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만나자마자 먼저 나이를 묻고 많고 적음을 따져서 아래위를 정하고 그것에 따라 오빠니 형이니 하는 가족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은 전 세계에서 거의 한국인만이 지닌 사회적 관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관습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 만난 상대에게 나이를 묻는다던지 하는 것이 그쪽의 문화에서 예의에 어긋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죠.
한국인들에게 유교적인 문화는 전통적인 그것도 아닌 ‘한국만의’ 유교문화라는 형태로 기존의 것과는 전혀 새로운 형태로 창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일 듯합니다. 그 새로운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공기와 같아서 평소에는 그 존재를 모를 정도로 익숙해 있을 뿐 그것이 한국인만의 색깔을 채색하는데 아주 큰 베이스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유교적인 혹은 유교문화라는 것을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국인들은 현재 자신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유교적인 민족인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거 아닌가? 정도로 고개를 갸웃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유교문화라고 말해놓고서는 굳이 ‘유교적인 민족’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한국인들이 유교의 근본 덕목인 효와 제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현존 민족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굳이 새로운 형태에 대한 부연을 하자면, 여기서 ‘효’란 가부장에 대한 복종을 말하고 ‘제’란 손위의 형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 것이라고 제한해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 이 사회를 가족의 연장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한국인의 기본적인 인식입니다. 공자의 유교는 효를 확대시켜 그 정신을 사회에서 완성시키게 되면 그가 그토록 목이 터져라 외쳤던 소기(所己)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유교에는 가족 이외의 사회관계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문(愚問)을 던질지도 모르겠군요. 일견 파악하기에는 모든 사회관계가 가족 개념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함정(?) 아닌 함정 때문입니다.
동양의 전통 사회에서는 국가 같은 가장 큰 사회조직 역시 가족관계에 의해서만 파악되고 확장된 것이라 설명되었습니다. 당시 왕이나 황제는 백성들의 아버지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국가라는 조직의 사회적 수장이라는 의미는 약했다. 국가라는 단어를 번역하면 ‘國(나라) 家(집, 혹은 가족)’이 되니 왕은 그 집의 가장일 뿐이지 가족을 넘어선 어떤 공적인 사회 기관의 대표는 아닌 것이라는 설명도 성립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느 사회보다도 유교적인 가치관에 함몰되어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모르는 남을 부를 때도 가족 간에 사용하는 호칭을 씁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처음 만난 나이 든 남자를 ‘아저씨’(아저씨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불려 그것이 가족적인 호칭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최근 젊은이들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엄밀하게 아저씨는 친척 안에서 나이 든 남자 어른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 어원입니다.)로 부르는 것이나 지하철에서 나이 드신 여성분에게 ‘할머니’라고 부르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이미 한국의 식당가를 장악한 ‘이모’라는 호칭은 이미 외국인들에게조차 일반화된 지 오래입니다. 식당이나 술집에 갔을 때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젊은 학생 손님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줌마’나 ‘저기요’보다 ‘이모’라는 호칭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외국인들은 드라마나 실제 한국에 유학 왔을 때 식당의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전부 친척관계가 아니었나 하는 착각까지 일으키곤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굳이 식당의 나이 든 여자 직원에게 ‘고모’가 아닌 ‘이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설명도 필요할 듯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엄마가 육아를 담당하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였다는 점에서 아빠의 여자형제를 부르는 ‘고모’보다는 엄마의 형제인 ‘삼촌’이라는 호칭도 그렇고, 엄마의 자매를 부르는 ‘이모’라는 호칭이 어린아이들에게도 더 친숙하다는 배경이 문화에 녹아들어 가면서 그런 호칭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릴 적 엄마와 함께 다니던 아이들에게 엄마의 친구들은 당연히 ‘이모’라고 불리고 엄마와 함께 다니면서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좀 있는 남자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삼촌’이라 불리는 것이 그 증거라면 증거 되시겠습니다. 아무도 ‘고모’나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아빠가 아기를 데리고 다니며 모르는 어른들을 호칭할 경우가 거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정작 유교가 발생근원지라 할 수 있는 중국의 경우, 선후배 끼지 너무도 당연히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니나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언어로서 중국어가 갖는 영어와 비슷한 점에서 오는 부분을 바탕으로 그렇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사이엔가 중국의 역사적 변화흐름을 통해 문화적으로 이젠 그들의 문화에서 이름을 제외하고 자연스럽게 가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불교를 주류종교로 삼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유교의 종주국이었다는 사실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워져 버렸습니다.
중국이 유교문화를 부정하면서까지의 혹독한 공산주의를 겪으면서 과거의 유교적인 관습을 없애버린 결과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는 있을 듯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중국에서 엄마의 친구를 이모로 부르는 경우가 보이곤 하는데 이것이 앞서 설명했던 한국의 이모가 고모보다 친숙한 이유인 것과 같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식당에서 여자 직원에게 이모라고 부르는 중국인은 거의 없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 직원을 ‘이모’라 부르는 한국만의 또 다른 독특한 그 이유는, 실제로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 직원들의 나이와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카페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 직원에게 뜬금없이 ‘이모’라고 부르는 황당한 한국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식당과 술집은 대개 자영업이고 직접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주인을 비롯해서 식당에서 설거지를 담당하고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중년의 어머니 또래의 여성이 주류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황당한 용어를 제안하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물론 나이 든 중년 여성에 대한 한국만의 독특한 용어인 ‘아줌마’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앞서 식사문화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한국에서는 집에서 먹는 집밥만큼이나 밖에서 먹는 한 끼의 식사도 그리고 술자리도 상당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식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필요한 반찬이나 뭔가 더 요구를 할 때, 거리감이 있는 ‘아줌마’라는 호칭보다는 엄마를 대신하는 ‘이모’라는 호칭이 부르는 이의 심리적인 부분에도 자연스럽게 친근감의 거리를 확보해 준다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아줌마’에게 받아먹는 음식이나 술보다는 엄마를 대신하는 ‘이모’에게 말해서 챙겨 받는 음식과 술이 훨씬 더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죠.
이 부분은 이후 언급하게 될 한국인에게 갖는 ‘엄마’라는 특별한 개념을 풀이할 때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