飼 育 - 3

신년 특집 단편소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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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때였지 싶다. (초등학교라는 말이 입에 달기 거북스럽기는, 일제의 허울을 벗는다는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여간해서 그 거북스러움을 이기지 못했다.) 받아쓰기를 하다가 다른 친구들을 보며 손을 바르르 떨면서 미처 쓰지 못했던 1,2번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데 내가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상황은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모두 손 머리에 올리고 연필 놔요!”


그렇지 않아도 손이 떨리고 자꾸만 연필이 미끄러지던 판에, 중년의 배가 심술보로 두둑하게 찬 것 같던 날카로운 여선생의 말이 무섭게 떨어졌다. 그러나, 나 역시 꽤나 성적에 연연하고 내가 하던 일에 완벽을 기해야 한다는 집착이 굴뚝같았나 보다. 지금은 그럴 엄두도 못 내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었는지. 나는 선생의 눈치를 보면서 그 큰 공책 줄에 맞추지도 못하고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그것들이 모두 맞는 답이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지만 그때의 그 오금 저림은 늘 살아오면서 비슷한 경우에 만날 때마다 무조건적인 반사작용을 일으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 말고 그 앞에 쓰여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벌써 21명. 21명째 다음으로는 여지없이 격차를 두고 싶은 마음이었던지 붉은 사인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고, 줄밖에도 나보다 먼저 이름을 넣고 싶어 다른 종이에 써넣어 테이프까지 준비해서 붙인 사람들도 여럿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기 이름을 적어야 하나요?’라고 묻는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내가 지금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곤 재빨리 이름을 써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자리로 돌아왔다. 분명한 것은, 실제 이름을 적은 만큼의 사람들이 내 앞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면 난 아예 접수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제 내 앞의 사람은 열 사람이 채 못되었다. 약간의 기대라면 나쁠 것도 없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한 손에 두꺼운 소설선집을 들고 있는 나를, 아까의 내 바로 뒷자리를 확인해 달라던 여자가 바라보고 섰다. 남자 자리에 설 것도 아니면서 여자자리에 서서 그것도 단 9명 뽑는 자리에 열몇 번째로 서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내게 품는 상상력들이 더 퍼지기 전에 질문으로 그 생각들을 막았다.


“아주머니는 벌써 이름을 적으셨나 보죠?”

“예.”


대답이 오히려 짧다. 나에 대한 공상을 막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짧게 대답을 던지고선 여전히 공상을 계속하는 건가? 오히려 노련한 응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빌어먹을.

짧게 탄식처럼 입 속에서 말을 되뇌었다. 그런 표정을 읽은 것인가? 다시 만회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말을 잇는다.


“저렇게 많이 적어둔 사람들은···, 그럼 저렇게 끝나는 건가요?”

“아녜요. 그냥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뭐. 남자는 21명이나 뽑으니까 자리에서 비켜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냥 서 있으세요.”


뭐라 던질 대꾸대신 시계를 봤다.

10시 10분 전.


‘어떻게 세 시간 동안 난민처럼 이 자리에 있으라는 거요?’라는 무언의 반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특유의 포만감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는다는 것이 오늘처럼 가면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정말 나와 동일한 공기를 공유하는 곳에 함께 산다는 생각만으로도 나 자신을 생경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무표정한 얼굴들에 익숙한 나로서는.

잠시 생각을 하고,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다시 반문해 보았다. 수영을 석 달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내가 대답을 내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여기 신문 좀 깔고 앉으세요. 총각.”


또 다른 여자가 왔다. 아까 자기 아들을 위해 줄을 선다는 그 여자가 다시 내 바로 뒤로 온 것이었다. 웃고 있는 여자는 그 여자에게 내 자리 바로 뒤는 자신이 맡은 자리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대꾸를 하는 순간 내가 격하될 것 같다는 생각에 신문을 한 번 보고 안경을 벗었다. 극도의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는 내 몸의 신호였다. 털퍼덕 앉아 고개를 소설집에 푹 박았다.


