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은 仁한 이가 적다.”
이 장은 워낙 유명한 사자성어, 교언영색(巧言令色)이 탄생한 장이다. 가르침의 핵심은 인(仁)이라는 개념을 배우는 자들의 목표지향점으로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내실 없이 말만 잘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태도에 대한 호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내용은 뒤에 나오는 ‘양화(陽貨) 편’의 17장에도 그대로 중복편집되어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편집과정에서의 실수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유명한 사자성어에 대한 해설을 주자는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巧(교)’는 아름다움이요, ‘令(영)’은 잘함(좋게 함)이다. 그 말을 아름답게(듣기 좋게) 하고 그 얼굴빛을 좋게 하여 외면에 꾸미기를 지극히 해서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인욕이 멋대로 펴져서 본심의 덕이 없어질 것이다. 성인(공자)은 말씀이 박절하지 않아서 오로지 적다고만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인한 자가〉 절대로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너무도 유명해서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논어(論語)>의 첫 장에서부터 명확하게 확인한 바 있다. 이 장의 내용도 그렇다. 예컨대 아주 간단한 문법적인 사항만 살펴보더라도 그러하다. 鮮矣仁(선의인)은 仁鮮矣(인선의)를 뒤집어 말해서 뜻을 강조한 것인데 굳이 ‘없다’라 표현하지 않고 ‘드물다.’ 혹은 ‘거의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鮮(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巧言令色하는 이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드물다’라고 한 이유는 그 행위 자체를 죄악이라고 판단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공자의 냉철한 판단에 의한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정치나 외교의 장에서 巧言令色의 태도는 필요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내가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날뿐더러 정치나 외교적인 실익을 얻지 못하는 실수로 귀착될 여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논어(論語)>의 다른 곳에서도 “巧言令色으로 지나치게 공손한 것을 左丘明(좌구명)이 부끄럽게 생각했었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여 기본적으로는 巧言令色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인 성정을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이익을 위해 연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인(仁)을 추구하는 군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라는 점에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은 남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짓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점에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巧言令色에 대한 공자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尙書(상서)> 즉 <서경(書經)>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유명한 사자성어인 것과는 별개로, 이 장의 가르침에서 방점은 바로 뒤에 툭 던져진 ‘인(仁)’에 있다. ‘인(仁)’은 <논어(論語)>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대표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仁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을 가리키되, 공자는 仁을 그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정의했다. 여기서는 ‘다른 이를 대하는 진실된 마음’ 정도의 의미로 풀이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을 정리하면서 핵심용어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교언영색이 인(仁)이 아님을 안다면 인(仁)을 알 것이다.”
정치나 외교를 함에 있어 교언영색(巧言令色)이 필요악이기에 절대적으로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결코 인(仁)이 될 수 없다는 설명에 이어, 마지막 주석에서는 그것이 인(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은 그야말로 반증을 통해 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仁)의 기본적인 성향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교언영색(巧言令色)이 그 반대되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진솔한 감정과 다른 연기를 통해 상대방에게 아첨하는 행위가 결코 인(仁)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은, 정말로 불가피한 정치나 외교 따위의 예외를 별론으로 하고, 일반적으로 타인을 대함에 있어 진솔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仁)의 기본이라고 강조한 것이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강조하려는 가르침이다.
‘도대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까?’라고 떠들어대는 수많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 이 장은, 아주 간단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인(仁)의 시작이라고 일러주고 있다.
그 설명의 사례로 든, 말을 꾸며대고 얼굴색을 꾸미는 것이 인(仁)을 해치는 것임을 보여준 것은 실제로 인(仁)을 행하는 이보다 그렇지 못한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점은 지금은 물론이고 수천 년 전의 공자의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큰 의문점이 생긴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꾸미지 않고 상대방에게 진솔하게 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과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에 찌들지 않았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보면 그 점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은 맛있는 것을 먹으면 흥에 겨워 춤을 춘다. 누가 춤을 가르쳐준 적도 없고 즐겁고 행복하면 춤을 추라고 일러주지 않았지만, 맛있는 것이 입안에 가득 차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행복하게 둠짓둠짓 몸사위를 보여준다.
