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고 평가절하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有子가 말하였다. “禮의 用은 和가 귀함이 되니, 先王의 道는 이것이 아름다움이 된다. 그리하여 작은 일과 큰일에 모두 이것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和를 알아서 和만 하고 禮로써 節制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다시 앞에서 등장했던 유자(有子), 즉 자약(子若)의 말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 중에서도 예(禮)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논어(論語)>의 글 하나하나가 그 그러하기는 하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 놓는다고 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 장은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일단 용어부터가 모두 이해된다는 전제하에 설명한 것이기에 용(用)은 무엇인지, 그리고 화(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왜 뜬금없이 선왕(先王)의 도를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가장 핵심적인, 마무리 문장에서 말하는 화(和)와 예(禮)의 상관관계가 어떻다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글을 직역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이런 가르침이 나왔는지를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먼저 개념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상세히 풀이해 놓은 주자의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는 천리의 節文(절문; 品節文章(품절문장))이요 人事(인사)의 儀則(의칙)이다. ‘和(화)’는 종용하여 급박하지 않은 뜻이다. 예의 體(체)됨은 비록 엄하나 모두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 用(용)됨은 반드시 종용하여 급박하지 않아야 귀할 만한 것이 된다. 선왕의 도는 이것이 그 아름다움이 되어서 작은 일과 큰일에 이것(和(화))을 말미암지(따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위 주석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용(用)이라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체(體)라는 상대개념이 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중국철학에서 말하는 이 체(體)와 용(用)에 대해서는 이 한정된 오늘의 공부에 모두 담아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간략하게 그 성향에 대한 것만 설명하기로 한다.
체(體)라는 것은 뼈대가 되는 형식이고 외형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당연히 이미 형성이 되어 있는 것이기에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용(用)은 체(體)의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하나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데, 항상 변화하면서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범위를 가리킨다. 시간의 순서를 따져보자면, 용(用)은 체(體)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 형체를 갖추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상황과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내 의지를 가지고 어떻게 바꿀 수 없는 것들, 천부적인 것들이나 이미 그렇게 형성된 것들을 체(體)에 해당한다고 하고, 내가 마음을 먹기만 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이 용(用)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면 그 성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주자는 위 주석에서 예(禮)를 규정하면서 ‘천리(天理)의 節文(절문; 品節文章(품절문장))이요 人事(인사)의 儀則(의칙)’이라고 모든 천라만상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강하게 못 박아 힘주어 설명하였다. 이는 단순히 공자의 예(禮)에 대한 강조를 존숭 하는 의미에서 강조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禮)의 의미를 단순한 허례허식이나 고리타분한 것으로만 여기는 어설프게 배운자들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편견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예(禮)는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무형의 형태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 이전의 상식이고 근간이다. 조직을 구성하는 이들 사이에 있어야 할 약속에 해당하는 질서가 무너져버리게 되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예(禮)는 법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이전에 사람들 간의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 같은 것에서 시작되어 그 성향이 엄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禮)는 어기거나 잘못했을 때 처벌하는 법과는 그 성향이 다르다. 즉, 본래 규정하고 규제하는 것이기에 예가 엄격한 성향을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엄격하기만 해서는 법과 구별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래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약속까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원문에서 화(和)를 어설픈 ‘조화(調和)’따위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일러주기 위해 주자는 그것이 ‘종용하여 급박하지 않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 설명하였다. 법은 강제성을 기본으로 하는데 예(禮)가 왜 법과 구별되는지에 대해서 그저 엄숙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일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화(和)의 개념으로 다시 풀이해 준 것이다.
<예기(禮記)>의 ‘유행(儒行) 편’에서 “禮之以和爲貴(예를 행하는 것은 화(和)를 귀하게 여긴다 )”라는 설명은 바로 이 장의 의미를 부연해 준다. 원문의 ‘小大(소대)’를 주자는 ‘작은 일과 큰일(小事大事)’이라고 풀이하였는데, 다산(茶山; 정약용)은 ‘上下(상하)의 계급적 의미 즉 천자, 제후, 대부, 선비’를 이른다고 풀이하여 약간의 입장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오독(誤讀) 하지 않고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마지막 문장을 배치한 것이다. 和를 강조하되, 和만 강조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禮로써 節制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행할 수 없는 것이라는 설명인데, 자칫 예(禮)를 적용하는 데 있어 화(和)가 강조된 것이라고 막연하게 오독(誤讀)했던 이들이라면 당혹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화(和)로 경도되지 않도록 예(禮)로 절제해야 한다는 설명은 예(禮)가 대상이 아닌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을 초심자들을 위해 왜 유자(有子)가 이 마지막 문장을 넣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인 풀이도 다시 환기시켜주고 있다.
