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女(설녀;유키온나) 5

납량특집 호러 판타지 멜로

by 발검무적

“엣취!”

요란한 재채기 소리에 근석이 눈을 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에 키가 커다란 남자가 주방에서 앞치마를 하고 자신을 멀뚱하니 바라보며 코를 훌쩍거렸다.

“어? 일어났나?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좀 시끄러웠나 보군.”

커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전등 뒤에 가려져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 조금 더 당황스러웠다. 남자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들고 테이블로 걸어 나왔다.

“오코노미야키···, 좋아하나? 땡중 녀석이 만들어 달라는 대로 해보기는 했는데···정작 주문한 녀석은 금방 돌아온다더니 여태껏 오지 않는군.”

“예?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근석이 일어나며 방 주변을 둘러봤다. 경찰 표창장이나 경찰복을 입고 있는 사진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우리 집이야. 아까 2시가 넘어서 녀석이 자네를 둘러업고 들어와서는 스스키노의 용인지 호랑이인지를 찾으러 간다고 나갔어. 그러면서 자기가 오기 전까지 오사카 스타일로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어 놓으라고 난데없는 요리 주문까지 하고 나갔어. 자네는 곧 일어날 거라고. 곧은 무슨. 아주 잘 자더군. 남의 집, 남의 침대에서 말이야. 어찌 됐든 간에 기운이 허해서 쓰러졌던 것 같으니까 그렇게 비실대지 말고 일단 이거부터 먹고 봐. 역시 오코노미야키는 오사카 식이 최고라니까. 이렇게 온갖 재료 다 넣고 두툼하게 만들어야 오코노미야키를 먹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오늘 내가 큰 맘먹고 콘비니(편의점)를 털다시피 했다구. 집에서 뭔가 만들어 먹는 게 얼마만인지 말이야. 뭐 이 정도면 히로시마 식은 쨉도 아니라구. 일본에 와서 오코노미야키 정도는 먹어봤겠지?”

식탁에 커다란 접시에 프라이팬 가득한 오코노미야키를 턱 하니 옮겨놓는 그의 모습에 그제야 그가 시계탑 앞에서 신문을 배달할 때, 부딪쳤던 몸이 다부진 일본인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업혀 왔다던 기절 전 상황을 기억해내려고 하니 머리만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분명히 어제 코유키를 본 것 같았는데 승복을 입고 다니던 남자와 만나고 나서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는 듯했다. 왜 코유키와 만났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만 어렴풋하게 들렸던 것인지조차 정확치 않아졌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죠? 왜 제가 여기서···”

“자아, 아, 해 일단 이걸 다 먹고 얘기는 천천히 해 줄 테니까 서둘 것 없어. 한국인이라고 했지? 내 한국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어. 금강산도 식후경? 그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난 그 말만큼은 세계 공통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궁금한 걸로 치면 내가 자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아. 어차피 궁금한 것은 이쪽이 훨씬 더 많으니까. 일단 먹자구.”

3cm는 되어 보이는 두툼한 오사카식 오코노미야키에는 여러 가지 재료가 투박하게 듬뿍 들어가 있었다. 그 위로 마요네즈까지 듬뿍 뿌려졌다. 쿠와노는 큼직하게 쓱쓱 썰어서는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허어~ 뜨··뜨거··! 역시 오코노미아···”

뭐라고 말하는지 뜨거워서 웅얼웅얼 뭐라고 중얼대는지도 모를 쿠와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근석이 피식하고 웃었다. 입을 연신 우물거리며 먹고 있던 쿠와노가 이번엔 근석의 웃고 있는 입 안으로 쿡 하고 오코노미야키 한 덩어리를 들이밀었다.

“아!”

억지로 입에 넣은 오코노미야키를 먹으며 둘은 서로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식사를 했다. 그리고 거의 다 먹어갈 무렵에서야 근석은 그들이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둑어둑하던 창밖으로 서서히 동이 트려는 지 전등 불빛이 차츰 어색해져 버렸다.

띠리띠리-

쿠와노의 핸드폰에서 요란한 오락실 게임 로고음이 울렸다.

“아, 여보세요. 응. 뭐야? 금방 돌아온다는 녀석이···. 뭐라고? 거기 뭔 음악소리가 그리 커?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뭐라는 거야? 너 혹시 스스키노에서 술 먹고 노는 거냐, 땡중? 지리도 잘 모르는 녀석이 밤새 술퍼 마시고 다니는 거야?”