맛있는 것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보면 방긋 웃는다. 자신에게 무섭게 대하거나 언행이 거칠고 공포감을 유발하는 사람을 보면 울거나 도망친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이들이 하는 것과 같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면 인(仁)이 완성되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못생긴 사람을 보면 못생겼다고 얼굴을 찌푸리며 타박하고, 비싸고 좋은 물건을 보면 무조건 나도 갖고 싶다고 떼를 쓰고 길바닥에 누워버리는 것이 인(仁)의 출발점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장에서 말하는 상대에게 진솔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자세는 어떻게 하라가 아닌 이렇게 하는 것만은 안된다라는 반대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언제 말을 꾸미고 언제 얼굴빛을 꾸미던가? 내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진정으로 그렇게 연기하는 것이니 그것도 진솔된 마음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사리사욕에 대한 그릇된 욕정 또한 진솔하다면 진솔한 사특한 인간의 본능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기본적인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자의 오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사리사욕을 탐하는 마음 자체를 표현하는 어구가 아니라 그 사리사욕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실제로 상대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런 ‘척’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는 ‘행위’ 자체를 지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부귀영화를 내 것으로 빼앗기 위해 그녀의 마음에 들어보겠다고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며 아첨하고 아양을 떠는 것이 바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인 것이다. 그가 하는 행위가 꼴 보기가 싫을 정도로 잘못되었지만 내 인사권을 쥐고 있고 내 근무평점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속이 뒤틀릴 정도로 싫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고 없는 칭찬을 만들어서 하고 그의 수발을 즐거운 듯이 들어주는 것이 바로 인(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리 떨어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은,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자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이미 그 대상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알량한 권력, 혹은 내가 점유하고 있는 그 대단치도 않은 지위에 나를 갑(甲)으로 인식하고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있는 을(乙)이 내게 친한 척을 하고 실제 마음과는 상관없이 말을 꾸미고 얼굴빛을 꾸민다는 사실을 나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을(乙)들의 그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아주 잘 알고 있게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나 역시 어느 순간 그들의 위치에서 또 다른 내가 잘 보여야만 하는 갑(甲)에게 교언영색(巧言令色)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인(仁) 하지 않은 것까지 형이상학적인 경지를 논하지 않더라도 내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을 알면서 사람들은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 이유 역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이 당장의 내 귀와 눈에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예쁘지 않더라도 내게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으면 하는 그릇된 본성이 그와 같은 블랙코미디 상황을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뭇사람들은 말한다.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결국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익숙해져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원만하게 맺는 것이라고. 원만한 사회생활이 슬기로운 사회생활인지에 대한 등식이 성립하는가에 대한 부분에 있어 나는 늘 동의하지 못하는 편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원만함을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내가 예쁘지 않은데, 그저 밑도 끝도 없이 ‘예쁘세요’라고 말하는 자를 경계하고 그가 어떤 사특한 목적을 바라길래 그런 언행을 하는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원만함을 모두에게 강요한다.
누가 들어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식민지 발음의 영어로 되나 가나 떠들어 클라이언트가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그가 사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영어회화 실력이 출중하기 그지없다고 입에 발린 소리로 손을 비벼대는 자가 있다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기 전에 사장 아들이 당장 화를 내며 ‘너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냐?’라고 다시는 그런 같잖은 아첨을 떨지 말라고 선을 긋는다면 그의 영어실력은 부족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정상적인 부하직원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조직을 건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백번 가르치는 것보다 그런 언행을 보이는 자들에게 그 대상이 되는 윗사람이 ‘그런 언행을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깨닫게 해주는 단 한 번의 계기가, 두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이후의 발전적인 양상을 위해 훨씬 더 나음을 우리는 결코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좋은 게 좋은 거고,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로에게 기분 좋은 말을 던져주고 그렇게 분위기가 좋아진다면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그것이야말로 원만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편 중에 하나라고 그들은 암묵적 동의를 통한 공범을 양산해 낸다.
엄청난 거짓말과 사기행위는 어느 순간 갑자기 펑하고 터져 나오지 않는다. 모든 큰 사고의 시작은 작고 사소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용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 했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어느 순간, 그러니까 조금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그에게 필요가치가 없어지는 순간, 그가 이제까지의 탈을 벗어버리고 본색을 드러내는 그 순간, 나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 또한 사회생활의 일면이고 그 냉혹함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개똥철학을 읊어대고 싶은가? 아니다.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나부터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경고인 것이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제 배를 불리겠다고 떠들어대면서 4년에 한 번 길거리에서 배기가스 마셔가며 목이 쉬어 인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과 당선 이후 민원인 따위와 독대하는 국회의원은 없다며 거들먹거리는 이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신 역시 모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바보같이 그에게 또 표를 던져주는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은 당신이 문제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