뭔가 읽을 만한 것이 있으면 난 금세 고요를 찾았고 그 안으로 몰입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떻든 나는 주위의 어떤 것에 대해서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됐다. 어렸을 때 시작한 글 읽고 쓰는 것들도, 당시 서울 시내 안에 얼마 없던 상점 간판들을 보고 익혔던 것이니까. 어머니가 보셨더라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어머니와 함께 몇 안 되는 서울의 시내버스라는 것을 타고 푸른색에 원색모자를 쓰고 있는 안내양의 모습을 보며 잘못된 표기와 한글 맞춤법의 원리를 배웠던 내가 다시 글이라는 것만 보면 얌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 아마도 요즘의 현란한 거리에서라면 말도 안 될 일이다. 언제 그 많은 것들을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언제 그 영어와 일어로 점철된 간판들을 가려낼 것인가. 속독과 외국어를 먼저 배운다는 것은 어패가 있는 문제일 거다. 조카 녀석이 글이 아니라 말을 먼저 배운 것도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비디오 테이프이라는 첨단매체를 통해서.


“삐리리리...”


첫 번째 침입.

유난히 민감한 나의 청각을 건드린 것은 핸드폰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내 뒤로 어느새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근처에 있는 학생인 듯해 보이는 아이에서 양복을 입고 뭐가 그리 신나는지 경상도 사투리를 남발하는 사내에 이르기까지. 희끄무레한 시선을 돌리며 핸드폰의 거슬린 소리를 찾았다.


“어! 난데. 좀 늦게 들어가야겠어. 점심들이나 하러 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코끝이 찢뭉개진 녀석이 핸드폰을 이쪽저쪽 귀로 옮겨가며 거들먹거린다.


“제기랄! 핸드폰이나 있는 자식이 비싼 돈 주고 스포츠 센터나 갈 것이지 뭐 하러 이런 곳에 와 있나?”


들으라는 말처럼 뒤에서 비아냥거림이 섞인 질타가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젠 지가 전화까지 걸어가며 음성을 높였다.


“여보세요. 거기 김 부장님 좀 부탁합니다. 아, 예. 기다리죠.”


희뿌연 시력 탓이었는지 금세 다시 코를 책 속으로 가져갔지만, 어디서 그런 자식이 나왔는지,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받는 일수놀이 아줌마의 상판대기보다 더욱 거북해 보였다. 서민들 위주의 싼 값의 수영강습을 받기 위해 온 놈이 핸드폰을 들고 거들먹거리다니.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지 못했을까? 이젠 동료직원이었던 뚱뚱한 여자가 핸드폰을 빌려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린다.


“어! 엄마! 난데. 응. 내 거는 도저히 못 끊겠구. 다른 사람 거 끊어달라고 해서 기다리는데···, 응. 아니, 돈이라도 받고 끊어주지 뭐.”


닥치고, 좀 조용히 하지.

속으로 되까리고나서 다시 글 속에 집중하려고 책을 좀 더 코 가까이로 들이댔다.


두 번째 침입.

웅크릴 대로 웅크려서 한 번 일어나면 허리와 엉덩이에 그 힘겨운 고통이 느껴지는 내 등 쪽을 발로 밟으며 한 여자가 지나갔다. 아까 뚱뚱하던 여자애가 화장실을 갔는지 그 자리가 비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그 틈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내 몸에 누군가 손을 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거슬림이다. 일종의 무의식적 고문 같은 것이랄까.