윗글을 이어 말씀하기를 “이와 같은데도 다시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다만 和(화)가 귀하다는 것을 알아서 和(화)에만 한결같이 하고, 다시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다시 예의 본연이 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흐르고 방탕하여 돌아올 것을 잊어서 또한 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禮)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가진 현대인들은 예(禮)가 그저 나이 많은 사람, 혹은 윗사람이라 불리는 꼰대들의 도구정도로만 오해한다. 하지만, 공자가 유자(有子)를 비롯한 뭇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던 진정한 예(禮)의 본질은 일방적인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절대 도구도 기준도 아님을 우리는 이 장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본래 공자가 강조했던 예(禮)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만큼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존중해 주는 상호적인 소통의 감정이고 교류인 것이지 결코 단방향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님을 유자(有子)는 이 장을 통해 다시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원문에서 다소 뜬금없이 등장했던 선왕(先王)의 도(道)가 왜 언급되었는지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예가 치우치면 支離(지리)해진다. 그러므로 예의 用(용)은 和(화)가 귀함이 되니, 선왕의 도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서 작은 일과 큰 일에 모두 이것을 따른 것이다. 樂(락)이 치우치면 방탕한 데로 흐른다. 그러므로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和(화)를 알아서 和(화)만 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이 또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예가 발생하고 존치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본래부터 사람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생겨나면서 때로 그것이 상대방을, 인간을 억압하는 굴레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인간을 존중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만들어진 약속이 변질되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짐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심지어 힘없고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넘어서 힘 있고 위에 서 있다고 하는 자들마저도 마치 살아 움직이는 예에 속박당해 남의 눈치나 보고 자신을 속이며 사는 아이러니가 어느 순간 비일비재해지고 말았다. 공자는 이것이 예(禮)의 본질로부터 벗어나 판연히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임을 경고한다. 이것은 단언컨대 본래 원시유학에서 강조하던 예의 본질이 아니다.
예컨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들먹이던 조선시대 그 고리타분하고 허례허식으로 변질되어 버린 유교(儒敎)에서는, 여자의 정절(貞節)은 귀하다고 하면서 정작 과부의 개가(改嫁)를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이는 예의 본연(本然)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것이다. 억지로 강요하고 급하게 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며 화(和)를 귀하게 여기다가도 화(和)에만 급급하고 예로써 조절하지 않으면 예는 그 본질을 다른 의미로 또 잃고 만다.
마지막 문장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느슨하고 자유로움을 강조하며 화(和)에만 치우치면 방탕하거나 무골호인(無骨好人)이 되기 쉽고 그저 예에만 얽매이면 각박(刻薄)하고 무정(無情)한 사람이 된다는 권계이다. 형식과 내용의 조화(調和)만이 진정으로 사회적 가치를 존중하는 예의 본질이라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유자(有子)는 이 장을 통해 상세히 풀어내주었다.
그래서 그 내용의 본질을 잊지 말라며 범 씨(范祖禹(범조우))는 개념어들을 그대로 가져와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무릇 예의 體(체)는 敬(경)을 주장하고 그 用(용)은 和(화)를 귀하게 여기니, 敬(경)은 예가 확립되는 원인이요 和(화)는 樂(락)이 말미암아 생겨나는 근원이다. 有子(유자)로 말하면 예(禮) · 락(樂)의 근본을 통달했다고 이를 만하다.”
위의 여러 후대 학자들의 주석을 소개하며 주자는 마지막으로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중도(中道)를 행함에 있어 양 극단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엄하면서도 편안하고 和(화)하면서도 절제하는 것은 이것은 理(리)의 자연스러움이요 예의 전체이니, 여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그 中正(중정)을 잃어서 각각 한쪽에 치우칠 것이니, 그 행할 수 없음이 똑같은 것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함부로 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을 정한 것이 예(禮)의 근본이고 시작이었음에도 규율이 생기고, 사회적으로 절대 해서는 안될 선을 정해놓는 법이라는 것을 제정하게 되면서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그 제도나 법, 혹은 약속을 만든 사람들이 그 약속이나 시스템에 자신의 발이 엉키고 자신의 몸이 칭칭 감겨 그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한 걸음도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빠지는 꼴을 우리는 너무도 흔히 보곤 한다.
자신들이 여당일 때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든 국회 선진화법을, 자신들이 야당이 될 줄 모르고 만든 것도 아님에도 그들은 가투(街鬪) 한번 나가보지 않고서도 빠루를 들고 설치고 어설픈 스크럼까지 짜며 생쇼를 해댔더랬다. 법의 집행이 전직 판사출신의 국회의원이라고 달라진다면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어퍼컷을 쳐올려 지금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년 전에 벌어진 국회선진화법을 어긴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옳지 못한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버젓이 법원의 판사들에게 펼친다. 내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라면을 훔친 아비의 죄를 공정한 법리로 다뤄야만 한다며 판사봉을 휘둘렀던 자들이 자신들이 더 나은 부와 명예를 차지하겠다고 부나방처럼 달겨든 여의도 국회안에서 어긴, 그들이 만든 그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며 항변을 한다.
군사정권의 부정부패를 배운 자가 도저히 용납해서는 안된다며 운동권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신의 출세보다 사회를 바로잡는 것이 먼저라며 화염병을 들고 가투에 나섰던 자들은 그것을 훈장 삼아 여의도에 입성하면서 변질되어서 한참을 변해서는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의를 입으로는 떠들면서 능력 없는 제 자식에게 지위와 환경을 대물림해 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 민낯이 드러나버리며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끝까지 스스로의 잘못 보다 자신의 대의가 더 크다며 목소리를 높이려 든다.
그들의 민낯이 지저분하기 그지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 대의명분은 존재할 수 없다. 원래 썩은 놈들과 그렇지 않다고 우겼는데 속으로 곪아있던 놈들의 차이는 오십보백보인 셈이다. 당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당신이 부끄러움을 꺼내 녹슨 거울을 닦아내고 바른 길에 들어서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