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하루에 세 가지나 반성할 필요까지도 없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曾子가 말씀하였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나의 몸을 살피노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 朋友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 傳受받은 것을 익히지 못할까 함이다.”
이 장은 증자(曾子)의 말로, 공자의 가르침을 대물림하고 있다. 긴 <논어> 칼럼을 책으로 엮은 모 교수가 이 장을 해설하며 뜬금없이, 공자가 아닌 공자의 제자의 가르침도 <논어>에 실려 있다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제자의 가르침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유자(有子)로 시작하는 유약(有若)의 언급이 버젓이 있었기에 행여 그의 실수를 인용하며 잘난 척하려다가 망신당하는 일을 벌이지 않기를 바란다.
증자(曾子)는 그 이름을 흔히 ‘증삼(曾參)’이라고 읽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한국어 독음으로 고문을 가르쳐왔던 선생님들의 입에 굳어져버려 그렇게 읽기는 하지만, 한자 고증학의 입장에서 명확하게 그 발음을 확인하자면, 참(驂)의 부수를 사용하기에 ‘참’이라 발음하는 것이 옳다.
굳이 이 유명한 내용의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증자(曾子)의 오리지널이 아닌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 표현한 것은 <논어(論語)>의 첫 번째 편인 이 ‘학이(學而) 편’이 갖는 특성이, 왜 공부하는지 배우는 자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아주 긴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기 위함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야 하길래 하루에 세 번이나 반성을 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 반성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이니, 이름은 參(참)이고 자는 子輿(자여)이다.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을 ‘忠(충)’이라 이르고, 성실히 하는 것을 ‘信(신)’이라 이른다. ‘傳(전)’은 스승에게 전수받음을 말하고, ‘習(습)’은 자기 몸에 익숙히 함을 말한다. 증자가 이 세 가지로써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여, 이런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서 자신을 다스림에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이와 같으셨으니, 학문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그리고 세 가지의 순서는 또 충 · 신으로서 傳習(전습)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
증자(曾子)는 공자보다 46세나 어렸던 제자로, 비록 공문십철(孔門十哲)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명나라 대에는 학자들에게 그 위상이 안회(顔回)를 능가할 정도로 높게 인정된 인물이었다. 그런 증자(曾子)가 하루에 무려 세 번이나 반성한다는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라는 것은 상황부터가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왜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후대 학설 중에는 이 부분을 당연히 남이 아니라 군주로 해석하여 군주를 위해서 공무를 행함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는가로 해석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단순히 그 한 가지만이라면 군주에게 간택되어 등용된 이가 아니라면 이 부분이 해당할 수 없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역시 그 의미의 외연은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위 주석에서 ‘충(忠)’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을 다한다는 설명조차도 처음 의아함을 해소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도대체 그 마음을 다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슨 일을 도모하든 간에 성심(誠心)으로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제이다. 그런데 대개의 일은 사람과 엮여 있다. 때문에 여기서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공부했던 내용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경계하고 권계에 마지않았던 인(仁)의 시작점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무슨 일을 함에 있어 그 일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내 진솔한 마음을 다해 보여주고 전달하는 것이 인(仁)의 기본요건에 해당된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이어지는 항목에서 ‘朋友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라는 내용이 이어진 것이다. ‘성실하게 사귄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는 바로 앞 장에서부터 강조되었고 첫 번째 항목에서도 강화되었던 다른 이를 대함에 있어 내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고 보였는가에 대한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내 마음과 다른 의도로 상대를 속이고 기만하고 없는 말을 꾸며대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자신을 수양함에 있어 그것은 독(毒)이 되는 요소임을 경계한 것이다.
마지막 항목의 ‘傳受받은 것을 익히지 못할까를 반성한다’는 내용은 명확해 보이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이설(異說)이 제법 있는 부분이다. 예컨대, ‘익히지 않은 것을 전해 주지는 않았는가?’라는 해석도 있는데, 이는 남에게 전해 주고자 한다면 자신이 먼저 제대로 익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설명이다. 이러한 이설(異說)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로는 ‘스승께 받은 것을 내가 제대로 온전히 익히지 않았는가?’로 풀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 세 가지 반성의 내용은 충(忠)과 신(信)이 기반이 되어야 전습(傳習)을 완성할 수 있다는 구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얼핏 보면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원시유학의 수양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이 인격주체의 자기 성찰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결국 가장 마지막에 제대로 공부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물론 기본적인 지식측면의 공부를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굳이 그 앞에 충(忠)과 신(信)의 설명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준 것은 그 두 가지야 말로 공부를 제대로 익혀내는데 필요한 것이고, 그렇기에 공자가 가르침을 내려주었던 부분에서 지식적인 것은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1차적인 것이고 그 완성은 그 가르침을 실천으로 이어나갔는가 하는 점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유학에서 인격 주체의 자기 성찰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에서 언급된 ‘反求諸己(도리어 내게서 그 잘못된 원인을 찾는다)’는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은 <대학(大學)>에 인용된 탕(湯) 임금의 세숫대야에 새겨져 있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연계되어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그 의미를 파악한 윤 씨(尹焞(윤돈))는 배우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이 점을 풀이해 준다.
