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女(설녀;유키온나) 4

납량특집 호러 판타지 멜로

by 발검무적

비즈니스호텔에 묵으려던 쿠와노의 계획과 달리 그의 맨션에서 잠을 자고 난 소명은 아침부터 일어나 산사에서 하던 대로 목욕재계 후에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다. 대강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로 이것저것 만들고 밥을 하고 나서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쿠와노가 속옷 차림으로 나왔다.

“우리 스님은 잠이 원래 이렇게 없으신가? 근데 이게 왠 맛있는 냄새야?”

“그냥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차려봤습니다.”

아침뿐만이 아니라 거지 소굴 같던 거실이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고 소명이 자고 난 이부자리는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음. 냄새 좋은데···어디 한번 맛도 그런지···”

쿠와노가 신기하다는 듯이 미소시루를 들이켰다.

“오호! 이건 완전히 시집가도 될 정도인걸? 어디서 이렇게 제대로 된 음식 솜씨를 배우셨나?”

쿠와노는 어제저녁에 먹지 못한 라멘이 생각났던지 낫또를 밥에 비벼 넣고 그 사이로 날계란을 깨뜨려 넣었다.

“앗! 그건···”

만류하는 소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훌훌 마시듯이 밥을 입안에 넣던 쿠와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뭔가 입안에 걸린 듯한 물건이 나왔다.

“뭐야 이게? 무슨 털 같은 게···”

“그 계란 한 달이 넘어서 버리려고 내놓은 건데요. 아마도 병아리가 되기 직전의 계란이지 싶은데····”

“우웩! 뭐야?”

“그러게 드시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화장실에 달려가 토악질을 하는 쿠와노를 보면서 소명이 슬그머니 계란을 신발장 쪽으로 치웠다.

돌아온 쿠와노가 다시 밥상에 앉아 미소시루와 생선구이에 낫또를 곁들여 식사를 시작하자 소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스스키노의 용이라고 아시나요?”

“스스키노의 용?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밥을 욱여넣듯 두 공기째 비우던 쿠와노가 우물거리며 밥공기를 내밀었다.

“스스키노의 용을 만나보라고···”

“그것보다 어제 뭔가 감이 잡혔다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나 말해봐. 난 아침부터 나가서 스님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 깐깐한 팀장에게 보고해야 하거든. 오죽하면 고야산의 수행승에게 손을 내밀었을까마는 우리 쪽에서도 그쪽에게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어제 보신 그대로입니다.”

다 먹은 그릇 위로 젓가락을 놓고 합장을 하며 소명이 말했다.

“보신 그대로라니? 난 아무것도 못 보고 허공에 총질이나 해댔단 말이야!”

쿠와노가 어제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는 냥 투덜거렸다.

“여자 요괴였고, 그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만 당한 것으로 봐서는 색귀(色鬼) 계열일 것이라 짐작은 생각됩니다. 느낌으로는 설녀(雪女) 같기는 한데, 설녀라고 단정 짓기에는 뭔가 이상한 것들이 많아서···”

“설녀? 설녀라면 그 눈 귀신, 설녀 말하는 건가?”

“아니요. 아직 단정 지을 단계는 아니지만 일단···”

말을 하다 말고 어제 처음 시계탑에서 만난 여자 귀신이 생각난 소명이 말끝을 흐렸다. 설녀라고 하긴 했지만 설녀라면 오히려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나던 여자귀신이 설녀 쪽에는 훨씬 더 가까웠다. 하지만 호귀(虎鬼)의 말에 의하면 분명히 그녀의 울음소리는 남자를 사모하는 울음소리라고 했고, 어제 한국인에게 한 행동을 보더라도 제법 앞뒤가 맞는 그럴법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제 분석은 조금 시간을 주십시오. 오늘 한번 조사해보고 나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나한테 감추는 거라도 있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스님?”

쿠와노는 출근길에 스스키노에 소명을 내려주고 일단 헤어진 뒤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행히 삿포로 지리는 오오도리를 중심으로 주소나 길이 동서남북으로 잘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소명이 길을 잃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 ‘스스키노의 용’이 있나요?”

“뭐하는 사람이야, 당신?”

“용은 얘들이 보는 만화책에서나 찾을 일이지, 뜬금없이 무슨 용이야 용이?”

그나마 쿠와노가 작아져서 입지 못하는 옷을 얻어 입고 나온 덕에 차림새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일은 없었지만 다짜고짜 사람들에게 ‘용’을 찾는 그를 곱게 응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사이엔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인적 하나 없는 스산한 스스키노의 뒷골목으로 들어선 소명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묘한 한기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다를 것 없는 빌딩이었는데 주변 낡은 빌딩들 속에서도 묘한 요기를 조금씩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막 그가 그 건물의 뒤편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 안에서 여자가 뒷걸음질 치며 나오다 그와 부딪혔다.

“아! 뭐예요?”

