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에는 풍경이 없다. - 완결

신년 특집 단편소설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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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국어 선생은 말을 마치고 나서도 멍하니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울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언뜻 본 것 같기는 한데.

그날 수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인지 마지막 사랑인지 어쨌든 그것은 당시로서 파격이었다. 그가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고개를 파묻고 나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한쪽에선 벌써 엎드려 울고 있다.


“꾸민 얘기일 거야. 저 선생님 이번에 소설가로 등단했다며. 소설의 소재였을 거야. 괜히 넘어갈 필요 없다구.”


소정이란 계집애는 다시 입을 쪼아대며 그를 원래 있던 자리로 내몰고 싶어 안달이다.


‘여우 같은 계집애. 저 사람의 눈을 봐. 너 같으면 저런 눈으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어?’


하여간 그날 이후 그는 소설가로 등단한 것보다 더 큰 인식의 변화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갑자기 사랑의 대상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랑에 대한 연민으로 더 이상의 그를 추락시키는 따위의 헛소문은 나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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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웃음거리가 될 걸, 학생들에게 괜한 얘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의 냉소인지 모를 웃음은 이미 내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언제 제대더라?

이젠 기억도 나질 않는다. 뭐 하고 있을까. 지금 내 옆에 녀석이 없다는 게 이렇게 커다란 공백으로 작용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술만 들어가면 녀석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이젠 술이 아니라도 녀석의 생각이 문득문득 아무런 이유 없이 든다. 그냥. 정말로 그냥 생각이 든다.


오늘도 그 아이의 눈을 보았다. 이름뿐만 아니라 빛이 같고 향이 같다. 그 반에만 들어가면 그 아이 때문에 그녀가 더욱 간절하게 생각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제기랄. 이 나이에 눈물은.’


소주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은근슬쩍 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그녀의 딸이 자랐으면 그 정도 되어 있을까?’


<딸의 이름이 어머니와 같을 수는 없어.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럼 혹시 환생이라는 건···?’


<너 정말 미쳤구나.>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나와의 대화에서 너무나도 논리적이다.

동기모임은 늘 아픔만을 주는 계기가 된다. 기억하기 싫은 걸 너무 많이 나에게 기억하게 만드는 건 같아서. 녀석이 있다면 몰라도 내가 등단한 게 무슨 대단한 자랑이라고. 이건 이미 10년도 전에 녀석이 칭찬해 줬던 습작에 손질만 해서 내본 것뿐인데.


<그래도 그중에 그나마 쓸만한 건 이거 하나같다.>


녀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해준 평론 아닌 평론이 기억났다. 바로 그 작품이 등단을 하게 만든 것이 더욱 녀석을 생각나게 만들고 만다.


“야! 민 영규! 너 또 혼자 자작하냐? 누가 총각 아니랄까 봐. 자식 하고는···”


동기 놈 중에 가장 먼저 평론으로 등단한 정수가 술병을 들이댄다. 난 스스럼없이 잔을 비우고 들이댄다. 그래 마시자. 마셔.


“정호 녀석 갔다고 아직까지 헤매고 있는 거냐? 그럴 필요 없잖아. 너 말고도 정호 녀석 애인이 정호 따라갔다던데···”

“무슨 소리냐?”


난 녀석의 마누라를 알고 있었다. 정 민정. 그랬다. 유진이의 단짝,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뭐라는 거지?’


내가 모르던 정호의 애인을 정수 녀석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분명히 정호를 따라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정호 녀석 죽은 다음 핸가? 죽었다고 하더라. 백혈병이었다나? 이름이 뭐였더라? 넌 모를 거다. 넌 우리 과 후배들 이름도 몰랐잖아. 걔 이름이 정 유···뭐라고 했는데 우리 마누라랑 동기였거든. 음대 날라리들. 하하.”


내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얼굴에 늘 모두 드러나고 만다. 내가 늘 잊는 버릇 중에 하나이다. 왜지. 안 나오던 게 옛 친구들을 만나서일까?


“정수야!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오늘 정호 등단 축하하는 거잖아. 그런 옛날 얘기는 왜 꺼내고 그래?”


내 옆에 앉아 있던 문식이가 먼저 정수의 술주정을 막는다.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닐 거야. 정호도 음대 다니던 애인을···? 아니야. 음대에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그럴 수는 없어.’

“뭐 어떠냐? 이제 다 지난 일인데···”


정수 녀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 그날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딱히 어디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 좋다는 술에 한번 기대보고 싶었다. 정호의 애인과 유진이가 같은 수업을 들었을 것을 상상하며.


왜 우리 두 친구의 연인은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했다.


‘아니야. 그러기 싫어. 생각해야만 해! 생각할거라구!’

