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女(설녀;유키온나) 2

납량특집 호러 판타지 멜로

by 발검무적

“이제 곧 신치토세,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까지 승객 여러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이동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웩!”

기내방송이 나오는 중에도 남자는 계속 기내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씨름 중이었다.

“여보세요. 나오세요. 괜찮으세요? 얼른 문 열어 보세요.”

문 밖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뚱뚱한 아줌마를 뒤로 하고 스튜어디스가 화장실 문을 두들기고 있다.

“에?”

“아악!”

문을 열고 반쯤 실신한 얼굴로 입가에 토사물도 제대로 닦지 못한 승복을 입은 남자가 얼굴을 내밀자 뒤에 서 있던 아줌마가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혼자서 화장실을 점거하고 뭐하시는 거예요? 이제 도착했습니다. 얼른 자리에 돌아가서 내릴 준비를 해주세요.”

스튜어디스는 오사카에서 비행기를 탈 때부터 요란스러웠던 이 젊은 스님이 못마땅한 듯이 밀쳤다.

“도저히, 도저히 걸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좀 잡아주세···”

입가의 토사물을 닦고 그녀를 잡아 의지하려던 스님의 손을 그녀가 잽싸게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나뒹굴듯 엎어진 그의 모습을 보면서 기내의 사람들이 혀를 차며 핀잔을 줬다.

“예능프로그램 찍는 것도 아니고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저런 옷을 입고 비행기를 타나?”

“시골에서 처음 홋카이도 여행이라도 오는 스님이신가?”

“쓰러져 있는 것 같아도 다 듣고 있는 것 같아요. 말조심해요. 나중에 시비라도 걸면 어쩌려구 그래요.”

사람들이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지만 몸이 도저히 자신의 몸 같지가 않았다.

띵-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정지했다는 표시로 안전벨트의 표시등이 꺼졌다. 그제사 벌레가 움직이듯 천천히 기어서 출입구까지 향했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들 손사래를 치고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 환자입니까?”

비행기 문이 열리고 지상팀이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빠진 표정이나 복장으로 봤을 때 정상인이라고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 이 상쾌한 공기! 역시 지상의 공기는, 아니, 홋카이도의 공기는 다르구만.”

갑자기 벌떡 일어서 스님이 아무런 일도 없었던 양 바랑을 다시 고쳐 매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츠마부키 사토시?”

여권을 검사받는 심사장에서 공항 세관 직원이 다시 한번 그의 얼굴과 사진을 비춰보았다. 여권 사진에 눈을 질끈 감으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엉뚱하기 그지없었다.

“네. 괜찮으시다면 소명(昭明)이라는 법명(法名)으로 불러주시겠습니까? 속명(俗名) 말고.”

“뭐하러 이곳에 오신 겁니까?”

공항 세관직원이 물었다.

“아, 그게··· 그건 말씀드리기 좀 곤란합니다.”

‘츠마부키 사토시’라고 불린 젊은 스님은 해맑기 그지없는 소년의 얼굴로 곤란한 질문은 피해 달라는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짐은 뭡니까? 이것들은 다 뭐고요?”

엑스레이에 잡힌 봐주라에서 팔괘 나침반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방을 검사하는데 이상하기 그지없는 물건들이 계속 나오자 세관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사람입니까? 츠마부키 씨?”

“아, 저는 수행승입니다. 이곳에 일이 생겼다고 해서 급하게 출장을 오느라···”

“출장이요? 그럼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신 겁니까?”

“회사요? 아, 그건 아니고요. 아, 또 그게 뭐냐··· 왜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살던 곳에서 일 때문에 이렇게 다른 지역을 오는 것을 출장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하하!”

“아무래도 저와 잠시 동행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세관직원이 정색을 하고 그의 팔을 잡자 츠마부키가 억지스러운 웃음이 일그러지며 곤란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뭔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전 그저 조용히 삿포로까지만 가면 되는데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승적증을 제시해주세요. 다른 신분증이 있으면 그걸 주시던가···”

“네?”

