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효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그(아들)의 뜻을 관찰할 것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하니, 3년을 아버지의 道를 고침이 없어야 孝라고 이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공자의 효 사상이 갖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일반에 알려져(?) 있다. 굳이 내가 물음표를 섞어 의구심을 표한 것은, 수많은 <논어>의 현대 해설서들에 대해 딴지를 걸려는 것은 아니나, 그저 공자가 부모님의 뜻을 무조건으로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도 따르는 것이 효도인 것인 양 해석하고 풀이한 책들로만 이 장을 오독(誤讀)했을 이들에게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라고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원문의 해석에도 반영하긴 했지만, 원문에서 ‘其’라고 한 것은 모두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여 그 기본적인 대명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부터 헷갈린다면 이 장을 이해하는 시작부터 삐걱거릴 수 있을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먼저 주자가 이 장의 의미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를 참고하여 과연 공자의 효사상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의문을 어떻게 풀 것인지를 고민해 보기로 하자.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자식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뜻은 알 수 있고, 아버지가 별세한 뒤에야 그 행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관찰하면 충분히 그 사람(아들)의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반드시 3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말아야 효성스러움을 볼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다면 행한 것이 비록 선하더라도 또한 효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자가 가리키는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눈치챘는가?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이 장의 가르침은 진정한 효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데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는 잣대로 효(孝)를 가지고 온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멋대로 할 수 없는 실질적인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찾을 수 없다는 시작 문장이 바로 이 장의 전제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에는 아버지의 주도가 아닌 자신의 뜻대로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계실 때의 자식이 보이는 행동과 달라지는 바를 통해 그의 본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뒤이어 시묘살이를 하는 3년간의 기간만이라도 아버지가 행했던 바를 함부로 바꾸거나 바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전횡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마무리를 지어 효가 갖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이 장의 의미는 단순히 기존의 현대해설서에서 강조했던 효 사상에 대한 강조가 아닌, 부모님에 대한 효를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통해 그의 사람됨을 볼 수 있다는 조금은 더 큰 내용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부모님에게 효를 하는 진정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것을 기반전제로 하되, 그것을 제대로 행하는 자라면 그의 사람됨을 믿고 다른 일(다스림)을 맡길 수 있으니 중용해도 될만하다는 등용의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왜 정치적인 능력이나 학문의 뛰어난 성과로 보지 않고 그가 제대로 효를 구현하고 있는지를 통해 평가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을 당연히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의 뜻이 지향하는 바를 살피고 그의 행동하는 바를 살펴야만 한다. 그것을 고문(古文)에서는 이 장의 의미에서 따와서 ‘관지관행(觀志觀行)’이라 부른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조차 행동을 관찰할 수는 없으나 그의 뜻을 살핀다는 말도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부모님의 방식과 의지에 진정한 마음으로 따르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뜻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말인데, 이것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선한 경우에라도 그의 마음이 그것을 진정으로 동조하지 않고 그저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서 따르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부모님의 방식이 옳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따르더라도 그것을 마지못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뜻을 표하는지를 살펴 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3년이 지나도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말한 부분은 뒤에 공부하게 될 ‘이인(里仁) 편’의 20장에 원문의 표현이 그대로 반복되어 언급된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유교로 변질되면서 정치논리의 도구로 전락하여 어설프게 주워들은 자들은 공자의 효사상을 고리타분하고 형식만을 강조한 것이라 폄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 역시 본래의 의미는 부모의 뜻이 잘못되었더라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이 설명은, 부모님의 방식이 옳은 것이라면 그대로 따르고 더 발전시키면 그뿐이겠으나 만약 잘못된 것임이 명확하다는 판단이 들 경우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는 가르침이다. 설사 부모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잘못되었다는 객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가 어느 한 가지 이유나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듯이 부모님이 왜 그렇게 결정하고 행동하셨는지에 대한 판단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실관계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년의 시묘살이를 하는 기간, 부모님이 돌아가심을 추도하고 그 뜻을 기리는 기간만이라도 충분히 그것을 바꾸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유보기간을 두고 고려하고 또 고려하라는 배려의 마음이 바로 이 설명의 핵심이다.
전혀 피가 섞여있지 않은 남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라고 단칼에 판단을 내리고 그의 면전에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며 종국에는 본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의도조차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단순한 예의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잘못된 행위나 생각에 대해 교정하고 더 바른 것으로 수정하고 나아가기 위함이 상대를 공격하거나 상대를 면박주기 위함이 아님을 고려한다면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며 배려하거나 그 과정이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더라도 기다려주는 것은 상당히 고급화된 설득과 자기 수양의 방식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남도 아닌, 그 대상이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며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 부모님이라면 그것은 더 일러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공자가 나 아닌 타인을 대함에 있어 강조에 마지않은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의 가르침은 결국 효(孝)에는 물론이고 충(忠)에도 그리고 그 모든 예법의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알 수 있다.
