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德)에도 큰 덕이 있고 작은 덕이 있다?

기본원칙만 확고히 지킨다면 융통성의 범위 내에서는 변용이 용인된다.

by 발검무적
子夏曰: “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
子夏가 말하였다. “큰 德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德은 出入하여도 괜찮다.”

이 장에서는 덕(德)에도 큰 덕과 작은 덕이 있음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공자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탓인지 큰 덕과 작은 덕을 구분하는 설명은 당연히(?) 생략되어 있다. 그 개념의 구분이 중요한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원문에서 굳이 설명을 달지 않는 경우는 그 구분의 의미를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에 속하지 못하는 초심자들과 대부분의 현대인들을 위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그 기준을 설명해 준다.


‘大德(대덕)’과 ‘小德(소덕)’은 大節(대절, 큰일) · 小節(소절, 작은 일)이라는 말과 같다. ‘閑(한)’은 울타리이니, 외물의 출입을 막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큰 것을 확립하면 작은 일은 혹 이치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또한 무방(무해)함을 말한 것이다.


덕(德)에 대소(大小)의 구분이 있다는 설명은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일에 있어 큰 일과 작은 일이 있다는 설명은 일상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거부감이 없게 들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큰 일과 작은 일을 어떻게 구분하여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것이 없다.

돈이 많이 걸린 일이나 사활이 걸린 일을 큰 일이라고 말한다면, 작은 일, 소위 사소한 일이란 결과가 어떻게 나와도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을 그렇게 통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일의 원인이 되거나 그 일들이 얽히고 얽혀 큰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작은 일인 경우가 아닌 경우가 많고, 큰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대단한 일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그것이 일이든 덕(德)이든 크고 작음을 결정하는 것은 모두의 약속이나 규율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 당사자가 결정하게 된다. 심지어 같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직접 하는 이와 그 대상이 되는 상대가 서로 다른 기준으로 그 일이나 덕(德)을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음의 문제는 결국 주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원문의 해설을 충실히 먼저 살펴보자면, 자하(子夏)가 大德과 小德을 구별하여 설명한 이유는, 사람이 먼저 큰 것을 확립하면 작은 일이 간혹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무방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기서 구분 지었던 이른바 큰덕(大德)은 三綱五常(삼강오상)의 인륜(人倫)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을 정통유학에서는 ‘大節(대절)’이라고 한다. 앞서 공부했던 ‘미자편(微子篇)’의 7장에서 언급했던 ‘대륜(大倫)’의 의미와 같은 궤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한편, 작은 덕(小德)은 일상에서의 應待(응대)와 進退(진퇴) 등 세세한 행동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방식을 지칭하는 예절을 의미하여 상대적인 의미로 ‘小節’이라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정통유학에서는 大節이든 小節이든 모두 예법과 준칙에 맞아야 한다고 여겨 그 대소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엄격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자하(子夏)의 이 장에서의 설명은 유학의 가르침과는 다소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간파하여 불편했던지 오 씨(吳棫(오역))는 주석을 통해 그 점을 콕 집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 장의 말은 병폐가 없지 못하니, 배우는 자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자하(子夏)가 과연 유학의 가르침이나 스승 공자의 가르침에 위배된 새로운 생각을 품게 되었을까?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자하(子夏)가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배경은 과연 다른 의도가 배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찾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앞서 잠깐 설명했던 관계의 상대성에 있다. 즉, 스스로를 단속하고 배우고 익혀나가며 수양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자하(子夏)의 말은 정통 유학의 가르침에서 다소 거리감이 있는 소루(疎漏)함을 드러낸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단속이나 수양은 당연한 기본으로 보고,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집중해서 설명한 내용이라 이해한다면, 자하(子夏)의 이 설명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 가르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위정자의 입장에서 사람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를 등용하여 쓸 때 그가 가진 큰 장점이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나 의지라면, 상대적으로 작다고 판단할 수 있는 작은 결점들은 용인해 줄 수 있는 범주안에 있다고 판단하는 류가 그러한 설명인 것이다. 앞서 ‘위령공(衛靈公)’편에서 공자가 설명했던 ‘躬自厚而薄責於人(자책은 후하게 해도 남에 대한 책망은 적게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류에 해당한다.


내가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그 첫 번째 근거는, 앞서 자하(子夏)가 설명했던 말들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신독(愼獨)에 해당하는 수양 부분은 기본적인 것으로 여기되 위정자로서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근거는, 자하(子夏)의 가르침은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복기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기본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하(子夏)는 스승 공자와 초심자들의 사이에 중간 가교역할을 하는 숙련된 조교와 같은 입장에서 다소 독특하고 형이상학적인 공자의 가르침을 모두 소화시키지 못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더 쉽고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해 주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공자는 ‘君子 不可小知而可大受, 小人 不可大受而可小知也.(군자는 작은 일을 맡게 할 수는 없어도 중대한 일은 받게 할 수 있고 소인은 중대한 일은 받게 할 수 없어도 자잘한 일은 맡게 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준 바 있다. 이 설명을 이 장에 맞춰 설명하자면, 군자는 중대한 일을 전담해야 하기에 작은 일을 일일이 할 수 없거나 할 겨를이 없을 수 있다.


그것은 현대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기본원칙에 대한 부분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이나 시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같은 시간에 회사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처리하면서 그 시간에 진행될 아이 유치원의 학예회에 가서 꽃다발을 전하는 것은 할 수 없다. 물론 너무도 당연히 회사의 프레젠테이션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고 결정이다.


