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夏가 말하였다. “君子는 세 가지 변함이 있으니,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엄숙)하고, 그 앞에 나아가면 온화하고, 그 말을 들어보면 명확하다.”
이 장에서 자하(子夏)는 군자(君子)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군자(君子)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수시로 변모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오독(誤讀)할 초심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본래의 의미는 군자(君子)의 태도나 모습이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심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만 바라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그것이 변화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다각적인 면모를 설명한 것이다.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 듯 하지만, 같은 위상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그리고 그의 말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주자가 이 세 부분의 설명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儼然(엄연)’은 용모가 莊嚴(장엄)한 것이요, ‘溫(온)’은 얼굴빛이 온화한 것이요, ‘厲(려)’는 말이 확실한 것이다.
멀리 거리를 두고 보면, 근엄하기 짝이 없어 함부로 친근하게 대하기 어려운 것 같은데, 조금 가까워지고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면 따뜻하기 그지없는 마음씀이 처음 보았던 그 어려운 사람인가 싶다가도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와 말을 섞어보면 그 말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는 설명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장의 세 가지 다른 모습들은, 결코 군자가 그때그때 변한다는 의미로 설명된 것이 아니다. 이 장에서 공자의 어떤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자하(子夏)의 설명방식이다. 자하(子夏)는 분명히 원문에서 군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보면 원문의 묘사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행간 깊숙이 군자가 갖춰야 할 다양한 풍모에 대해 설명하고 군자를 목표로 배우고 익히는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이 배우고 익히는 자로서 군자를 목표하되 어떻게 수양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면, 자하(子夏)는 그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자신만의 이해를 통해 제자들이 흔히 보았을 스승 공자의 풍모나 군자가 갖춰야 할 풍모에서 이해하기 다소 어려웠던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실제로 이 장에서 묘사하는 군자의 모습은 앞서 공부했던 ‘자한(子罕) 편’의 10장에서, 안연(顏淵)이 스승 공자를 우러르는 장면과 그 싱크로율을 200% 일치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누가 묘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자를 묘사한 ‘술이(述而) 편’의 37장에 보면, ‘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온화하시면서 엄하고,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으며, 공손하면서 편안하셨다.)’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주자가 해당 표현에 대해 설명했던 내용을 참고하자면, 공자는 인격이 渾然(혼연)해서 中和의 기운이 용모에 나타났던 듯하다. 그래서 그와 같은 공자의 모습을 자연스러운 데자뷔와 같이 연상시킨 영향 탓이었는지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이 공자에 대한 오마주임을 증명한다.
“다른 사람은 엄연하면 온화하지 못하고 온화하면 명확하지 못한데, 오직 공자만이 온전히 갖추셨다.”
도대체 배움과 수양의 경지가 어느 정도나 경지에 이르러야만 이와 같은 모순된(?) 것과 같이 보이는 중화(中和)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한탄하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초심자들은 앞서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울지 모를 듯하여 주석에서 콕 짚어 다시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을 일러주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德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공자의 냉철한 분석이자 가르침이었고 자하(子夏) 역시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인만이 이룬 경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인간으로서 이르지 못할 경지가 아님을 공자는 몸소 증명해 보였다.
배우는 자라면 누구나 끊임없는 배움과 수양을 거쳐 자기의 氣質을 다스리면 中和의 기운이 용모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음을 자하(子夏)는 배우는 자들에게 일러주고 싶지 않았나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이러한 자하(子夏)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했던 사 씨(謝良佐(사양좌))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이것은 변화함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니, 함께 행해지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좋은 옥이 따뜻하고 윤택하면서도 단단한〔栗然(율연)〕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들이 오를 노력조차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막연하게 군자의 경지를 오르지 못할 나무로 규정하는 당시 배우는 자들에게 자하(子夏)는 현실적인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들이 자칫 모순된 현실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모습이야말로 궁극의 군자가 갖추고 있는 풍모임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원문에서는 풍모만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풍모가 겉으로 드러나기까지 안으로 얼마나 부단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자기 노력과 수양이 필요한가를 역설한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거들먹거리며 거창한 문구를 읊조리며 배우지 못한 자들을 깔보고 비아냥거릴 뿐 정작 자신이 목표로 하는 군자로서의 풍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지레 그것은 성현(聖賢)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자들에 대한 일갈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르침에 더해 이 장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깊이 들어가 살펴보는 공부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장에서 묘사한 ‘거리’에 대한 표현을 배우는 자들이 어떻게 명확하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것이 첫 번째 생각할 숙제이고, 세 가지로 구분하되 왜 같은 위상이 아닌 마지막에 말하는 것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두 번째 생각해봐야 할 숙제이다.