-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요. 뭐라고 하는지도 잘 안 들리는구먼···. 아무래도 바로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 사람을 만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안 될 것 같으면 들어갈게요. 이거 빌린 전화라서 길게 못 써요. 그리고 이 번호 잘 저장해둬요. 어 저기···”

뚜우-하는 소리와 함께 소명의 목소리와 소음이 가셨다. 쿠와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근석의 얼굴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아! 그 고야산의 땡중. 녀석이 스스키노에 갔나 본데 아무래도 일찍 들어오기 힘든 모양이야. 자네 집이 어딘지 아까 지갑에서 잠시 외국인등록증을 봤는데 집은 삿포로이면서 학교는 오타루로 다니는 것 같던데···”

“아, 네. 원래 어학연수는 삿포로에서 했는데 사실 유리공예를 배우고 싶어서 온 거라 오타루 가라스 공방까지 매일 통학하고 있습니다.”

“그럼 오타루 쪽이 야찡(집 월세)도 훨씬 싸고 편할 것을 왜 그렇게 복잡한 일을 하지?”

“그게···”

근석이 바로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쿠와노가 연이어 질문공세를 퍼부을 기세로 바로 앉아 찻잔에 물을 부었다.

“아참! 잘 먹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오코노미야키는 처음 먹어봅니다.”

근석이 빈 그릇을 내밀며 예의를 표했다. 쿠와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릇을 치우고 근석의 앞에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단 것으로 입맛을 정리해주지 않으면 그건 오사카 오코노미야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아, 예.”

근석은 이 불편한 공기를 벗어나 얼른 코유키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그 무렵 소명은 스스키노에서 12시 이후의 환락가에만 등장한다는 용을 찾기 위해 그의 존재를 알려줬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석을 쿠와노에게 맡기고는 왔지만 일단 근석과 그 여자 요괴가 문제의 살인 요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호귀가 말했던 스스키노의 용을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여자는 전화를 받고 한참 길을 설명하다가 포기했는지 ‘그냥 스스키노 전철역에서 나와서 스스키노 빌딩 앞에 '니카'라는 늙은 영감 그림이 있는 건물 뒤로 들어오면 가장 큰 클럽이 보일 거야. 그리로 와.’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음에도 큰길에는 분명 인적이 뜸한데도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빛이 환해지는 기묘한 곳이었다. 잘못 들어온 것은 아닌지 굉음이 나는 클럽 안에서 옆쪽으로 여자들의 사진이 쭉 걸려 마치 국회의원 선거유세장처럼 보이는 것이 TV 드라마에서 보았던 환락가의 모습과 정말 똑같았다.

우왕좌왕하다가 누군가 뒤에서 그의 목을 잡아끌었다.

“어이! 젊은 오빠! 뭘 그렇게 멍하니 기다려? 나참! 술 한잔 사준다고 했더니 그날 바로 전화를 하냐? 너무 성질 급한 거 아냐? 간사이 사투리를 쓰던데 그쪽에서 와서 다혈질이신가?”

낮에 만났던 여자였다. 그녀는 소명의 목을 잡아끌듯 끌어안고 술냄새를 풍기며 옆의 통로로 조심스레 걸어 나갔다.

“이것 좀 놓고···”

여자의 당찬 행동에 겨우 목덜미를 바로 잡으며 소명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종류 술을 좋아해? 좋아하는 타입을 말해줘야 내가 안내를 하지?”

“아, 술이 아니라 낮에 말씀하신 스스키노의 용을 찾는다고···”

“뭐야? 아! 아까 류(龍)를 찾는다고 했던가?”

“에? 용이 아니라 이름인 건가요, 사람의?”

“글쎄. 하여간 그 사람의 온몸에 용이 들어있는 것은 맞으니까····”

“꺄악!”

그때 한쪽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울리는 쿵작거리는 음악소리와 뒤섞여 사람들이 금세 공간을 만들고 그 상황을 지켜봤다. 긴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덩치가 그리 크지 않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끌어 잡고 다른 한쪽에 피가 묻은 깨진 병을 들고 있었다.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던 술집 보디가드가 그가 휘두른 병을 맞고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그 앞에 쓰러져 묵직한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술 따르라는 말이 안 들려?”

“이러지 말아요.”

그때였다. 훅-하는 소리와 함께 난동을 부리던 남자의 손에서 병이 사라져 버렸다.

“훗! 양반은 못 되는 구만. 저 사람이야.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보즈(스님)야.”

“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스님으로 보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순식간에 자신의 손에서 병이 사라진 것에 놀란 야쿠자 앞에 여자를 양 옆에 낀 호스트같이 호리호리한 남자가 담배를 물고 키득거리며 서 있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만 가.”

아주 조용하고 입술만 움직이는 것 같을 정도로 작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소명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그다.’

