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해야 할 것을 다하고 나서 여력이 되면 공부하라?

할 일이 없어서 공부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by 발검무적
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子夏가 말하였다. “벼슬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배우고, 배우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

이 장은 단 열 글자의 매우 짧은 문법적 대구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조사를 빼고 나면 그나마 몇 글자 되지도 않은 이 지극히 짧은 구조는 공자의 짧은 문장을 떠올린다. 아니나 다를까 대구로 되어 있는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혼란을 자아내게 만든다.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배운다고 한 앞 구절과 배우고 나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는 뒷 구절은 동시 상황의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구심이 든다. 배우고 나서 그것을 전제로 벼슬을 하라는 것인지 벼슬을 하고 나서 여가가 있을 수 있기도 만무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움을 강조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벼슬을 하는 이에 대한 조언과 벼슬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조언이 나뉘어있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혼란을 감지한 주자는 이 장의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優(우)’는 여력(여가)이 있는 것이다. 벼슬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이치는 같으나 일은 다르다. 그러므로 그 일을 당한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일을 모두 한 뒤에 그 나머지에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벼슬하면서 배우면 벼슬하는 데 이용함이 더욱 깊어지고, 배우고서 벼슬하면 그 배운 것을 징험함이 더욱 넓어진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장의 내용은 벼슬을 하고 있는 자와 벼슬을 아직 하지 않고 준비하는 자에 대해 나누어 조언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황 전체를 두고, 벼슬을 하고 있는 이른바 위정자들에게 배움을 강조하는 말을 하되, 그것에 대한 같은 위상의 대구로서가 아닌, 그것의 의미를 강조, 보완하기 위한 설명(?)으로 뒷문장이 들어가서 배움이 벼슬을 하기 전에도 반드시 필수적인 요소인 것에 변함이 없지만, 벼슬을 한다고 하여 겨를이 없다며 배움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전통 유학에서의 가르침도 그렇지만 봉건 시대 지식인들은 학문을 갈고닦아 벼슬에 나아가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실천하는 것이 이상이라고 배우고 그렇게 여겼다. 물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지만, 특히나 공자의 춘추시대에는 대부분의 배운다고 하는 이들이 권세에만 집착하여 요직에 나간 뒤에는 자신이 배우고 익힌 학문을 구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이 실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조차도 잊고 말았던 듯하다.


공자의 가르침이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모든 실천의 요체가 학문(學問)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겼던 자하(子夏)의 눈에는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세상이 혼돈으로 휘말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그 근본을 잊은 배운 자들에게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장에서 자하(子夏)는 벼슬한 이들에게 여가에 배우고 익히라고 하였다. 이 표현방식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갖는 날카로움과 비슷하게 닮아있지만 자하(子夏)만의 것이라 볼 수 있는 일침이 담겨 있다. 주자의 주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에서 여가라고 표현된 부분은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여력이 있다면’으로 풀이된다.

벼슬을 하는 이들에게 여력이라는 표현을 쓴 것과 그 여력이 있다면 배우고 익히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확실하게 한다. 벼슬을 하는 일과 학문을 하는 것은 명백하게 다른 일이라고 구분한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벼슬을 하고 있는 자들이 여력에 학문이 아닌 다른 것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호된 일갈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의미를 부연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설명했던 뒷 구절도 이와 같은 행간의 의미를 부연해주고 있다. 학문을 한다고 하는 자들이 그저 배우고 익히는 목적이 벼슬을 하기 위함인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당대 세태를 한탄하며 제대로 배우고 익히지도 못했고, 배우고 익혔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수양하는 방식도 그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급급히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고 학문을 출세를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은 본래의 학문의 목적에도 위배되지만, 무엇보다 나라를 망치고 스스로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는 가르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여력(餘力)’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뒷구절에서 다시 똑같은 그 표현을 사용하여, 학문을 충분히 익혀 실천을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충분한 실용능력까지 갖춘 여력이 있다면 비로소 벼슬에 나아가 학문의 내용을 실천하라고 역설한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이후 배우는 자들에게 전성되어 ‘學優仕優(학우사우)’의 가르침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천자문(千字文)에 언급된 ‘學優登仕(학우등사)’역시 이 장에서 유래한 가르침으로 말만 익숙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언급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가 기대승(奇大升)에게 쓴 편지에서 出處(출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이 장의 가르침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당대는 물론이고 작금의 배우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學優仕優의 가르침을 처신의 절도로 삼아 올바른 의리를 정밀히 살피십시오. 출세하여 벼슬할 때는 국사를 걱정하는 이외에 한 걸음 물러서고 한 계단 낮추어 학문에 전념하여, 내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데 어떻게 經國濟世(경국제세)의 책임을 맡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며, 시대와 맞지 않을 때는 외부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閑職(한직)을 청하거나 물러나길 도모해서 학문에 전념하여, 내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니 마음을 가라앉혀 몸을 닦고 공부를 진전시키는 것을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자신이 높은 지위를 보장받을 때 스스로가 공부가 부족하거나 초심을 잃었다고 하여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공부를 하고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는 이를 나는 아직까지 보거나 들은 바 없다. 오히려 대통령 선거에 낙선하거나 당대표 선거에 떨어지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여 마땅히 할 것이 없는 자들이 유학을 빙자하여 해외로 나가는 일이 마치 정해진 수순인 양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생각하자면, 그들에게 ‘여력(餘力)이 있다면’의 의미는 타의에 의해 자신이 자리를 얻지 못하여 원하는 사리사욕을 채울 수 없는 상황일 때 어쩔 수 없이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어버리고 말았다.

