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11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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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외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조차 세심하게 보지 않으면 몰랐던 경악할만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곤 합니다. 한국의 도심의 군데군데 공포영화처럼 박혀 있는 붉은 십자가 표시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 붉은 십자가 하나하나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식에 다름 아니지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국의 토속 신앙이나 오래된 전통 종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기독교가 전파된 지 불과 얼마의 역사도 갖지 못했음에도 이렇게까지 안착하고 크게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가 창교되고 근 2천 년 동안 전 세계에 걸쳐 전파되었지만 기독교가 종교의 주류로서 성공한 지역은, 전통 종교가 빈약한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 아랍이나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본처럼 전통적으로 기존의 종교 색채가 확실히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기독교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예외가 바로 이 한국이라는 나라인 것이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수도인 서울 한복판에 가지고 있는 나라이고 초대 대통령이 대놓고 선교를 장려한 기독교인이었고 그 후에도 교인 대통령이 많았다는 것 등등 참으로 많은 기록을 갖추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한국에서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후 미군정이 3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뒤를 이어 초대 한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가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치하에 있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기독교 신자는 전 인구의 0.5%에 해당하는 1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폭발적이고 비약적인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셈이죠. 그 이후 1980년대에 800만 명이 되면서 무려 초창기의 80배나 늘어난 데에는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추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궁금하거나 딴지를 걸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기독교가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특혜를 받은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예컨대 크리스마스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우리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인 듯 무심히 넘어갔지만,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특혜라고밖에 여길 수 없죠. 석가탄신일도 휴일인데 왜 그러냐는 단순 비교는 두 종교의 역사적 맥락을 보더라도 단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많은 교회가 서울의 요지에 들어서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현실에 일찍 눈뜬 개신교의 목사들이 미군정에 접근하여 적산 가옥을 불하받으면서 생겨난 현상이라는 주장이 상당히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영락 교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의 산실인 경동 교회라고 알려져 있지요. 이 교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던 일본의 신종교였던 천리교 사원을 접수하여 그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기독교가 한국의 종교에 주류인 양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그 배경에는 한국인이 기독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된 원인부터 분석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그 의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쇄국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치하로 들어가 나라 잃은 설움으로 핍박받던 한국인들에게 자신들보다 모든 면에서 앞선 서양인들이 믿고 따르는 종교인 기독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닌 선진문물과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일관된 쇄국정책으로 서양의 선진문화를 자연스럽게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일제에게 강제로 식민지 경험을 겪게 되면서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오게 된 미국 문화의 침탈까지 받으면서 자국 문화를 낮추어 평가하는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일종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서양 문화를 선망하게 되고 자기도 그들과 함께 문화와 종교를 공유한다면 자기 스스로가 고양되어 기존의 바닥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묘한 콤플렉스의 해소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속적인 기독교의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작이 기존의 천주교가 핍박을 당하면서도 종교적인 부분을 강조했다는 점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국에서 기독교의 출발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시작은 그러했으나 폭발적으로 한국의 야경에 붉은 십자가를 흩뿌리듯이 박아 넣게 된 배경은, 한국의 급격한 경제성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은 그에 따른 문화나 정서적인 성장과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그러한 상황들은 종교가 갖는 본래의 특성, 즉,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로 정신적으로 기대야 할 무언가가 필요할 때 그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로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 결탁되면서 기독교의 성장에 기름을 붓게 됩니다.
이른바 ‘십일조’라고 하는 교회에 내는 돈은 개척교회에서 거대 대형 교회로 성장해 나가는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됩니다. 신자가 내는 십일조의 본래 의미와는 무관하게 그 돈은 교회의 물리적 확장과 목사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상당한 실탄이 되어 주었고, 그 엄청난 자본력은 더 큰 자본을 위해 정치권과 결탁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최근 코로나 때문에 교회에 직접 가서 예배를 하는 것에 대해 잠정적인 중단을 권고했을 때, 기독교 단체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반발을 보였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하면서 온라인으로 십일조를 송금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라는 웃픈 현실적 비판이 나왔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설명에 설득력을 얹어줍니다. 교회가 종교가 아닌 사업이라는 풍자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특정 종교를 지지하는 일이 초대 대통령 때부터 있었던 한국은, 그 독특한 출발점으로 인해, 교회가 정치권과 모종의 밀월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심어줍니다.
광화문의 한 구석에서 태극기부대라고 불리던 이들 사이에 멀쩡히 목사를 자처하는 이들이 정치권과 결탁하고 정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한국의 기독교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왜곡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한국의 사이비 종교들이 전혀 새로운 교리가 아닌 기독교의 성경을 기본 논리로 삼으며 사이비 교주들이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얼마큼 기본 베이스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근거들 중 하나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청교도 문화가 대표하는 것처럼 불륜이라던가 사기라던가 기독교에 신실한 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러한 문화가 한국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신실하지 않다거나 교리에 어긋나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조차 끝까지 하나님을 입에 들먹이며 교인행세를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곤 합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모두 착한 사마리아인일 수는 없겠지만, 신실한 종교를 전면에 내세웠던 이들은 교리를 그만큼 강조하기 때문에 그 규율에 위반되거나 범죄를 저지한다는 점에서 더 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교회 없는 동네가 없는 한국, 아마도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생경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한국만의 독특한 기독교는 그야말로 한국식 기독교만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으니 본래의 기독교와는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긴 하다는 정도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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