그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까 오후에 시계탑에서 울고 있던 여자 요괴의 모습을 보고 구시렁거렸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낮에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어서 달라 보였을 뿐 지금 프라다 정장에 옷깃을 세우고는 희끗한 짧은 머리에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있는 그는 분명히 낮에 봤던 그 남자였다.

“뭐냐? 넌?”

“나? 지나가던 땡중!”

정적을 깨는 그의 비아냥거림에 경직되어 있던 사람들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무엇보다 긴장된 야쿠자에 비해 그의 모습이 너무 여유롭고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 대비되어 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자아냈다. 비틀거리듯 서 있는 그를 안고 있던 늘씬한 미녀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술잔과 술병을 내밀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느 호스트바의 잘 나가는 에이스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중후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보즈! 살려줘요. 이 사람이 갑자기 자기에게 입술로 술을 먹여달라고 해서···”

머리채를 잡혀 있던 여자가 구세주를 본 것처럼 울먹이며 외쳤다.

“닥쳐! 그게 뭘 어쨌다는 거야?”

주정을 부리며 여자의 얼굴에 손을 올리려던 남자가 그대로 공중에 큰 원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선술(仙術)이다’

일반인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소명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보즈’의 손가락이 야쿠자의 손목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힘을 그대로 역회전시켜 내던지는 찰나의 광경이었다.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보법(步法)도 신기에 가까운 솜씨였지만 그 잠깐 사이에 식신 같아 보이는 부적까지 그의 가슴팍에 염(念)으로 박는 것은 보았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뭐야? 덤벼! 아니야! 사라져! 난 아니라고!”

갑자기 야쿠자가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어 허공에 대고 휘두르기 모습이 소명의 그러한 짐작을 확인시켜줬다. 남자는 자신의 몸에 벌레가 덤벼드는 환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자신의 옷을 칼로 찢어가며 쓰러졌다. 결국 야쿠자는 미친 듯이 혼자서 칼을 휘두르다가 지쳐 쓰러져 다른 보디가드들에게 제압되어 밖으로 끌려나갔다.

“오!”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며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보즈는 마치 마술을 마친 마술사처럼 쇼맨십을 부리며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담배를 물고 인파를 빠져나가 옆의 라운드 테이블에 함께 온 여자 둘을 데리고 앉았다. 그의 자리로 다른 몇몇 여자들이 더 모이기 시작했다.

“가봐! 젊은 오빠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성 정체성을 잃은 것 같네. 지금 그 표정, 아주 가관이야. 아주 맛이 갔어.”

여자가 뭐라고 하는지 들을 새도 없이 걸음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향했다. 그의 바로 앞자리에 여자들을 밀치고는 자리에 앉아 보즈를 응시했다. 소명의 눈치 없는 행동에 짜증스러운 아가씨들의 반응에도 보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여자들과 키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퇴마승이시죠?”

뜬금없는 소명의 질문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보즈는 다시 반대쪽의 여자에게 술잔을 들며 건배를 청했다. 여자는 자신을 봐주는 보즈의 눈빛에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맛 떨어지게 할 거라면 꺼지시고, 함께 한잔 한다면 내가 오늘은 사지. 고야산에서는 이런 좋은 술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없을 테니까···자아 한잔 받을 텐가?”

“예?”

옆에 앉아 눈을 흘기던 여자가 소명의 앞에 새로운 잔을 놓았다. 고야산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을 새도 없이 잔에 꼬냑 헤네시(HENNESSY)가 채워졌다. 마치 황제가 여러 후궁들을 데리고 노는 듯한 향락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리는 알 수 없는 분위기의 남자였다. 안 먹어본 것을 먹길 좋아하긴 하지만 술은 아직까지 입에 대본 적이 없는 소명이었다. 겨우 차가운 제사 술 한두 잔 정도를 공해 선사 몰래 훔쳐 먹어본 것이 고작인 터였다. 호기심에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한 번에 얼음만 남기고는 들이켰다. 속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지며 코로 불꽃이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을 제대로 들이킬 수가 없었다.

“오호~! 한잔 더!”

보즈가 술병을 들어 다시 한잔 가득 채웠다.

“술꾼이로구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기싸움에서 밀리기 싫다는 생각에 소명은 두 번째 잔도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여자들의 박수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리고 조명과 테이블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싶었는데 10번째 잔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소명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아직 애군. 공해 그 양반도 이제 힘드신가. 이런 애송이를 호랑이굴로 다 보내고.”

보즈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티셔츠를 입은 보디가드가 다가와 소명을 업었다.

“한잠 푹 자게 내버려두고. 이따 아침밥 먹을 즈음에 내가 늘 가는 곳으로 녀석을 배달 좀 해주게. 아마 서너 시간 자고 나면 알아서 깰 거야.”