내가 자식이었을 때는 부모님의 판단이 왜 그런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고 효율적이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 모르겠고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지만, 내가 자식을 낳고 부모의 입장이 되었을 때 내 자식이 나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늙은 퇴물 취급을 하며 무시하는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젊어서 자식의 입장에서 자신이 부모에게 했던 불효(不孝)로 인해 부모님이 느끼셨을 당혹감과 서운함을 몇 배의 이자를 쳐서 스스로 겪고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의미를 정리한다.
“(아버지가 하신 것이) 만일 도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비록 종신토록 고치지 않더라도 가하거니와(괜찮지만), 만일 도리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3년을 기다리겠는가. 그렇다면 3년 동안 고치지 말라는 것은 효자의 마음에 차마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위 주석의 핵심은, 그것이 논리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부분임을 따지기 전에 (효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공자는 단 한 번도 부모가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고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말한 적이 없다. 바로 모셔야 할 대상이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은 배운 자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던 공자가 부모님이라는 이유로 혹은 군주라는 이유로 예외를 두었다는 궤변은 공자의 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식 오독(誤讀) 일뿐이다.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효(孝)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간언(諫言)해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와 방식, 그리고 과정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고 설명한 것뿐이다.
그래서 그 미묘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유 씨(游酢(유초))는 다음과 같이 배우는 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3년 동안 고치지 말라는 것은 또한 마땅히 고쳐야 할 입장(대상)에 있으나 아직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이 설명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물론, 배운 자가 보여야 할 솔선수범으로 그 외연이 확장된다. 배운 자보다 배우지 못한 백성이 많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공자가 강조했던 진정한 백성을 돌봄은 그들이 겨를이 없어 배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이끄는 이들이 보이는 실천을 통해 배우고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교화라고 하였다.
알량한 지식을 몇 가지 습득하여 좋은 대학을 들어가거나 시험에 통과하여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부모의 마음을 운운하며 능력 없는 자기 자식들을 공정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 취직시키고 더 나은 학벌로 갈아타게 하는 일이 사회 곳곳에서 툭툭 터져 나오기 시작해서 이제는 그것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능력이 안 되는 자식을 의사로, 법조인으로 만들기 위해 스펙을 쌓는데 부모의 부와 지위가 정비례의 능력치로 작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그다지 대단한 공직이라고도 보기 어려운 선관위라는 곳에서 벌어진 모럴해저드는 온갖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공기업이나 심지어 금융권, 사기업에서는 대놓고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방증해 준다.
내가 가장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일을 벌인 몰지각한 자들이나 자기 아내가 감옥에 들어가고 자신조차 실형을 받고서도 자기 자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자가 없다고 당당하게 떠드는 자가 아니다. 그들의 친구, 지인, 혹은 그 혜택을 직접 받은 무능력한 자식들의 곁에서 그들의 불공정한 선발과정을 지켜보고 대략적으로나마 그 사실을 알았던 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암묵적 동조를 넘어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면접 만점을 주고 해당 스펙을 만들어주었던 적극적인 공범들이다.
장관이었던 자가, 그리고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멀쩡하게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능력 없는 자식을 꽂아준 것에 대해서는 흥분하며 게거품을 물고 육두문자를 내뱉는 당신이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자의 자식이 경력직으로 면접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걱정하지 말라며 생각 없이 만점을 턱턱 주고서, 자신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고 사회가 더 나은 올바름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자라며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었던 사진을 SNS에 올리며 자위하고 있는 그 가식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의 아버지가 대학교수이자 병원장이니 의대에 입학하지도 못할 성적을 가지고서도 다른 학과를 경유해서 편입을 해서 그 기회를 잡는다는 것이 정상적이지 못한 것을 과연 그 곁의 동료 교수들이나 레지던트나 병원의 직원들이 정말로 몰랐을까? 검찰이 잘못된 공권력을 제 권력인 양 휘두른다며 검찰개혁을 외치는 법조인이라는 자가 그저 같은 진영이고 지인이니 그 능력 없는 자식을 끌어올려 의사나 법조인을 만들기 위한 스펙을 만들어주는 것은 대단한 범죄가 아니라며 흔쾌히 그 범죄에 동조한 것이 어떻게 용인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그들이 아니라고, 그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그 행동들은 실상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행동은 정당화되어 다들 그러는데 뭐 그렇게 큰 일이라며 덮으려 들고, 다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는 용납할 수 없는 도덕적 해이라며 집중포화로 공격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산물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