흔히 말하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그 의미는, 다른 이들에게는 온유하게 대하되,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기준으로 신독(愼獨)해야 한다는 수양의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 장에서, 멀리서 보면 엄격하기 그지없지만, 가까이서 보면 온유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표현과 같이 두 가지 모두 타인에 대한 부분이므로 지근거리에서 직접 대하게 되면 온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완전히 배치된 설명도 아니지 않겠는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왜 엄격하기 그지없다는 표현을 먼저 사용했을까? 그렇다면 단순히 그 멀고 가까움의 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사귀어서 그 속을 알게 되었을 때가 아닌가 하는 식으로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까? 사귀어서 가까워져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기 전에는 차갑고 엄격해 보이기 그지없다가 가깝게 사귀고 그 속을 알게 되면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친절하고 따스하게 구는 경우보다는 가까워지고 친근해지면 누구나 온유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 당연한 거리의 문제를 설명하겠다고 자하(子夏)가 스승의 풍모까지 떠올리며 이런 설명을 했을까? 그랬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 첫 번째 숙제를 해결할 실마리는 두 번째 숙제의 해답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이다. 단순히 외모만으로 그가 차갑고 온유하고를 판단하는 것은 그저 첫인상이나 외모에 해당하는 것이니 이 장에서 말하는 군자로서의 마음가짐이 드러나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이 장에서의 멀고 가까움의 거리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에게 같은 상황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풍모를 설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에서의 멀고 가까움의 거리는 물리적은 것은 물론 아니거니와 심리적인 거리도 역시 아니다. 이는 다각적인 사회 내에서 그가 갖춰야 할 지위에 맞는 그리고 그 역할에 맞는 다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위직 공무원도 어느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부모이자, 누군가의 배우자이며 무엇보다 그가 속한 조직에서 그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가진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공직자이다. 즉, 그가 한 가지 모습만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이 단순히 그와 친분이 있다고 하여 온화하게 굴고, 그와 일면식이 없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차갑고 원리원칙을 강조하며 내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군자를 목표로 하는 배우고 수양하는 자로서의 태도가 아님을 역설한 가르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유명무실의 대표적 사례?!
그렇기 때문에 같은 위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거리에 대한 부분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마지막의 항목에,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명철하고 명확하다’는 설명으로 부연(?) 한 것이다. 이것은 엄숙한 것에도 온유하기 그지없는 곳에도 한정되지 않은 사리분별에 맞는 언행을 설명한 것이다. 그 어떤 거리와도 상관없이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옳다고 하고 그것이 그른 것이라면 그르다고 하는 것이 바로 칼날같이 명철하기 그지없는 말에 해당한다.
명확하고 명철한 말에 ‘칼날 같다’라는 비유를 넣었다고 하여 멀리 볼 때의 엄격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오독(誤讀)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초심자들을 위해 다시 한번 부연하자면, 자하(子夏)가 마지막 문구에서 강조한 이 명확하고 명철한 말은 내가 위에 설명한 표현대로 맺고 끊음이 명확하기 그지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차갑고 거리를 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리분별에 맞는 사실관계에 입각한 감정이나 이익관계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공정한 일처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처리’라 하지 않고 ‘말’이라 표현한 것은 그의 속에 있는 마음가짐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방식은 말(글)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방송작가로 밥벌이를 시작해서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프리랜서 작가를 하면서 쌓은(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구심이 가긴 하지만) 인맥을 바탕으로 스리슬쩍 정치판에 투신했던 예순을 넘긴 여자가 구속되면서 파란당은 그야말로 일파만파 초유의 위기사태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헛똑똑이었는지 아니면 보험을 들어두고 싶어서였는지 자신의 핸드폰에 모든 통화를 자동녹음기능으로 설정해 둔 것을 보면, 그것이 지금과 같이 검찰의 포렌식 수사로 인해 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지는 몰랐던가 보다.
물론 대통령을 필두로 한 정치꾼들과 검찰에게 개돼지로 인식된 지 오래된 일반 국민들이, 검찰에서 포렌식을 한 녹음 파일이 어떻게 버젓이 기레기 언론사에 차곡차곡 제공되었는지를 따질 의심조차 하지 않고서 그 사실 자체만으로 경악할 것이라는 불쾌한 사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파란당에서 일어난 지저분한 정치행태는 불변의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파란당에 한정되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빨간당의 전당대회나 선거를 치르며 관련했던 이들이라면 함구하고 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치 서울대 법대 출신의 전직 법무부장관이 자신의 딸과 아들에게 온갖 부정한 짓을 저질러놓고서는, 부모가 그럴 수 있는 지위나 직위에 있는 이들이라면 강남에서는 공공연하게 일어났던 일인데 이렇게까지 멸문지화(滅門之禍)의 포격을 검찰이 집중포화하는 것은 자신이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칼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과 모양새가 똑같다.
이미 수사과정이 생중계되면서 알려진 바와 같이, 전직 법무부장관의 딸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동창의 아버지이자 의대 교수였던 자는 품앗이를 했지만 검찰에 직접 메스를 가한 주범이 아니었기에 흐지부지 논외로 면죄부를 받았다.(여기서 면죄부라 함은 그가 대학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거니와 아이들 교육에 더 적극적이었을 그의 아내가 누구처럼 안대를 끼고 감방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의미한다.)
그 추악한 민낯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국민들조차 그것이 전혀 모르고 있던 그들만의 리그였다고 경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알고 있고 심지어 자신도 그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까지 포함하여 그러한 행태들이 공공연한 비밀임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 상대적 상실감에 혀를 끌끌 찰뿐이었다.
천만 원이 넘는 국민의 혈세로 월급을 받는 국회의원들이 백만 원 때문에, 심지어 그것을 받았다는 사실이 적발되면 감옥까지 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그 돈을 달라고 챙겨 받았다면, 그 정도는 다들 한다는 그놈의 ‘관행’을 언급하며 자신을 기만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들만 그랬을까?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100보 도망간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