사무실에 끌려와서 츠마부키는 풀이 죽은 소년의 얼굴로 바랑을 끄적거리며 겨우 승적증을 꺼내 보였다. 내미는 그의 손에서 힘을 빼지 않고 그것을 받으려는 세관직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꼬옥 쥐고 있다가 기어코 빼앗기고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에? 곤고부사(金剛峯寺)에서 나오셨습니까? 연락해 봐도 되겠습니까?”

세관직원이 그의 승적증을 보고 놀라며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고야산(高野山)에서 오신 겁니까?”

“아, 네.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츠마부키는 삐진 소년처럼 세관 직원의 말에 끄덕이며 말했다.

“고야산(高野山)의 수행승께서 이곳 홋카이도에는 무슨 일로?”

“아 그러니까···”

짜증 나는 듯이 다시 츠마부키가 일어나 뭐라 말하려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실례합니다.”

그때 사무실로 머리가 짧고 몸이 다부진 남자가 들어서며 그 둘을 보았다.

“그쪽이 소명스님이시오?”

남자가 오사카 억양이 강하게 섞인 말투로 물었다.

“우와앗!”

남자의 등장에 뭔가를 보고 소스라치듯 놀라며 소명이 의자에서 뒤로 떨어졌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오버를 하는구먼.”

남자의 오사카 사투리에 소명이 바닥에서 일어나며 주춤거리고 남자를 맞았다.

“어? 동향(同鄕)이신가 보네? 칸사이(關西) 출신이세요? 제가 소명(昭明)이 맞긴 한데요. 그런데···”

“아니 기다리고 있는데 하도 오지 않아서 설마 했더니 무슨 일로 여기 잡혀 있는 겁니까?”

남자가 성큼성큼 그 둘의 앞으로 와서 소명 스님의 어깨를 퉁 치며 껄껄 웃었다. 남자의 기에 눌렸던지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의 세관직원이 남자를 제지하려다가 뒤로 퉁겨져 나왔다.

“아! 홋카이도 경시청 소속 강력계 쿠와노 형사라고 합니다. 이 양반을 마중 나온 사람인데 도무지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남자가 신분증을 제시해 보이자 세관직원이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이상한 물건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무슨 일로 이곳에 왔고 도대체 이 물건들을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아, 됐고. 이 분은 공무수행을 보조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최근 설원 살인사건 아시지요? 그 사건 관련해서 특별히 고야산(高野山)에서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자세한 것은 기밀이니 다 알려고 들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그럼 나가도록 하지요.”

쿠와노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널려진 짐들을 주섬주섬 바랑에 넣고 가방을 챙기고서는 백팩처럼 훌쩍 메고는 앞장섰다.

“안 가실 건가?”

눈치를 보고 우물쭈물하던 소명을 보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니 움찔하며 소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바로 앞에 차를 세워뒀으니 얼른 나갑시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요.”

“아, 네.”

엄청나게 큰 타이어에 껑충하게 높은 지프차가 보였다. 차에 오르는 것도 여간한 일이 아닐 듯 보였다. 겨우 기어오르듯 소명이 차에 올랐다. 차 열쇠에 달린 해골 피규어만 보더라도 쿠와노가 얼마나 터프한 사람인지는 알만했다.

“담배···, 피웁니까?”

쿠와노가 소명에게 말보로 레드를 내밀었다. 당황한 소명이 손을 내저어 보이자 덥석 담배를 물고는 과격한 드라이빙을 선보이며 빠르게 신치토세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희생자가 또 나왔다고요?”

소명이 담배를 물고 심각한 표정이 된 쿠와노에게 물었다.

“네. 도대체 어떤 변태 같은 놈인지. 일단 확실하게 말해두지만 난 요괴니 귀신이 하는 따위를 믿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경시청 본부의 윗분들이 고야산 스님들에게 이런 일에 대한 자문을 받는지도 이해가 안 가고요.”