“증자는 지킴이 요약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반드시 자신에게서 구하신 것이다.”
공자보다 46살이나 어려 제대로 직속 제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애매한(?) 증자(曾子)의 가르침이 왜 ‘학이(學而) 편’의 전반부에 실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사 씨(謝良佐(사량좌))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하며 설명한다.
“여러 제자들의 학문이 모두 성인(공자)에게서 나왔으나 그 뒤에 공자와 시간적으로 멀어질수록 더욱 그 참을 잃었는데, 유독 증자의 학문만은 오로지 내면에 마음을 썼다. 그러므로 전수함에 병폐가 없었으니,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에게서 관찰하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애석하다! 그 아름다운 말씀과 좋은 행실이 세상에 다 전해지지 못함이여! 그 다행히 남아있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배우는 자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성(反省)’은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할 수 있는 고급 수양 행위에 하나이다. 첫 번째 반성을 위한 기본 조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돌이켜 다음에 그런 실수를 또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앞에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는데, 또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한들 그것을 다시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없지 않은가?
두 번째 반성을 위한 기본 조건은, 그 원인의 분석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먼저 찾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잘못의 원인도 관련되어 있는 다른 타인에게 탓을 하기 전에 그 책임소재의 가장 큰 부분이 나에게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시비(是非)를 구분할 때 철저하게 다른 사람의 잘못만으로 규정짓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발생한다. 설사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말도 안 되는 비리를 상대가 저질러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시비(是非)를 따지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 원인을 분석하다 보면, 그 잘못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온전히 벌어진 것이 아닌 진실을 마주할 때가 많다.
원죄(原罪) 론을 빗대자면, 이제까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외면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며 방관했던 탓에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자신이 일조하지 않았다고 당당할 수만도 없지 않느냐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래된 명작영화 <빠삐용>에서 왜 자신이 이렇게 억울하게 잡혀 있어야만 하냐는 주인공의 항변에, ‘너의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지적에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그 영화가 갖는 철학적 행간의 깊이가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일이 잘못되거나 내가 곤란한 일을 겪게 되거나 낭패를 마주하고 나서야 반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람이다. 매일같이 세 가지나 반성하라는 이 장의 가르침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공부하고 수양하고 실천하는 배우는 자들에게 있어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증자는 이 장에서 다시 되묻고 있다.
내가 부조리하다고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살면서 접하게 될 때마다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것을 바로잡겠다고 적지 않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상대를 지적하고 힐난하고 혼내면서 일을 바로잡는다고는 하지만, 매번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지자체 공무원, 경찰, 의사, 병원 관계자, 보험회사 직원 등등은 모두가 우리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고 친구들이며 옆집 사람들임을 확인하고 더 큰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들은 정치인이나 법비들이 더 큰돈을 뒤에서 해 먹으려다가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입에 침을 튀겨가며 욕설을 아낌없이 던진 이들이었고, 군바리의 딸이 듣보잡 인물에게 모종의 관계를 맺어 국정농단을 했다고 했을 때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섰던 이들이었으며, 정인이가 입양된 부모에게 죽음을 당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 SNS에 ‘정인아 미안해’로 도배를 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시민이라고 인지하고 썩어빠져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정치판의 똥물을 뒤집어쓰고 권위를 누리는 정치꾼들이나 그 언저리의 법비들이나 고위공직자들을 보면서 욕을 하면서도 그들을 부러워하는 양가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들이었다.
문제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무리에 속해있는 그들이 곳곳에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혹은 그것도 업무 과중이니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덮어주고 조작하며 조금씩 조금씩 보이지 않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회를 좀 먹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래 허가해 주어서는 안 되는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팀장이 그렇게 명령하고, 다들 그렇게 일처리를 해왔으며, 자신이 혼자서 그 업무를 거부하고 바른 소리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고, 도리어 자신이 별종 취급을 받으며 무리에서 배척당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그 조직과 사회는 무너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리고 자기 부모와 자식이 그런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고 사고를 당해야만 깨닫게 된다.
아니, 그나마 자신이 겪은 사고와 불행이 자신의 안일함과 범죄공조로 인한 결과물인 것을 깨닫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낫다. 끝까지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고, 죄수복을 입고 호송차에 실리고 나서도 자신은 억울하다고 다들 그러는데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항변하는 웃픈 블랙 코미디를 찍어대며 반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한국의 카페에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두고 자리를 비우더라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만 보더라도 한국사회의 도덕성을 증명하는 사례라며 포장만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온통 CCTV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기에 함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는 바로 경찰에 끌려가기 때문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인정하길 바란다. 반성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하는 것일 때 그 가치가 빛난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