보즈, 아니 류(龍)는 아쉬워하는 여자들을 뒤로하고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스름 새벽 공기 속으로 가느다란 눈가루가 날렸다.

“새벽마다 신문배달을 하고 있습니다. 얼른 가지 않으면 저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요.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근석이 자리를 뜨려 했다. 사실 쿠와노가 형사인 것도 맘에 걸렸지만 무엇보다 빨리 어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특히 코유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꿈이었던 것인지 직접 시계탑에 달려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급했다.

“신문배달? 오타루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삿포로에 사는 것도 부족해서 이곳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해? 그것도 신문배달을?”

“죄송합니다. 늦어서 가보겠습니다. 어젯밤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인사 오겠습니다.”

황급히 집을 빠져나가는 근석을 보며 쿠와노는 굳이 만류하거나 잡으려 들지 않았다. 이미 그의 신원도 파악했고 자세한 사항은 소명에게 들으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를 무엇보다 조용히 미행해서 주변을 탐문해달라는 소명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자연스럽게 보내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눈길에 자전거를 타는 일은 좀 참아달라고! 큰일 나니까!”

그의 말을 뒤로하고 찬바람이 들이치는 문을 열고 근석이 길을 나섰다. 지하철 역까지 달려 전철을 타고 삿포로시 중구의 홋카이도 신문 보급소를 들러 자전거에 신문을 실었다. 멀리 차 안에서 그를 따라붙은 쿠와노의 시선이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시계탑 앞으로 자전거를 달려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표정으로 자전거의 방향을 사무실 쪽으로 돌리고 신문배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뒤따르는 쿠와노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미행이었다. 다짜고짜 시계탑으로 달려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 이외에 이상한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신문배달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그는 삿포로 역으로 달려 JR을 타고 오타루로 향했다.

쿠와노 역시 오타루행 JR에 몸을 실었다. 삿포로에 살면서 오타루에 가는 열차를 타보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달리다가 아침을 맞는 바다가 열렸다. 오타루로 가는 JR열차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해안선을 따라 광활한 바다를 보며 오타루로 진입하는 광경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타루 역에 도착하기 직전 역인 미나미 오타루(南小樽) 역에서 근석이 내리는 것을 보며 조용히 따라 내렸다.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아 근석이 눈치챌 일은 없어 보였다.

미나미오타루역에서 내려 언덕에서 조금 내려가니 기타이치 거리에 가라스 공방들이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1900년대 오타루가 금융의 중심지였을 때는 활발했던 이곳도 이제는 ‘러브레터’라는 영화의 배경지로 유명해져 이젠 그 영화 하나로 먹고사는 조그만 시골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이나 차나 출근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삿포로시에 비해 너무 적고 고즈넉했다.

“안녕하십니까!”

공방의 커다란 나무문을 열며 근석이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던졌다. 공방 안은 아직 불도 켜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뭔가 튀어나오며 근석의 머리를 쳤다.

“앗!”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지만 이미 쿠와노의 눈앞에 근석이 뭔가에 맞아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공방 안에서 기다란 봉 같은 것을 들고 몇 명의 남자가 우르르 걸어 나왔다.

“오이~! 조센징! 뭐가 그렇게 신나서 매번 이렇게 니가 매일같이 문을 여는 거야? 선생님이 니가 이뻐서 열쇠를 맡긴 거라고 착각하는 거 아냐?”

“엄청 아픈데···”

근석이 머리를 비비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의외로 근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곤도! 넌 이렇게 비겁하게 깜깜한 곳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는 짓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냐? 니 똘마니들을 뒤에 세워놓지 않으면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할까 봐 겁이라도 나?”

“뭐야! 이 지저분한 조센진이···”

곤도 히로유키는 다시 한번 봉을 들고 찌르듯이 근석에게 덤볐다. 그러나 이번엔 근석이 얼른 봉을 잡아채고 그를 확 잡아당겼다. 옆에서 곤도를 따르는 다케다와 스도우가 근석에게 덮치며 양옆에서 부여잡았다. 그러나 근석은 얼른 타케다에게 머리를 들이받아 박치기를 하면서 그를 떨궈냈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 녀석이구만.’

쿠와노는 세 녀석이 덤비는 데도 주눅 들지 않고 맞서 싸우는 근석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싶어 졌다.

“이 조센징! 니가 하루카를 꼬셨지? 하루카가 이제 나하고는 안 만나겠다고 하잖아!”

스도우가 소리쳤다. 곤도가 결국 씩씩거리며 근석을 노려보고 섰다.