나이가 나름 들어 보이는 키가 큰 여자가 다시 일어서려다가 힐의 뒷굽이 부러지면서 휘청하고 쓰러졌다.

“어멋!”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며 그녀를 받치려던 소명의 위로 다시 한번 그녀가 넘어졌다. 밑에 깔린 소명은 그녀의 움푹 파인 옷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모르고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걸 어쩌지?”

“아, 저는 괜찮습니다.”

소명이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이 아저씨가 정신이 없나? 아저씨 말고 내 구두 말이에요. 이거 어쩔 거예요?”

“그건 제가 그런 게···”

“하긴 그렇네. 내가 이 놈의 클럽에 들어가고야 말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사람을 이렇게 헌신짝 취급해. 오카미나 하라고? 나도 작년까지 클럽 모나코에서 에이스를 노리던 사람이라고, 이거 왜 이러시나?”

여자는 혼자서 구시렁거리며 부러진 굽을 다시 맞춰 보려고 애썼다.

“좀 줘보실래요?”

소명에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힐을 맡긴 여자가 작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소명은 구두의 구조를 보고는 요철이 들어갈만한 곳에 맞추고서 벽에다가 세게 한번 후려쳤다.

“이봐! 아저씨. 이 구두가 얼마짜리인 줄 알고···”

“붙었네요. 드라마에서 본 대로 해 본거였는데. 뭐. 일단 고치러 가는 길까지는 빠지지 않을 겁니다.”

소명이 내민 구두는 거짓말처럼 다시 뒷굽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어멋? 이 아저씨 기술자네? 솜씨 좋은데?”

신발을 신고 이리저리 걸어보던 여자는 신이 난 듯 다시 담배를 비벼 끄고 백을 부스럭거리며 뒤져 명함을 꺼냈다.

“나 이런 사람이니까 혹시 스스키노에 놀러 올 일 있으면 연락해요. 내가 한잔 살 테니까.”

“힐러리 마사코? 클럽 모나코?”

명함은 촌스러운 반짝이로 장식이 되어 핑크색 이름과 가게 이름이 뒤섞여 있었다.

“그 가게로 와도 난 없으니까 거기 적힌 핸드폰으로 연락해요.”

다시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여자를 소명이 불러 세웠다.

“혹시 스스키노에 오래 있으셨나요?”

“오래? 지금 나 늙어 보인다고 깔보는 거야?”

여자가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명을 쏘아봤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혹시 ‘스스키노의 용’이라고 아시는지···”

“‘스스키노의 용?’ 무슨 별명이 그래? 여자 예명도 아니고, 엔카 가수 별명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격투가의 별명이라도···아! 혹시 보즈를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네. 호랑이라···, 맞아 그 사람 몸에 호랑이가 있었지.”

여자가 뭔가 기억난 듯 말했다.

“‘보즈’라면 그분이 혹시 스님이신가요?”

소명이 실마리를 잡은 듯 되물었다.

“뭐 그 사람의 전직이 스님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린 다들 그렇게 불러. 그 사람이 오고 나서 스스키노에서 야쿠자들이 잠잠해졌거든. 쓸데없는 뽀찌를 뜯는 일도 없어졌고, 지저분한 폭력사건들도 없어졌고.”

“그분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죠?”

“여느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언제 어디서 곤 있어. 특히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늘 있다고 봐야 맞을 꺼야. 근데, 그 사람은 만나서 뭐하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요. 혹시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르시나요?”

“정 그럼, 밤에 와. 스스키노에서 그를 만나려면 이런 백주대낮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만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여자는 손을 살랑거리며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으흐흐흑~~”

다시 날씨가 흐려지면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예의 그녀의 울음소리와 흐느낌이 귓가를 울렸다.

‘또 시작이군.’

“엣취!”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점퍼 깃을 세우고 스스키노를 빠져나와 시계탑이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 11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발이 심하게 날리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상청이 홋카이도의 기상을 관측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고 길가에 있는 큰 전광판의 뉴스에서 떠들고 있었다.

차가 붐비는 한가운데 허름하고 작은 그 시계탑에 여전히 그녀는 탑 꼭대기에 다리를 걸치고 다소곳이 앉아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번에 소명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제와 달리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정말 그녀의 흐느낌이 눈보라 속에서 속삭이는 노래처럼 들려왔다.

“나는 결국 인간이 될 수 없어. 그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또 한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할 것이지 무슨 귀신 주제에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저 청승을 떠는지···”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소명의 귀에 또렷하게 남자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사거리 신호등에서 우연히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을 흘낏거리고는 담배를 물고 옷깃을 세우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남자가 신호등을 다 건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왜 자신이 남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남자의 눈에도 그녀가 보였고 남자의 귀에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눈보라를 피하려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때, 횡단보도를 막 건넌 낯익은 얼굴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또 만나네요?”

