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신뢰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子夏曰: “君子, 信而後勞其民, 未信則以爲厲己也; 信而後諫, 未信則以爲謗己也.”
子夏가 말하였다. “君子는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은 뒤에 백성을 부리니, 신임을 얻지 못하고 부리면 〈백성들이〉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여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은 뒤에 간하니, 신임을 얻지 못하고 간하면 〈윗사람이〉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긴다.”
이 장에서는 사람관계에 있어 믿음(신뢰)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일을 이룰 수도 없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담아내고 있다. 이 가르침이 앞서 어떤 공자의 가르침을 복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위정자의 위치에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어야만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공부했던 ‘양화(陽貨) 편’의 6장에서 신뢰에 대한 부분을 설명한 ‘信則人任焉(미더우면 남들이 일을 맡긴다.)’의 가르침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학이(學而) 편’의 5장에서 설명한 ‘使民以時(백성을 부릴 때에는 때를 잘 맞춰야 한다.)’라는 내용도 떠오르게 한다. 또한, ‘헌문(憲問) 편’의 43장에서 ‘上, 好禮則民易使也.(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을 부리기가 쉽다.)’라고 한 것과 ‘양화(陽貨) 편’의 4장에서 설명했던 ‘小人學道則易使也.(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의 내용이 모두 자하(子夏)에게 종합적인 근거로 작용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위정자의 입장에서 갖춰야 할 신뢰와 신하의 입장에서 군주에게 간하기 위해서도 신뢰를 가져야만 한다는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신뢰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信(신)’은 성의가 간곡하여 남들이 믿어줌(신임함)을 이른다. ‘厲(려)’는 병(괴롭히다, 해치다)과 같다.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부릴 적에 모두 반드시 성의가 서로 믿어진 뒤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하의 입장에서도 군주로부터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그저 비방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설명방식은 공자의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초심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가슴에 확 와닿는 설명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이 내용은 ‘이인(里仁) 편’의 26장에서 공부했던 ‘事君數, 斯辱矣.(임금을 섬길 때에 자주 간하게 되면 욕을 당하게 된다.’라는 가르침에서 연원한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간언(諫言)하는 자세와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자는 다양한 구체적인 방법을 이미 일러준 바 있다. ‘이인(里仁) 편’의 18장에서 ‘事父母, 幾諫.(부모를 섬김 때는 조용하고 공손하게 간해야 한다)’라 하였고, ‘헌문(憲問)편’의 23장에서는 ‘事君 勿欺也 而犯之(임금을 섬길 때에는 속이지 말고 강직하게 간해야 한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른 장을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이제 <논어(論語)>를 마무리하는 ‘요왈 편’만을 남겨놓고 있는 시점을 볼 때도, 위와 같이 앞서 공부한 내용들을 복습하며 머릿속에 정리하고 그 의미를 궁구(窮究)하는 것은 예부터 공부하는 이들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번 ‘자장(子張) 편’은 더더욱이나 공자의 말석에 있던 제자들이 다시 그 아래 제자들을 위해 자신들이 스승 공자에게 공부한 내용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부연하여 설명하는 일종의 복습과정이기 때문에 본래 스승 공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이었는지 복기하는 것은 아주 주요한 공부의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고문의 특성상 전고(典故)의 방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본수험서로써 고문 공부의 기초 중의 기초라는 <논어(論語)>의 내용들을 꼭꼭 씹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때문에 <논어(論語)>를 편집한 후대의 제자들도 가장 마지막 편의 ‘요왈 편’이 3장으로 이루어진 것에 반해 바로 그 이전의 ‘자장(子張) 편’에 후대 제자들, 그러니까 편집한 기준으로 자신들에게 가장 가까운 스승들의 복습을 다시 정리한 것은 상당한 편집적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간의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그리고 후대 제자들이 다시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김에 있어 원전이 되는 가르침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소급하여 다시 그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 장에서 말하는 신뢰와 믿음을 상대에게 준다는 설명을 요즘 젊은이들의 용어로 바꿔 표현하자면, ‘진정성(眞情性)’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위 주자에 주석에서 ‘信’을 설명하며, ‘誠意(성의)가 懇曲(간곡)하여 남들이 믿어주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함이 아닌 상대를 위한 진심을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전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이 ‘진정성(眞情性)이 있네 없네’의 말에 등장하는 진정성(眞情性)이란, 우리나라 말이 아닌 일본어 ‘眞正性’이란 말에서 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의 ‘眞正性’이란, 정당한 인물이 기록하고 확인한 정보에 대해 제삼자가 보더라도 작성의 책임 소재가 명확한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최애(最愛)’라는 단어를 마치 한국어 신조어인양 한국어 독음으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봐야 할 것인데 언어에 민감한 글쟁이 입장에서는 역시 그러한 무개념 차용방식이 썩 마뜩잖은 것도 사실이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오래된 한문 속담에 ‘作舍道傍, 三年不成.’