“닥치고 빨리 집으로 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뭐 하는 거야?”


녀석의 목소리가 마음속이 아니라 내 귀로 들렸다. 녀석이 제대한 건가? 제복이 언뜻 보인다. 벌써? 그렇지만 녀석은 그 한마디만 하곤 어디로 바쁘게 가버렸다. 짜식. 나중에 왔으며 벌주라도 마실 것이지. 중얼대는 나를 녀석은 또 그 냉기가 어린 조소를 지으며 날 보고 있을 게 틀림없다.


다음날. 길에 쓰러진 날 어머니에게 안아다 준 것은 평소에 안면이 있는 동네 파출소의 경찰이었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다. 어머님의 잔걸음소리가 새벽을 깨워준다. 얼른 출근해야 하는데. 창가에 어슴프레 밝아 있는 하늘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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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여대라서 그런 건 분명히 아닐 텐데. 그가 생각나고 빠진 수업이 거의 끝날 즈음에서야 난 벤치에서 일어난다. 올해 입학한 후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학교를 내려가며 날 아는 체 한다.


“유진이 언니.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이번엔 꼭 내야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쥐어본다. 등단이 목적이 아니라 난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문득 반드시 그의 손을 거쳐야만 이 글들에 생명이 불어 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가 이미 학교를 떠났으면 어떡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일 거다. 졸업하고 한 번도 못 찾았던 게 내 실수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으니까. 내일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가 아직까지 날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분명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게 내밀 거다. 쑥스러운 듯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학교를 내려오는 길은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린 하늘을 내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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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다시 올라온다. 고향도 아닌 잠시 내가 스쳐 지나갔던 곳을 찾았던 게 참 신기하다. 처음 그곳으로 내려갈 충동을 가졌던 내가 전혀 다른 나처럼 느껴졌다.

그가 아직 학교에 남아 있을 거라는 확신은 늘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있을 거야. 교정은 변한 게 없지만 늘 낯설었다. 그러나 난 교정이 보이는 그 앞에서 다시 발을 돌리고 말았다.


왜였을까?

멀리 보이는 창밖으로 먼지에 엉켜 사라지는 풍경들을 본다. 저게 바로 그림이라고 하는 거구나. 그가 정말 그 학교에서 날 가르쳤던 사람이었는지도 이젠 확실치 않아져 버린 느낌이다.


“저 그림엔 풍경이 없어.”


그가 그 어두운 오후에 막 쏟아지는 비를 보며 했던 말이다. 교실 벽엔 분명히 멋진 유화로 채색된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도.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온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그의 겉멋 어린 글쟁이의 허드레려니 했었는데. 그런데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어지럽고 모든 것이 다시 복잡해진 느낌이다.


내가 쓴 소설이 그였는지 아니면 그가 있었던 것이 내 소설 속에서였는지, 그것조차 확실치 않아졌다. 이 소설 같지도 않은 소설은 다시 재고할 필요조차 없다. 당장이라도 서울로 가서 이미 다 써놓은 우편봉투에 쳐 넣어야 할 것 같다.


그가 이 소설을 읽고는 웃고 있을 모습이 떠오른다.


저건 누구지?

그 해 가을. 수업시간, 그가 지었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던, 그런 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 창에 비춘다. 낯설지가 않다.


이런 거였을까? 그가 가졌던 생각이.

서울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다.




지난번 단편도 그렇지만 이것 역시 30년이 훌쩍 지나버린 낡은 원고더미에서 건져 올린 단편입니다.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으나 여유롭게(?) 소설을 쓸 심적 상태가 아닌지라 너무도 정신이 없어 한숨을 돌리겠다고 묵어서 사라질뻔한 젊은 날의 원고를 저 깊은 곳에서 길어 올렸습니다.

힘이 들긴 하지만, 이제 조금씩 복잡한 일들이 하나씩 정리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매번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빌런이 나타나 평온을 깨뜨리곤 하지만, 그래도 재작년에 비해, 그리고 작년에 비해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다는 느낌은 확연히 듭니다.

자신의 운이 바뀌는 데에 있어, 누구보다 자신이 변화의 조짐을 느끼게 된다고 <주역>에서는 가르칩니다.

그 느낌을 받으며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아 도약하려면 그간의 노력과 지금의 노력, 그리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놓치지 않고 노력해 나가면 어느 사이엔가 이전에 무엇을 해도 안 되는 것만 같던 순간에서,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일을 돕고 바로잡아주는데 힘을 써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어둠은 여명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요.

이제 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간의 힘겨움을 보상받을 시간이라 여기고 더 노력하면 그만인 겁니다.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올해에는 더 많은 좋은 일들로 행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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