“니가 감히 내 여자를 넘봐? 더러운 조센진 주제에, 감히 일본에 와서 일본 여자를?”

곤도가 봉을 고쳐 잡고 후려칠 기세로 덤벼들었다. 그가 휘두르는 봉을 피하면서 달려드는 그를 어깨 뒤로 내던지며 다시 다리를 잡으려는 스도우를 발차기로 내동댕이를 치고 난 근석이 세 사람을 예의 주시하며 외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난 하루카에게 추파를 던진 적도 없고 하루카에게 관심도 없어.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다!”

“웃기지 마! 니가 삿포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이 멋지다며 하루카가 분명히 말했단 말이야. 그리고 지난번 우리가 일 안 하고 술 먹고 놀러 갔다 오느라 시간을 못 맞춰 작품들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선생님께 일러바친 것도 너잖아!”

쓰러져있는 줄 알았던 다케다가 뒤에서 살금 거리며 커다란 철판을 들고 다가섰다. 근석이 포물선을 그리며 돌려차기로 다케다를 쓰러뜨리고 곤도의 손에 들려 있던 봉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눈밭에 메쳐버렸다.

“잘 들어! 너희들! 니들 때문에 더러워지고 찢어진 옷을 변상할 각오는 되어 있겠지? 어제 처음으로 산 비싼 옷이거든? 아직 작업복으로 갈아입기도 전에 니들이 이 꼴을 만들어 버렸으니 책임지고 변상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이번 기회에 말해두는데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여자에게 멋있게 보여서 여자를 꼬셔보려는 게 아니라 내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너희 한심한 짓거리를 선생님에게 고자질할 틈도, 자만심 넘치는 계집애들과 노닥거릴 틈도 없다구!”

근석이 덤벼드는 곤도의 주먹을 피하며 어퍼컷으로 곤도의 턱을 날리자 곤도는 뒤로 나뒹굴듯 쓰러졌다.

“게다가 내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곤도! 너희 아버지가 소니 지사장이라고 들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너희 부모가 사느냐 안 사느냐 집안이 시끄럽다지? 말해두지만 나는 너희 같은 어린 녀석들과는 입장이 달라. 알겠어?”

곤도에게 집중하고 있던 사이 쓰러져 있던 다케다가 입술에 피를 흘리며 날카로운 유리판을 들고 다시 근석의 머리를 내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퍽-

근석이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쿠와노의 주먹에 다케다가 2-3미터는 날아간 후였다. 벽에 나동그라지며 쓰러진 다케다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거품을 물었다. 스도우는 이미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언제 여길···”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구나 너! 맘에 들어! 아까 내 오코노미야끼의 기합이 널 이기게 해 준 거라구. 톡톡히 갚아! 그리고 너! 곤도라고 했나? 일본 사내로서의 기백이 한참 부족하군. 언제고 기백이 뭔지 알려줄 테니 홋카이도 경시청 강력반 쿠와노 형사를 찾아와라. 알겠나?”

곤도가 쿠와노의 기합에 놀라 줄행랑을 치고 나자 근석이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공방 문을 열었다. 조용히 불을 켜고서 가라스 공방 안으로 쿠와노를 안내했다.

“선생님은 전시회 일정을 타진하기 위해서 어제부터 도쿄 출장 중이세요. 앉으세요. 뭐 따뜻한 거라도···”

“아니. 됐어. 공방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군. 멋진데? 생각보다 굉장히 따뜻하군. 밤새 누가 있었던 건가?”

“예. 불을 꺼뜨리지 않는 주의세요, 선생님께서. 그래서 늘 아침에 먼저 나와서 불을 확인하고 작업도구들을 손질하고 선생님이 작업하시기 좋게 정리해두고 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렇군. 유리는 유리공장에서 다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군.”

“이곳은 공방이라,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이라기보다 공예품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직접 하나하나 입으로 불고 손으로 직접 제작하는 것들 뿐이지요.”

“음. 비싸겠는걸? 김상이라고 했던가?”

“예. 김 근석이라고 합니다.”

“난 쿠와노야. 소개가 늦었네.”

“괜찮으시다면 '스시 거리'에서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절 구해주신 것도 그렇고 어젯밤 일도 그렇고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오전에 마무리해야 하는 작업이 금방 끝날 테니까요.”

“아, 그럴까?”

근석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단단히 앞치마까지 묶고 장갑을 끼고 나니 정말 공방의 예인(藝人)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넋 놓고 작업 구경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지만 근석이 빨갛게 달군 유리원료를 입으로 부는 것을 보면서 쿠와노는 근석의 엄청난 집중력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듯 유리 공예 공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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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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