이란 말이 있다. 그 의미는, 길가에 집을 지으면서 행인에게 물어보면 의견이 모두 달라 결정을 내릴 수 없듯이 정책 결정에서도 주장이 많아서 얼른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경우를 비꼬는 뜻이다. 사실 이 속담의 연원은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소민(小旻)의 ‘집을 지으면서 행인에게 묻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완성을 보지 못하도다.(如彼築室于道謀, 是用不潰于成)’라는 문구에서 나온 것이다. 본래의 의미도 그렇고 속담도 그렇고 저마다 의견이 다른 조언자(참견꾼)가 많아 자신의 의견을 올바르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풍자한 의미인데,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조언자가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제대로 된 책임 있는 결정을 통한 국정운영을 못하는 것 역시 주변에서 사이비 목사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정치꾼들이 감 놔라 배 놔라 떠들어대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꾼들은 언제나 말한다. 특정 법안을 제안하려고 해도 그것이 이익이 되는 자들과 그것 때문에 손해를 보는 자들의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든 결정이라고 말이다. 이익집단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회의원들이나 정치꾼들에게 로비를 하고 지원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울 것도 없는 고착화된 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과 국민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제대로 정치를 한다고 하는 자들이라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의무이자 책무이고 소명이다. 그들이 아무리 구차한 변명을 덧붙여가며 자신들에게 뒷돈을 찔러주며 이익을 원하는 자들 역시 국민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어줄 필요조차 없는 자기기만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성을 가지고서 정치행위를 하는 이라면, 이미 그 진정성이 국민들에게 전달되어 신뢰를 얻었을 것이기에, 그들이 어떤 정책을 제안하고 꾸려나가든 국민들이 지지해 줄 것이므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다. 신념이 담긴 정치행위와 바른 소리는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실과 빨간당에서 말도 안 되는 행보를 계속해나가고 있어 국민의 지지가 바닥을 향해하고 있음에도 그 반대에 대한 지지가 파란당으로 고스란히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자기네들 대표를 뽑겠다고 하는 전당대회에서 쌍팔년도를 연상시키는 돈봉투 찔러주기가 만연했음이 수만 권의 전화녹취로 매일같이 생중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빨간당에서 수년 전 터졌던 이름바 차떼기 사건이 터졌을 때가 다시 회자된다. 수년 전은 고사하고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당시의 구태가 빨간당이든 파란당이든 정치를 한다는 작자들의 그 지저분한 정치판에서 너무도 당연한(?) ‘관행’이라는 용어로 둔갑하여 자행되어 왔음을 과연 지금 방송에 나와 구태가 어쩌고 떠들어대는 정치꾼들이 과연 전혀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경성제대 법학부 교수이자 청와대 정무수석을 거쳐 썩어버린 검찰을 잘라버리기 위해 칼을 직접 들겠다고 법무부장관직에 오르려던 이의 먼지떨이를 통해 그들만의 리그가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경성제대 법학부와 영문과 출신의 출중한 부모 밑에서 나온 그들의 자식은 어떤 과정을 거쳤던 것인지 부모의 모교는 고사하고 그 근처의 대학에 갈 성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자신들이 가진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놈의 스펙인지 뭔지를 갖추게 만들어 의전원과 로스쿨에 진입시켜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부와 명예를 계승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어찌 보면, 부모가 경성제대 출신의 교수들인데 겨우 학부생인 아들의 온라인 오픈북 시험에 모두가 매달려 퀴즈를 풀 듯 합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단한 자리에 있는 부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식과 함께 대학을 다녔던 동창들, 부모가 의대 교수이거나 저명한 변호사이거나 하는 이들은 품앗이를 통해 어차피 해오던 ‘관행’이라고 여겼고 그러한 관행으로 인해 애꾸처럼 안대를 끼고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기관의 채용비리를 고발하려는데, 이제 사회부 3년 차도 되지 않은 새파란 MZ기자라는 아이가 ‘이 제보자가 채용으로 인한 불이익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채용비리에 가담했다가 양심선언을 하는 선발위원이나 그냥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론제보를 이용한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라고 입을 놀리는 시대가 도래하고야 말았다.