자하(子夏)가 강조한 이 장의 가르침은 앞서 공부했던 ‘학이(學而) 편’의 6장 후반부에서 공자가 강조했던 ‘行有餘力, 則以學文(행하고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이 문장에 앞서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윗사람에게 공손하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남에게 믿음을 주며, 많은 사람을 널리 친밀하게 대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해야 한다.’는 부분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기본 중의 기본이 실천되어 몸에 배고 난 다음에 힘이 남으면 학문을 하라는 의미는 학문을 홀대한 것이 아니라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학문을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그렇기에 공자는 ‘공야장(公冶長) 편’의 5장에서 제자인 칠조개(漆彫開)에게 벼슬을 권했을 때 그가 벼슬한 자신이 없다고 사양하자 기뻐했다. 칠조개(漆彫開)가 그저 스승에게 겸손의 의미로 그렇게 사양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벼슬을 하기에는 아직 학문이 부족하다고 분석해서 말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공자는 그 어느 쪽이든 벼슬을 하겠다는 것이 먼저이지 않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제자가 기특하다 여겼을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의 경험을 통해 분석해 보건대, 밥벌이로서의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들이 이미 그 자리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충족시켜 선발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작게는 기업의 신입사원도 그러하지만 크게는 이미 원숙하여 낙점되었다고 하는 장관직이나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 고위 공직자의 경우에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느 분야에서 그가 아랫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윗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경우는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배우고 익혀나가 그 자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의 필요를 채우는 경우 이외에는 없었다. 때문에 그런 이들은 평생에 걸쳐 쉽게 만나기 어려웠다.

배우고 익혀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하는 교수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더라도,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끊임없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분야의 기업에 대해 분석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일보다는 자신이 늘 만나고 술잔을 기울이는 관리자들과 어울리는 것에 경도되어 있었고, 자기 실험실을 가지고 끊임없이 실험과 연구를 기록해야 할 이공계 교수들은 대부분의 잡무는 대학원생들이 해야 할 일일 뿐이라며 자신이 직접 데이터를 체크하거나 자신이 공동저자로 등재된 논문이 짜깁기에 의한 표절연구인 것조차 사고가 터지고 나서 깨닫고서는 뻔뻔하게 자신이 모든 대학원생들의 연구를 확인할 수는 없으니 법적인 책임은 없다는 후안무치함을 토해냈다.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는 자들이 자신이 유학한 나라에 세미나나 심포지엄에 가서 원고 없이 원활하게 전공 논문을 논하는데 더듬거리기 일쑤인 것은 생경한 일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지경이 되었고, 인문학을 공부한답시고 떠드는 자들이 인접 분야의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서적을 대강(?) 한자로 의미를 이해한답시고 중국어나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구차하게 마흔을 넘은 지 몇 해 되지도 않아서는 건방지게 ‘나이가 먹으니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기억력이 젊을 때와 같지 못해서 새로운 것을 공부하기에 어렵다.’는 신박한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상아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공부하고 익혀 더 전문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도 그러한데, 대놓고 권력과 부귀영화만을 목적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정치꾼들이나 자신이 가진 직업적 특성을 특권이라 여기며 칼을 휘둘러 그것으로 역시 사욕을 채우려는 경찰, 검찰에 널려있는 그 허접한 욕망덩어리들은 오죽하겠는가?

한국의대에 가지도 못하는 자들이 우즈백과 키르기스탄까지 갔던 사례를 다룬 방송

멀쩡하게 대기업을 다니던 자들이 의대와 치전원을 들어가겠다고 사직서를 내고 공부하는 것이 자아실현이나 국내의 부족한 의료인력을 채우기 위하겠다는 대의명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은 누구보다 그들이 가장 잘 안다.


언제 잘릴지 몰라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는 것보다 전문직이라는 명판을 달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인 업그레이드를 이루고 싶다고 말하는 그들을 두고 부럽다는 둥 그렇게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둥 댓글이 달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난 세대보다, 과거보다 더 나아졌는가?


그나마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구조였던 사법고시가 폐지되고, 한 해에 2천여 명이나 되는 변호사 시험 통과자들이 전국에 쏟아져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변호사의 사건 수임료가 사법고시 때보다 훨씬 낮아지고 법률서비스가 나아졌던가?


어차피 이미 법조계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자신의 머리도 나쁘고 성적도 안 좋은 자식들에게 똑같은 지위를 승계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 현대판 음서제의 판에서 사법고시 때를 생각하며 수천만 원에서 억대까지 이르는 학자금 대출의 부담을 짊어져가며 로스쿨을 향한 이들의 행태를 좀 보라.


한 해에 2천여 명에 가까운 이들을 합격시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합격률을 살펴보면,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로스쿨이랍시고 전국에 걸쳐 대학들이 등록금 장사를 대놓고 벌였음에도 로스쿨을 억지로 들어간 학생들의 수준이 2대 1의 경쟁률조차 뚫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변호사 자격증을 딴 이들은 훌륭할까? 부모가 로펌대표이거나 전관이지 않은 평민 혹은 천민급 부모를 둔 자식들이 로스쿨에 들어가서 훌륭한 변호사로 날린다는 경우가 과연 그 반대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나?

사법고시를 통해 검찰과 법원을 장악한 이들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1세대 외교관들은 그 알량한 콤플렉스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만들려고 제도자체를 바꾸고, 장관이었던 자는 불법까지 자행하며 자기 딸을 외교관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그렇게 외교관이 된 그 대단한 자식들은 민원창구에서 거친 욕설을 해대며 항의하는 민원인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대단한 부모를 두지 못하고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지만 겨우겨우 시험성적으로 외교관이 된 부모의 꼬리표가 없는 평민이하의 이들이 그들의 일을 대신할 뿐이다.

의대를 갈 성적도 못되어 공대를 경유해서 편입 등으로 기어코 그 자리를 끼어들어온 병원장의 아들이 우대받는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수긍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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