좀 더 극단적인 예로 비유하자면, 사회의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배운 자로서 갖춰야 할 자세임에는 틀림없지만, 돈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해 굶주려하는 아이들을 위해 라면을 훔친 사람을 잡는 일을 하느라 서민들을 속여 수백억의 사기행각을 벌이는 자들을 수사하는 일은 소홀해하거나 심지어 그들에게 뒷돈을 받아 더 큰 범죄는 눈감아준다면, 그것은 크고 작은 일에 대한 구분을 못하는 정도를 넘어 스스로 부정을 저질러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데 주범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유학의 본래 가르침은 물론 大德과 小德을 모두 갖추고 전념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실천불가능한 막연한 공론(空論)으로 치우쳐버릴 위험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시작하도록 움직임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가르치는 이의 본분이라고 자하(子夏)는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

그래서 조선후기 박세당(朴世堂)은 자하(子夏)의 그러한 의도를 이해하고, 이 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세한 것을 살피느라 큰 것에서 잘못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큰 덕목을 세우고 작은 것은 버려도 무방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을 부연한 것이다. 작은 것들이라고 무시하고 멋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되는 확고한 생각을 세우고 그것에 위배되는 레드라인을 넘어가지 않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의 최선을 기울이라는 설명이다.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 중에서 말을 바꾸는 행위가 있다. 처음에 말했던 내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사익에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거나 도덕적으로 추궁받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바꾸는 경우를 나는 지극히 혐오하는 편이다. 대개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 원인은 자신이 앞에 얘기한 내용을 상대가 증빙할 수 없다고 여겨서 ‘제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라든가 ‘제가 그렇게 말한 기억은 없는데요.’라는 식으로 뭉개거나 더 나아가 ‘뭔가 오해하셨나 보네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자들이 너무 많아지면서 사용하게 된 통화녹취를 그들의 앞에 내밀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목소리로 버젓이 말했던 내용이 증거로 등장하면 그들은 당혹스러워한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이라면 그 정도 빼박 증거가 등장하게 되면 그간의 후안무치한 태도를 접고 사과를 넘어 사죄를 하고 일을 수습해야 하는데 그들은 슬그머니 그 일의 수습을 자신이 속한 회사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사죄는 고사하고 사과도 없이 꼬리를 말고 조직이라는 간판 뒤로 숨어버린다.


이미 눈치챈 학도들도 있겠지만, 그런 행태를 하는 자들은 대개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개인 사업을 하는 자들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 용인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공기업이나 공무원, 특히 경찰이나 검찰 등 자신의 언행과 일처리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거나 피해보상에 대한 부분이 완전히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황당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민감한 사안이 많다는 점이다.

만물은 함께 자라면서도 서로 해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는 기준은 너무도 명확하다. 공익(公益)을 위한 것이 큰 일에 해당하고, 사익(私益)을 위한 것이 작은 일에 해당한다. 모든 이들에게 있어 당연한 이 기준은 이른바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해 선발되거나 먹고사는 정치꾼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선출직은 아니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이 기준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 이 장에서 자하(子夏)가 일러주고 싶었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범인을 더 잡는다고 해서 쥐꼬리만 한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라며, 진범을 잡는 것과 상관없이 무식하고 뒤탈 없는 약자를 범인으로 몰아 수십 년을 감옥에 보내놓고서 특진을 한 썩은 경찰이나, 그 사건을 기소하고 스타 검사가 되어 승승장구했던 자나 그저 일일 뿐이라며 그 억울함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의사봉을 두드린 판사들은 재심으로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도 않고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그로 인해 쌓은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간다.


한전과 가스공사의 수익이 좋았을 때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심지어 적자가 났어도 자기들 성과급을 챙기던 자들은 이제 벼랑 끝의 추궁에 몰리자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모두가 같이 죽는 수밖에 없다는 자폭범 코스프레까지 해대고 있다. 한전의 설비에서 시작된 불길로 인해 대형 산불이 났음에도 그것을 최소한의 보상으로 틀어막겠다고 그들은 버젓이 수천에서 수억에 나가는 변호사 비용으로 대형 로펌을 고용하는 짓을 반복한다.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109735&code=61141111&cp=kd

실제, 한전 본부의 실무책임자라는 자가, 자신들의 행정 미스로 처리되지 않은 보상을 하겠다 하면서, ‘그런데 그 보상을 3년 있다가 한꺼번에 해드리면 안 되냐?’는 황당무계한 약속을 해놓고서는 3년이 지나서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요?’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사건을 나는 당했더랬다.


https://brunch.co.kr/@ahura/589


내가 3년 전 통화녹취를 들이밀자 사죄는 생략하고 한전의 감사실장은 ‘회사에서는 지급할 규정이 없으니 소송이라고 제기해 주시면 지급하겠다,’고 하며 설마 소송비용이 더 비싸 실익이 없는데 그런 일을 벌이겠냐는 심보로 키득거리다가 정말로 소송이 제기되자 비싼 로펌의 변호사를 다수 고용하며 버티고 있다.


한전에 다니는 자들은 밖에서 보듯 신의 직장 따위도 아니고 그저 똑같은 월급쟁이에 소시민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끄집어내 놓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들이 가족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기업도 아닌데, 산자부 감사와 국회의원실의 추궁에도 회사 공식 답변이라며 ‘그렇게 약속했던 실무책임자 개인의 일탈이다’라는 같잖은 변명까지 해대며 ‘3년이나 지나 보상할 수 있는 경우가 어디 있냐?’라고 후안무치한 반박을 해대는 꼴을 보면서, 나라를 말아먹는 것은 뉴스에 나오는 정치꾼들만이 아니라는 현실이 확 다가왔더랬다.

그 많은 한전 직원들 중에 당신의 가족과 친구 한 명 없을 리 없을 터인데, 그들 하나하나는 너무도 양심적인데 조직만 썩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현재 한전이 보상 관련으로 벌이는 소송과 관련해 쏟아붓는 로펌 수임료는 수십억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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