고등학교 시절,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이라는 ‘선착순 자리제’가 담임의 공인으로 시행되었다. 고등학교라는 곳을 들어간 스포츠머리의 나는, 앞에서 세 번째 자리 뒤로 물러선 적이 없던 이전까지의 경력에 금을 내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다녔던 학교는 ‘야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른바 중학교 교실을 야간 고등학생들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찍 가서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담뱃재에서 지우개 먼지까지 어제 내가 일어날 때의 그 깨끗한 자리는 온 데 간데없었다. 그 이후 생긴 버릇이 바로, 항상 자리에 앉기 전엔 그 자리를 닦아내는 일이었다. 일종의 청결벽(淸潔癖)이라면 청결벽(淸潔癖)이었지만, 책상 서랍 속에 책을 넣으려고 했을 때, 누군가의 껌이 내 노트를 더럽힌 경험이 있던 이후부턴 반드시 깔개까지 깔고 책을 넣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그럴 일도 없고, 내가 책을 두고 가면 그만임에도 불구하고, 난 늘 그렇게 하던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퇴색해 버릴 만했지만, 가끔 내 자리가 아닌 다른 환경을 접하고 나면 그런 버릇은 여지없이 다시 깨어나 내 의식을 뒤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더러움이 내게 닿는 것을 혐오하는 내게, 겨우 신문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머리가 책에 눌어붙도록 주위를 외면하고 있던 내게, 애를 끌고 다니는 여자가 발꿈치를 누르고선 유유히 지나가 버리다니.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던 터에 머리를 확 재끼며 그녀를 보았다. 그에 놀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눈꼴사납게 타이밍을 맞춰 날 지나가려다가 엉덩이를 다시 한번 밀친 중년의 여자였다.


“아이구! 내가 아저씨를 밟았네? 미안해요. 하두 좁아놔서···”


변명을 하듯 일그러져 무섭게 신경질적으로 변해있는 내 심기를 읽었던지, 여자는 멀찍이 떨어져 돌아가서야 사라졌다.


빌어먹을! 이런 쓰레기 같은 줄 서기를 질서라고 하는 이들과 운동을 함께 하겠다고 기다리다니.

속에서 나오던 뇌까림은 작은 입놀림이 되어 혼잣말처럼 퍼졌지만, 옆에 와 앉은 뚱뚱한 젊은 여자는 내 말에 날카로움을 느꼈던지 두꺼운 안경 너머로 힐끔 나를 보고는 시선을 얼른 피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와 동시였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자들의 시선이 와 하고 몰리며 떼거리가 공기를 움직였다.

시간이. 두 시간여 남아 있는데?


“자자! 이것들 보세요. 집중 좀 해주세요. 먼저 왔던 사람부터 한 명씩 서봐요.”


갑자기 앉아 있던 여자들이 한쪽으로 고개를 삐집어 내고 이리 빼고 저리 빼며 뭐라고 떠들어댔다. 모두 일어나 자신이 원래부터 서 있던 자리라고 우기고 떠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겨우 10 여미 터 되는 푯말들 사이에 쭉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다시 아귀다툼을 하며 러시아워에 출근을 위해 지하철 안으로 필사적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처럼 밀어붙이며 벽으로 벽으로 서로를 밀어젖혔다.


“저 사람들은 직원도 아닌데···?”


맨 바깥쪽에서 떠들며 자리를 정리하라던 남자들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자신들이 앉아있던 여자 새벽 6시 20분 팀을 일으켜 세웠다.


저 사람들도 여자수영을 끊으려고 온 사람들인가?

아무 소용없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나도 어느새 일어나 내 앞에 있던 뚱뚱한 젊은 여자와 내 뒤에 화장만 번드르르하게 한 여자를 보고 한 발치 물러나 태연하게 그것들을 구경했다.


직원이 아니라면···.


“그냥 우리 줄 정리하자는 거니까, 이제 저기 적혀 있는 이름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구요. 자자, 이제 줄 좀 서보세요.”


웃음이 나왔다. 그랬구나. 저렇게 해서 자신이 선 자리에 대한 확고한 매김을 해두려는 거였다. 그래둬야 기다렸다가 허탕 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 행동들에 배어있을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냉소를 지으며 그들과 정면으로 시선을 맞췄다. 아까보다는 훨씬 더 신속하게 사람들은 다시 앉고, 덮고 있던 담요를 다시 펼치고 정리를 했다. 그나마 여자들이 대다수여서 그렇지 아마도 몇몇의 남자들이 더 있었다면 그 흔한 화투판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11시쯤이 넘어가자 대학생 아이들은 카드를 가지오지 않아 포커판을 벌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말들을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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