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내가 그 꼴을 당해야만 살려달라 소리칠 셈인가?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맛봐야 아는 자들에게.

by 발검무적
曾子曰: “吾聞諸夫子: 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
曾子가 말씀하였다. “내가 夫子께 들으니, ‘사람이 스스로 정성(진정)을 다하는 자가 없으나 반드시 親喪에는 정성을 다하게 된다.’ 하셨다.”

이 장에서는 증자(曾子)가 스승 공자에게서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이중 인용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형태는 다음 장에도 그대로 유지되는데, 왜 다른 제자들과 달리 증자(曾子)의 경우에는 스승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독특한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편집의 의도도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내용으로 들어가 자세히 그 가르침의 의도를 살펴보자면, 예법을 강조했던 스승 공자마저도 인간이 아무리 예법의 근본인 감정에 충실하려고 해도 그러기가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직접 부모님의 상을 당하게 되는 경우에 처해서야 진정한 본질의 감정이 들어 자연스럽게 정성을 다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냥 읽으면 당연한 논리일 것 같기도 한 이 가르침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후대 학자들의 학설에 있다. 일단 주자는 이 내용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致(치)’는 그 지극함을 다하는 것이다. (親喪(친상)은) 사람의 진정에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세간(世間)의 일에 있어 평상시엔 특별히 힘쓰지 않고, 누가 강요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진정(眞情)을 다하는 일이 좀처럼 없지만 부모의 상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슬픔이 쏟아져 나와 진정이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주자는 원문의 의미를 당위(當爲)의 의미로 풀이한 것은 아니지만, 주자의 이 풀이를 이어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부모의 상처럼 진심으로 슬퍼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當爲)를 강조하는 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풀이하는 방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윤 씨(尹焞(윤돈))는 그러한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이 장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親喪은 진실로 스스로 〈정성을〉 다해야 하니, 여기에 그 정성을 쓰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그 정성을 쓰겠는가.”


두 가지 의견이 상반된 것까지는 아니겠으나 위의 마지막 주석의 방식은 다소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 주자가 해설했던 의도가 윤 씨와 같은 의미라고 풀이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앞서 공부했던 예법보다 사람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진정성을 강조했던 이 편을 관통하는 맥락에서 보자면, 결국 예법은 형식도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 그 상황에 맞는 감정의 본질, 진정(眞情)이 우러나와야만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르치거나 억지로 배워서 하기 전에 부모님의 상을 당하게 되면 막연하게 배웠던 그 내용들의 진의(眞意)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장은 단순한 듯 하지만, 인간의 본성 특히 자기 이기적인 마음에 대해서 공자가 느꼈던 바를 다시 한번 증자(曾子)의 복기를 통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으로 그렇게 배우고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아무리 예의 본질을 강조하여 그 진정한 의미를 익힌다고 하더라도 결국 실천에까지 이르기에는 공감을 통한 스스로 깨달음이 오지 않고서는 이루기 어려움을 비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단순 명료한 예법의 기본적인 가르침에도 자기 부모님이나 자신이 알고 가깝게 대하는 어르신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수긍하고 그래야 한다고 긍정하던 사람들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봐서 안다고 굳이 존중하고 대접해야 하나?’는 식으로 후안무치하게 구는 행태가 지금만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70이 넘는 평생에 걸쳐 경험하며 보아왔던 인간의 그 사특한 본능은 배운 자들이든 배우지 못한 자들이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배운 자들은 그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천에서는 전혀 다른 그 사특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자기 사람 챙기기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백성들의 모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말의 여지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을 치를 때 너무 슬퍼하다가 수척해져서 죽음에 이르기기까지 하는 일이 적지 않았기에 그런 자식의 죽음에 대해 ‘부모의 후사(後嗣)를 끊는 불효’라 했다. 그러한 상황이 적지 않았다는 근거는, 엄중하기 그지없는 내용으로 일관되었을 것만 같은 <예기(禮記)>에서조차, ‘상중의 사람은 몸에 종기가 나면 몸을 씻고 머리에 부스럼이 나면 머리를 감으며 병이 나면 술과 고기를 들어야 한다.’고 우려했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증자(曾子)가 스승 공자의 이 가르침을 다시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결국 단순한 하나의 가르침에 한정되지 않은 다각적이고도 복합적인 가르침이 녹아들어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그렇게 수많은 세월, 수많은 제자들을 직접 가르쳐가면서 느끼고 확인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결정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 깨달음은 결국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라고 했던가? 자신이 직접 그 상황에 처해 긴박하고 간절함을 통해 체험했던 경험치는 그 어떤 책이나 토론을 통해서 익힌 내용보다 뼈에 새겨지기 나름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공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것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한 명 한 명의 상황과 성향을 분석하고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던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 맞춰 던져주었던 이유이고 의도였다.