“뭐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여간해서는 마주칠 일도 평생 없을 테구요. 그 어깨에 붙어 있는 호귀(虎鬼)도 그렇고요.”

“뭐라고 말하는 거요? 좀 알아듣게 또박또박 크게 말하면 안 되겠습니까?”

기가 죽은 사람처럼 쿠와노에게 떨어져 차창에 붙어서 창 밖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물들을 보며 소명이 말했다. 소명은 쿠와노가 처음 공항세관 사무실에 들어올 때 보았던 그에게 붙어 있는 요괴의 모습에 도저히 쿠와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쿠와노의 어깨 위에 마치 새처럼 그 커다란 몸을 걸터 세우고 앉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는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었다. 그 정도 영력을 가진 요물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친 것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너···내가 보이는 거지?”

계속해서 쿠와노의 시선을 피하는 소명에게 그것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쭈뼛거리며 다 일어나서 도저히 고개를 돌려 쿠와노 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날 볼 수 있는 수준의 인간이라니··· 어린 녀석이, 보통 땡중은 아닌가 보군. 야야! 누가 말을 걸면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아니, 전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뭐라고 아까부터 혼자 구시렁거리는 거요? 뭔 퇴마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비실대고 기운이 없어요? 괜찮은 거야?”

쿠와노가 한 손으로 툭 그를 건드렸다. 동시에 호귀의 날카로운 손가락이 소명의 몸에 닿았다.

“흐아아악~!”

달리는 차에서 문을 열고 내리려는 소명의 행동에 쿠와노가 오히려 더 놀라 핸들을 틀어 차를 세웠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죽고 싶어?”

“으아아악!”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쿠와노의 악력에 고개가 앞뒤로 흔들리던 소명이 눈을 떴을 때 쿠와노의 머리 위로 호귀가 커다란 호랑이의 얼굴을 하고는 그를 노려보며 웃는 것이 보였다.

“옴 아모····”

갑자기 팔목을 감고 있던 염주를 잡고 계속해서 염불을 외우기 시작하자 호귀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만해 시끄러워! 그만두라고~! 이런 제길! 빌어먹을 땡중 같으니라고···”

소리를 지르던 호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계속 염불을 외우던 소명이 실눈을 뜨고 앞을 보았을 때 호귀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없어졌네요. 아, 성공한 건가?”

진땀을 흘리던 소명의 얼굴을 보며 쿠와노가 뺨을 양쪽으로 때리며 물었다.

“당신 퇴마승 맞아? 정신병자 아냐? 뭐라는 거야?”

“저어, 쿠와노 씨. 평상시에 어깨가 아프다거나 몸이 무겁다거나 하는 증상이 있지 않았나요?”

“뭐?”

쿠와노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이 잠자코 있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보였나? 자네에게도, 녀석이?”

“에? 혹시 쿠와노 씨도 영적 능력이···?”

“아니. 난 그런 건 없어. 그저 감으로 느낄 뿐이지. 가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기억이 나거든. 내 안에 자리 잡고 사는 커다란 호랑이가 한 마리 있는데 나가지 못하고 나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식의 얘기.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못하지. 행여 정기 검진에서 정신분석이라도 잘못 나오는 날에는 장가도 못 가고 지금 하고 있는 이 형사 짓도 쫑 나버리고 말 테니까 말야.”

“아! 그럼 자신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인지하고서도 그저 인정하고 같이 지낸다는 말인가요? 당신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붙어 있을 리가 없는데···”

소명이 신기한 듯 쿠와노의 얼굴을 보았다. 귀신에게 정기를 빼앗기거나 귀신이 붙을 만큼 영적으로 쇠약해있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그 귀신은 말로만 듣던 수호령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호귀는 사람의 수호령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이 세계를 알고 난 이후에도 들었던 적도 어떤 경전이나 책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삿포로 시내로 들어왔어. 저쪽이 2월에 유키 마츠리가 열리는 오오도리 공원이고 여기 번화한 길이 스스키노야.”

