구나가 되고 싶어 하는 직업군으로 올라선 것은 시대 분위기가 바뀐 탓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보면, 농사를 짓는 농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 높은 인정을 받는 직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농부인데, 미국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곳까지 자신의 농장으로 가지고 있으며 운영하는 농부는 분명히 농부지만 준재벌급의 사장님으로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위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원예(園藝) 같은 취미로 삼을만한 일을 소도(小道)라고 하였지만 시대가 바뀌어 대규모 원예농장을 운영하거나 비싸고 희귀한 꽃과 식물들을 디스플레이하는 것을 전문적인 직업으로 사업체까지 운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전문화된 직업이 되었으니 그것이 이 장에서 지적하는 소도(小道)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접근한다면 이 장에서 자하(子夏)가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젊은이들의 잘못된 인식과 시대적 분위기를 한탄한 의미가 퇴색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현대의 시대적 분위기는 한 가지 전문적인 기술을 익히고 그 전공을 통해 일가를 이루는 것이 전문직으로 불리며 부와 명예를 얻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은 자하(子夏)가 한탄하고 있는 저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문두(文頭)에 ‘작은 기예이라도 분명히 볼만한 부분이 있다.’고 뭇사람들이 인정하는 부분을 수긍하는 의미에서 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표현은, 어느 한 가지 기예에 일가를 이룬다거나 그렇게 한 가지 전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의 기예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인정받는 분위기가 무조건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자하(子夏)가 지적하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실마리는 양 씨(楊時(양시))의 아래 설명을 통해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百家(백가)의 여러 기예는 마치 이 · 목 · 구 · 비가 모두 밝은 바가 있으나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볼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원대함에 이르는데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주석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원문에 사용된 ‘원대함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된다’라고 하는 군자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에 있다. 원문에서는 ‘치원(致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일반인들에게조차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주 최 씨의 시조였던 저 유명한 관료이자 학자였던 최치원(崔致遠)의 이름이 오버랩됨을 확인할 수 있다. 글자 그대로 의미를 풀이하자면, ‘遠大함을 극도로 다함’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말하는 원대함이란, ‘修身을 통해 治人을 이루는 大業’을 가리킨다.
물론 문헌상으로 최치원의 부모가 이 장의 내용을 근거로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논어(論語)>를 읽고 이 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최치원의 이름 작명(作名) 의도까지 언급한 것은 그것이 바로 이 장에서 강조하는 핵심이자 최치원이 이름에까지 새겨 그 의미를 기리려 했던 의도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법학과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조차 법기술을 익혀 어려운 사법고시도 아니고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시험만을 통과하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심각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미 회귀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치전원이니 의전원이니 하는 이름으로 역시 의대 출신이 아닌 이들이 치과의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 취업 걱정 따로 하지 않는 전문직을 차지하여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며 특수한 학원들이 호황을 누리던 이상한 시기가 분명히 우리에게는 있었다.
아니, 바로 현재까지도 멀쩡히 대기업을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보고 의대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이들의 무용담(?)이 쌓여 다시 의대에 입학했다는 인증 후기들이 늦깎이 의대 지망생들을 특수한 학원으로 몰리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체적인 직업이 조금 달라져 있을 뿐, 자하(子夏)가 한탄하던 당시 세대와 지금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문해력이 떨어져 고개를 갸웃할 이들을 배려한 것인지 이 가르침의 마지막에는 ‘군자라면~’이라고 하여 배우는 자들의 지향점이 기술자가 아님을 이미 명확히 선 그어주고 있었다.
즉, 이 장에서는 무엇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라고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자하(子夏)가 죽비를 들어 후려치고 있다. 법기술자가 되는 것이나 칼잡이가 되어 저명한 의사가 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그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전문기술과 기예를 가지고 일가를 이룬 사람이 되려는 표면적인 성취보다 훨씬 이전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과 그 전문직업이 갖추고 있어야 할 직업윤리나 책임의식에 대한 수양이 먼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그렇고, 검사로 임용될 당시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검사로서의 다짐도 그러하고,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모두 마치고 큰 목소리로 다짐하는 경찰로서의 마음가짐이 바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마음자세이자 끊임없이 수양해야 할 부분이라 강조한다.