아무리 기초부터 실용까지 모두 순차적으로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틀리고 잘 못하는 부분이 다르기에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일대일 지적이 바로 이루어졌기에 공자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그나마(?) 바로바로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자기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부모를 잃은 슬픔을 겪어보지 못했던 이가 아무리 친상(親喪)을 당한 이의 장례에 조문을 가더라도 그 감정을 100% 공감하기에는 분명한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발톱이 빠지는 그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똑같은 부상을 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를 대하는 것과 그런 경험이 없는 이가 걱정해 주는 것은 그 정도에서부터 다르다.

어떠한 사정으로든 부모가 되어보지 못하고 딩크족으로 사는 이들은 아무리 나이가 먹더라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똑같이 느껴보고 내 자식을 키우면서 느끼는 그 다양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아이를 낳아보지도 않고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홀몸으로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고아원 원장이나 부모님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자랐지만 노인분들을 자신의 부모님처럼 모시며 봉사하고 자신의 일생을 바친 이들이 모두 가식적이거나 그저 껍데기로만 그런 행동을 보일 뿐 진정성이라고는 없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본래 공자의 가르침대로라면, 부모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홀로 자란 것이 마음의 한이 되어 더욱 모든 어르신들을 자신의 부모님이라 여기며 정성을 다하는 이의 마음이야말로 사람이 배우는 이유이고, 그 배움이 실천에 묻어 나오는 것이기에 오히려 이런 경우는 권장해야 할 모범인 셈이다.


그러나 죽음을 고찰하기 위해 죽어볼 수 없고 독약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독약을 먹어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경험하고 깨달을 수는 없기에 사람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또 다른 이유는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바가 잘못인지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그 기본이자 기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배우고 익혔다고 하는 이들이 실제로 자신이 그 경우에 당하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하는 아쉬움을 완곡하지만 묵직한 일갈로 지적하고 있다. 왜 책에서 배우고 익혔음에도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가에 대한 일갈은 공자의 시대에서 증자(曾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그러한 근본적인 인간의 사특한 본성은 내내 사회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고 나만을 위해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주던 부모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해 버리게 되는 것이 지극한 불효의 시작을 잉태한다. 물론 그것은 내 자식만 이뻐하는 부모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해서 스스로 자초한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기 전에 인간으로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은 부모에게서 모두 배운다는 점을 공자가 내내 강조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훌륭한 부모에게서 훌륭한 가정교육이 나오고 당연히 그 자식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 모두가 경성제대 출신의 전문직을 가지고 해당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이들의 경우에 그들의 자식이 역시 명불허전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받아 훌륭한 경우를 우리는 이제까지 지극히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돈이 많다고 해서 풍족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배경으로 제대로 된 밥상머리 교육을 했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부와 명예가 대물림되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가 건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사회심리학적인 견해를 적극적으로 참고하지 않더라도 기존의 사회에서 경제력만을 계승하려던 1차적인 욕심에서 이제는 그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자체를 만들어줄 수 있는 다각적인 승계방식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자수성가하여 재벌이 된 1세대의 한국형 재벌구조에서 2세대가 ‘재벌 2세’라는 타이틀로 부족한 것도 없이 그 기업을 그대로 승계하여 몸집불리기를 했다면, 이제 재벌 3세라고 하는 이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기업을 ‘그저’ 물려줄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새롭게 권력의 승계를 하기 위해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자신은 어렵게 공부해서 외교관으로, 의사로, 판검사로, 변호사로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경험해 본 결과, 역시 자신이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직업을 계승하게 하고 그 사회적 인맥과 배경 등을 그대로 승계해 주려는 단순무식한(?) 시도를 위해 치전원, 의전원, 로스쿨 등이 등장하였고 심지어 외무고시가 폐지되고 특별채용이라는 자기 자식의 맞춤 채용방식으로까지 틀어가며 그들은 자기 자식들이 자신이 가진 직업을 갖게 하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여왔다.


실제로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안 좋은 머리와 성적 때문에 언감생심 꿈꿀 수 없었던 그들의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부모가 있는 외교부나 기재부에 입성했고, 성적이 되지 않아 의대에 입학하지 못하더라도 편입의 형태로 어떻게 해서든 머리를 욱여넣으며 부모가 마련한 특별석에 기어들어갔다.


문제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진화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더 극대화하고 자신들의 부가 자신들의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더 확대 재생산되기를 바라며 자기 자식들에게 맞지도 않는 옷을 맞춰주겠다며 품앗이(?)를 통해 능력도 부족해서 웬만한 로펌에도 들어가지 못할 성적의 친구 자식을 서로 각자의 로펌에서 받아주며 더 능력 있는 흙수저들이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도록 강요(?)한다.

딸의 불법채용문제로 장관직 사퇴한 초유의 사태 주인공

외교관의 자식이라고 아예 대놓고 공시하며 마치 선택받은 이들인 양 자기 자식이 해외 공관의 거친 교민들의 민원이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대놓고 민원담당 경력직이라는 특수직까지 만들어 자기 자식들은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노다거리며 자신의 전철을 밟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모사랑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잘못이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런 자리에 오른다면 당연히 자기 자식을 위해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어 온 망국(亡國)의 지름길임을 과연 당신들이 배우지 않아 모른다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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