“오호, 유키 마츠리라···”

삽화1.jpg

그때 갑자기 눈이 하나둘씩 날리는 듯하더니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날씨는 하여간 홋카이도 날씨란····”

- 아아아 아아아~~~~

- 흐흐흐흐흑~~

소명이 귀가 아픈 듯 귀를 틀어막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죠? 어디서 여자가 이렇게···”

“소리? 무슨 소리? 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스스키노를 지나 앞쪽으로 낡은 시계탑이 보일 즈음 차가 시계탑을 지나면서 엄청난 울림을 만들며 여자의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쿠와노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지만 소명은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쩌렁쩌렁 들려왔다. 최소한 그 소리가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저깁니다.”

소명이 시선을 돌리며 시계탑을 보았을 때, 거칠어진 눈보라에 시선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시계탑의 꼭대기 쪽에 희뿌연 사람의 형체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잠깐 내리도록 하지요.”

“이제 다 와가는데···서로 들어가야···”

“여기서 내려야겠습니다.”

소명이 바로 차도 한복판에서 내려 바랑에서 팔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나침반은 꺼내자마자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듯 바늘 끝이 시계탑 쪽을 가리켰다.

빠앙~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리에 터벅거리며 앞만 보고 걸어가는 승복차림의 그를 보고 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음을 쏟아냈다. 정면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소명의 모습은 금세 쿠와노의 시선을 벗어났다.

“야! 찻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달려 나가면 어떻게 해. 이런 대책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쿠와노는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들을 뒤로하고 차를 한 켠에 세우고 시계탑 쪽으로 달려가는 소명을 뒤따랐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소명의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이 눈보라 사이로 빠르게 사라져 버린 후였다.

시계탑 앞에 선 소명이 고양이처럼 튀어 오르며 철창을 넘어 시계탑의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흐흐흐흐흑”

희미하게 보이던 사람의 그림자는 흰 옷에 백발을 날리며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 가녀린 여자였다. 눈물이 날리며 어느 사이엔가 바람에 그것이 다시 눈의 결정으로 변해 눈발로 날리고 있었다. 아직 소명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자는 계속해서 흐느끼며 특유의 높은 소리로 서러운 듯 울고 있었다. 다시 귀가 째질 것 같은 굉음에 소명이 귀를 틀어막았다.

“제발 좀 그만 울라구! 무슨 원한이 그리 깊어서 이렇게 시끄럽게 울어!”

울음을 그치지도 않은 채 그녀는 그윽한 눈을 들어 소명을 보았다. 그때, 시계탑 아래로 한 남자가 미끄러운 눈 위를 자전거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그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가 시계탑 앞을 지나가는 사이에 눈보라는 그의 앞을 열어주듯 조심스레 그쳤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던 쿠와노가 남자와 부딪힌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어어!”

황급히 달려오는 쿠와노를 피하려다가 남자의 자전거가 기우뚱 중심을 잃고 미끄러져버리고 말았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김을 불자 남자가 쓰러지는 길 위로 포근한 안개가 생기며 쿠션처럼 그를 받았다.

“아이코!”

쿠와노는 충격이 컸는지 눈 위로 나뒹굴며 뒤로 자빠졌다.

“괜찮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청년이 쿠와노에게 팔을 내밀었다.

“뭐야? 이런 눈보라에 자전거라니 정신이 있는 거야?”

소명이 쿠와노와 청년이 부딪히는 것을 본 그 짧은 순간, 다시 고개를 들어 시계탑 꼭대기를 보았을 땐, 이미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보라는 그쳤고 심지어 구름이 걷히며 햇살마저 쏟아져 나오려는 화사한 날씨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땡중? 그리고 그 위는 어떻게 올라간 거야?”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던 소명이 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온 남자를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계탑의 낡은 지붕을 가볍게 밟으면서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 도리어 남자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소명이 쓰러져서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쿠와노를 무시한 채 지나쳐서는 남자에게 다가섰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서는 소명의 이상한 복장과 오사카 사투리가 이상했던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가요? 아니, 사람이 아닌가?”