매번 설명하고 또 설명하지만, 공자는 물론 공자의 제자까지 누누이 다시 강조하는 가르침의 이유는 그것이 도무지 실천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앞서 설명한 현재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의대 재입학에 대한 열풍이나 그전부터 쭉 있어왔던 의대 지상주의 등을 반추해 보더라도 너무나 빤하게 그 민낯이 드러난다. 그들이 과연 사회적 약자나 돈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인류의 난치병을 해결하기 위해 더 탐구하고 노력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의사가 되려 하는지 그들은 더 이상 구차한 변명조차 늘어놓지 않는다.
나름 괜찮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에 순응하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중년 이후의 불안감과 백세시대의 노후 대비를 감안할 때 역시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솔직하기 그지없는 목표의식을 대놓고 드러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재벌중심의 기업경영이라는 독특한 한국만의 문화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재벌가에서 제대로 된 직업 소명의식을 가진 의대, 법대 지망자가 나왔어야 할 텐데, 어느 재벌 2세, 3세도 법대나 의대를 가지 않는다. 법기술자나 의사 따위는 어차피 돈으로 최고의 기술자를 고용해서 그때그때 사용하면 그뿐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식이 그들에게는 이미 결과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허울 좋은 법조인의 포장은 애저녁에 벗어던지고 아예 법기술자로 나서 권력을 탐하겠다는 이들은 이미 여의도를 꽉 채우고서 서초동을 타고 흘러넘쳐 전국 곳곳에 법원 앞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다. 그나마 사법고시가 있을 때는 개천에서 뒹굴던 지렁이들이라도 성적만 좋으면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어서 마담뚜의 경이로운 작업의 결과물로 환골탈태하여 팔려가는 결혼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신분상승으로 용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의 자식이 머리가 나쁘고 능력이 변변치 못해 좋은 대학조차 나오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자 로스쿨을 앞세워 이제 돈으로 스펙을 만들어서라도 그들에게 변호사자격증을 주어 억지 법기술자로 만들겠다는 현대판 음서제까지 완성시켜 버렸다.
로스쿨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멋스럽게 들리는 철학과나 사회학과에 입학시켜야 한다는 매뉴얼까지 공공연하게 나돌면서 현직 법기술자 1세대 개천용들은 머리 나쁘고 사시조차 패스하지 못할 자식들에게 돈으로 인맥으로 자격증을 만들고 부와 명예의 대물림을 이어나가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어차피 부모가 돈으로 재판의 결과를 바꾸고, 국가 임명직을 회전문 인사하며 특정 법기술자 조직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것을 보면서 정의에 대해서 무슨 사명감을 가질 것이며 그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들 그 부모에게서 배운 그대로 행할 뿐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도덕의식 따위가 제대로 박혀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버지가 경비출신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했다는 모래시계 검사니 어쩌구 떠들어대던 검찰출신의 정치인이 경비원에게 대놓고 하대하고 목소리를 높여 갑질을 했다는 뉴스는 개천의 지렁이 출신이었던 이들이 본래 상류생활을 즐기던 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기고 검사임용시험에 합격한 여자아이가 술을 먹고 여경의 머리채를 잡고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헤롱거리며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라며 벌인 해프닝이 벌금형의 선고유예로 끝을 맺으며 어이없는 뉴스로 방송을 타는 현실은, 자신이 항공사의 오너 가족이라며 비행기마저 회항시키라고 땅콩을 던지던 수년 전의 상황에서 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총칼에 피를 묻히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바리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욕을 부린 배경에는, 그가 밟고 일어선 그전 정권 역시 군바리가 총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욕을 먹었던 군부정권이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역사적으로나 일반 상식에 비춰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대의명분이 될 수 없는 것은 그와 그들의 가족만 모를 뿐, 뒤늦게 대오각성한 그의 손자도 아는 일이다.
이 장의 가르침을 빌어 살짝 변용하자면, 군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수양에 비춰 어떤 식으로든 올바름을 향해 간다. 벌건 대낮에 술을 퍼마시고 운전대를 잡아 어린아이를 친 작자가 전직 공무원이라고 해서 더 욕을 먹는 이유는 그의 전직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아직도 사회에서 공무원이라는 직책이 가져야 할 도덕적 기대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자도 아니고, 스스로 목회자라 자처하며 마치 한국 교회의 총책임자인 양 거들먹거리는 사이비 선동가가 여당 고위인사와 망발을 해대는 이 시대에 상식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런지도 모르겠다는 한숨이 새어 나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