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유지의무 위반의 덫 - 2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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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거실로 나오는 지우에게 동민이 물었다.
“괜찮긴 한데요. 제대로 된 답장이 왔으면 좋겠는데···”
지우도 나름대로 이제까지 보아왔던 코에 대한 안 좋은 인상과 기억이 있었기에 그녀의 반응에 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코를 만났을 그날, 사실 지우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여학생이 많은 문학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화론 연구실의 중국철학 파트에는 여학생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여학생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색한 인물들뿐이었다. 게다가 코는 그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았다. 누가 보기에도 나이가 많고 머리가 크고 배가 나오고 다리가 짧은 전형적인 중국인의 꾀죄죄한 외모에, 유행이 한참 지난 정말 중국의 촌지방스러운 패션스타일을 뽐내고 있었다. 화장이나 옷차림에 관심이 많은 지우에게 있어 그녀의 스타일은 평이고 뭐고를 하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게 빵 터진 실소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런 코에게 남편이 이렇게 굴욕적으로 상냥한 메일을 보내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자존심이 쎈 남편이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메일을 쓰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뭐라고 말을 더한다는 것은 더 못할 짓이라는 생각에 지우가 얼른 이메일의 발송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그녀에게 무슨 연락이라고 있을 것이라며 기대하고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그들 부부에게는 다시없을 곤욕이었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 한국에서 직접적으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고소인의 입장은 ‘코’였고, 그것을 조장한 것이 사토 렌코쿠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더 이상 논리적인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지우는 물론이고 동민 역시 뭔가 그를 통해 일을 바로잡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을 기다린 후에야 답장이 왔다.
“지우야. 답장 왔다.”
답장이 왔다가 말하는 동민의 표정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지우는 답장이라고 말하는 동민의 어깨뒤로 화면의 짧은 일본어를 더듬거리며 읽었다.
“이건···코한테 온 게 아니잖아요?”
박 동민님
귀하가 9월 25일(화요일)에 하라스먼트 불만고충상담자인 호군혜씨에게 메일을 발송한 것은 의장으로부터 받은 23일 자 메일에 나와있는 비밀유지의무를 부여받은 것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고소한 상담자에 대한 접촉행위이며, 본교 하라스먼트 방지규정 제13조 ‘교원, 직원 및 학생 등은 불만고충상담에 관련된 조사에의 협력과 그 외에 하라스먼트에 관한 정당한 대응을 한 자에 대하여 그 일로 인하여 불이익에 해당하는 취급을 할 수 없다’에 저촉되어 징계처분에 해당되는 행위입니다. 즉, 상담자에 대한 보복행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이 이상, 상담자와 학내관계자(지도교원과 그 밖의 학생)에게 메일이나 전화 혹은 메일 등으로 연락하거나 접촉하는 것을 엄중히 금합니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즉시 하라스먼트 상담원회의의장인 저에게 연락을 하여 의장으로부터의 사실확인과 사정정취의 일정을 협의하여 주십시오. 그것이 끝날 때까지는 문학연구과로 등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리고, 학생상담실장으로서의 저에게 상담할 수 있는 기회는 본 메일을 기점으로 없었던 일이 된다는 것을 전달하는 바입니다. 이후부터는 하라스먼트 상담원회의의장으로서만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빨리 면담날짜를 정하고 싶으므로 귀하의 일정을 미리 알려주십시오.
만일이라도 귀하가 출두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담자의 고소에만 근거하여 관계자로부터의 질의조사를 개시합니다.
하라스먼트상담원회의의장 오오하타
학생상담실장이라는 치대교수 오오하타에게서 온 거의 겁박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비밀유지의무라는 게 뭐예요?”
지우가 물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민이 설명해 주었다.
“거기 나왔었잖아. 왜 있었잖아. 이 사건에 대해 부인인 당신이나 변호사에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바로 그 항목을 말하는 거지.”
“근데 코한테 보낸 메일이 왜 비밀유지의무를 위반한 거예요?”
지우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코를 협박했다잖냐? 오오하타도 렌코쿠랑 같은 편인 놈인 거야. 이제야 생각이 났어. 당신 기억 안 나? 오오하타, 오오하타 그러길래 어디선가 들을 적이 있다 싶었는데 이제야 생각났어. 렌코쿠가 자기가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당신한테 언제든 말하면 학생상담실장이 자기가 잘 아는 교수니까 언제고 한방이면 해결된다고 너스레 떨었던 거 기억나? 그놈이 바로 오오하타였어. 어쩐지 냄새가 난다 싶었어. 지난번 메일에 다짜고짜 자퇴를 하라고 어드바이스네 뭐네 썼을 때부터 왜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러나 싶었는데 이게 렌코쿠랑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는 거였어. 그렇지 않으면 코한테 보낸 이메일을 이틀이나 있다가 다시 이런 식으로 이용하지는 못하지.”
남편의 설명을 듣자 대강 상황의 윤곽이 그림처럼 확연해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더 큰일 난 거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아군이 없네. 아주 대놓고 내쫓겠다고 작정을 했네, 이것들이.”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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