“뭐라고 하시는 건지···전 그냥 신문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지금 조간이 늦어져서 빨리 가봐야 해서요. 일행분이 많이 다치신 게 아니라면··· 전 이만···”

남자의 서툰 일본어에 쿠와노가 소명의 어깨를 잡았다.

“중국 유학생인가 본데, 일본어도 서툰 사람에게 다짜고짜 그렇게 달려들면···”

쿠와노의 만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명은 계속 남자에게 다가서며 따지듯이 물었다.

“혹시 최근에 시주님 주변에 생사를 달리하신 분이 계십니까?”

“예?”

자전거를 다시 일으켜 세운 남자는 떨어진 신문 뭉치를 들고 자전거에 싣고 쿠와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 떠나려는 그를 계속 소명은 잡으려 들었다. 신문지를 챙긴 남자가 자전거에 오르며 쿠와노를 향해 외쳤다.

“아! 그리고, 저는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죄송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눈길을 헤쳐나가는 그를 보면서 소명은 계속해서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뭐 하자는 거야? 갑자기 차에서 뛰어내리질 않나, 그리고 어떻게 그런 신발로 이 눈밭을 날아다닐 수 있는 거야?”

“귀신이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겠죠?”

소명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스님 오늘 아침부터 공항에서 한 따까리 하더니만 정신이 없는 건가, 멀미가 심해서 헛것을 본 거 아냐?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저 사람을 노리는 게 분명한데,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요?”

“앞뒤를 맞춰가면서 말하라고. 그리고 뜬금없이 누가 뭘 노린다는 거야? 아차! 차 그대로 세워뒀다. 괜히 교통경찰이 딱지라고 떼거나 하면 또 귀찮아진다고. 얼른 따라와!”

소명은 아까 자신이 봤던 여자의 눈빛과 애절한 표정을 쉽사리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노리고 그를 잡아먹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제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요괴와는 뭔가 다른 모습이었다. 팔괘 나침반의 반응으로 봐서는 영력으로 따져도 자신이 제거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강력한 요기를 내뿜는 요괴. 그런 요괴가 자전거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위해 마력을 부리는 것을 본 것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외국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일단 큰일부터 처리하고 볼 일이다.’

소명은 처음 홋카이도에 도착한 아침부터 만난 묘한 요괴와 한국인 유학생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를 생각하면 무엇보다 무고한 희생자를 줄여야 한다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경찰서로 들어가기 전에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체의 상태를 보고 싶습니다”

소명이 입술을 다부지게 다물고 앞을 응시했다.

“시체 안치소로? 뭐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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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고야산(高野山)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県]에 있는 해발고도 약 1,000m의 산들을 두루 일컫는 이름이다. 이마키봉[今来峰], 호슈봉[宝珠峰], 하치부세산[鉢伏山], 벤텐산[弁天岳], 고야산[姑射山], 덴지쿠산[転軸山], 요류산[楊柳山], 마니산[摩尼山] 등 8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분지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의 지형이 '연꽃이 핀 형상'을 연상시킨다 하여 이곳은 불교의 성지로 여겨졌다. 한편, 이곳에 고야산[高野山]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는 없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인 819년 홍법대사 구카이[空海]가 수행한 곳이자 고야산진언종[高野山真言宗]이 태동한 곳으로 일본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곤고부사[金剛峯寺]가 있다. 고야산 내에는 약 117개의 사원이 있다. 2004년 7월 '기이산지의 영지와 참예도[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외에도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고노산의 대문에 해당하는 다이몬[大門]과 오키노인[奥の院], 단조가란[壇上伽藍], 그리고 국보인 레호칸[霊宝館] 등이 있다. 현재 일본의 국보 중 2%가 이곳에 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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