심각한 채용비리가 있었다면 제보를 해준 제보자에게 감사를 전하고 사실관계는 철저하게 기자가 취재하고 크로스체크해서 밝혀내면 된다. 그런데 그 제보자가 채용비리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사람이라서 꺼려진다는 둥,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둥의 헛소리를 하는 것은 이미 그가 해당 기관의 누군가와 언니, 오빠 관계를 맺고 있어서 터트려봐야 그리 이슈가 될 것도 아니라는 주판알을 튕기고 있음을 자백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소위 자신도 법조기자였다는 대장동의 주동인물에게서 버젓이 뒷돈을 받아놓고서는 그것이 꾼 돈이라며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생전 내지 않았던 이자를 뜬금없이 내기 시작했던 후안무치한 언론사 간부의 뉴스를 보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위 기자라는 작자들이 확인된 곳만 무려 언론사 세 곳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보언론이든 보수기레기 언론이든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치꾼으로서의 지저분한 비리를 저지르는 곳이 빨간당이나 파란당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어쩜 그리도 닮아 있는지 이젠 신기하지도 않다.
파란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슬슬 고개를 들며 자신들이 마치 올곧은 소리를 한다는 듯이 방송에 나와 빨간당이 원하는 내부 균열을 드러내놓고 이용하는 정치꾼들이 슬슬 새로운 신당을 창당하네 마네 연기를 피워대고 있다. 그들이 이전 그들의 선거과정을 통해 보여준 썩은 구린내를 풍기는 부분은 그들이 욕해대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구태에 쩔고 썩은 정치판에 마치 자신들이 살아있는 양심이고 새로운 대안인 양 목소리를 높일 태세인 듯하다.
그들이 인지도를 잃지 않기 위해 연신 방송에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과 더불어,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떠들어댔던 그 올곧은 척하는 퍼포먼스의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산을 뭉텅 덜어내서 사회의 어려운 곳에 기부하거나 그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을 때 정말로 부정에 대한 척결을 위해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인 일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조부모가 자신의 자식인 손자들에게 물려준 재산이니 자신은 상관없다는 둥 어떻게든 그 상황만 모면하기 위해 자기기만을 했던 자들에게서 진정 국민을 위한다는 진정성을 보았다는 경우를 나는 그 어디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진정성이란 가슴을 칼로 갈라 심장을 보이는 것과 같은 행위로 증명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설사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며 자식이 부모를 이유 없이 싫어하고 튕겨내며 경멸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하더라도 그 감정의 카오스가 진정되고 철이 들기 시작하면 부모님이 자신에게 어떻게까지 해주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뒤늦게 자신이 부모가 되고 나서야 그 진심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 이미 부모는 그들의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
국민들에게 외면받고 나서 잘할 테니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신뢰를 받는 것이 먼저고 그다음에 잘하면 된다. 그들을 그렇게 길들일 수 있는 것 또한 국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