어제 만났던 그 한국인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또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치며 그를 위해 길을 터주듯이 바람이 잦아들며 공기가 따뜻해지는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실례지만 뭐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제 봤던 이상한 복장이 아닌 조금은 헐렁한 옷을 입은 소명을 알아본 한국인도 눈매가 보통은 아닌 듯싶었다. 눈꼬리가 쳐진 선해 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그 역시 맑은 영혼인 탓에 소명의 눈에는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렇게 밝은 빛을 가지고 있는 자가 요괴에게 가호를 받고 있다니, 쉽사리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 전 한국에서 유리공예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유학 온 유학생입니다. 장근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조금은 어색한 투였지만 능숙한 일본어로 소명에게 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악수에 응한 소명이 합장을 하며 인사했다.

“저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고야산에서 수행 중인 승려입니다.”

“아, 스님이시군요. 그런데 저어 혹시 여기에서 한 여학생 보지 못하셨나요? 키가 좀 작고 귀엽게 생긴···”

근석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여학생이요?”

“예. 키가 이 정도 되고, 머리가 까맣고 길어서 허리까지 오고 눈이 동글동글해서 얇은 원피스를 입은···아, 지금 날씨에는 다른 옷을 입었을 려나?”

근석은 자신도 모르게 이리저리 여자의 모습을 형용하며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근석과의 대화중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계탑 위를 보았을 때 그녀는 다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었다.

“아닙니다. 보셔도 잘 모르시겠죠. 여기 나와 있을 리가 없는데···”

“죄송합니다. 여기서 약속을 하셨나 보죠?”

“아니에요. 늘 여기서 만나곤 했는데 지난달에 제가 일이 있어서 나오지 못한 날부터 만나질 못해서··· 참 초면에 제가 별 얘길 다 했네요. 스님은 말투가 이곳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여긴 어쩐 일로···”

두근-

그때 다시 소명의 속에서 뭔가 쿵쾅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바로 횡단보도 반대쪽의 건물 위였다. 아까와는 다른, 눈이 따가울 정도의 눈보라와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그 시작점에 건물의 꼭대기에서 어제 보았던 붉은 옷의 여자가 그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여자는 아무런 말없이 웃음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소명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차가운 냉소를 띠며 긴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그제야 소명은 그녀가 가리키는 존재가 자신이 아니라 근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같았다.

근석은 얘기하던 중에 갑자기 앞 건물 천장을 바라보는 소명의 태도에 멀쑥하니 자리를 피하려고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아무 말 말고 저를 좀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소명이 근석의 팔짱을 끼듯 황급한 걸음으로 삿포로 역이 보이는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건물의 꼭대기에 있던 그녀는 자연스레 북쪽으로 그들을 쫓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눈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눈보라는 더욱더 거세져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이러시는 건데요?”

근석이 당황한 듯 소명의 우악스러운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물었다. 소명은 아무 말없이 그저 앞과 왼쪽 건물 위쪽을 흘깃거리며 계속 잰걸음을 서둘렀다.

“삿포로 역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그런데 좀 알려주세요.”

“그냥 이대로 올라가기만 하면····우왓!”

길안내를 하려던 근석을 그대로 들어 올리듯 소명이 들쳐 안고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돌진하던 택시가 눈길을 돌며 세이부 백화점 입구로 처박혔다.

“이게 무슨···”

손가락으로 장난하듯 눈을 돌린 그녀가 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바로 냉소를 띠우며 소명을 뒤따랐다.

그때, 그 둘을 감싸듯 부드러운 눈보라가 그들을 휘감았다.

‘뭐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석을 안고 있던 소명은 둘을 하얀 천 같은 솜 가루가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흰 천 같은 것으로 뒤덮인 것 같았는데 따스한 느낌과 알싸한 좋은 향이 느껴졌다.

“코유키? 코유키 맞지?”

근석이 혼잣말을 하듯 외쳤다.

순간 빙글 도는 듯한 천의 움직임이 느껴지다가 두 사람은 어느 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고는 바닥을 디딜 수 있었다.

“쉿! 움직이지 말아요. 조금만 아무 인기척을 내지 말고 있어 줘요. 날 믿고.”

여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코유키!”

근석이 금세라도 뛰쳐나갈 듯이 천을 헤집어 봤지만 오히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갇혔다.

띠링- 띠링-

깨끗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천상에서 들리는 것 같은 그 음악소리는 관악기 같기도 하고 현악기 같기도 한 묘한 매력을 가진 음을 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의 정적을 깬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코유키~~!”

귀가 째질 것 같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이! 왜 그렇게 화가 또 난 거니?”

“왜 화가 났느냐고? 왜? 넌 언니라는 이유로 내가 대접해주는 게 마냥 재미있니? 어머니가 하라고 한 일이 왜 이렇게 더뎌지나 했더니만 다 니가 그런 거였어. 결국 니가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오늘 그 인간을 죽이려고 니 근처에서 인기척을 감추고 기다렸는데 말이야. 아주 맛 좋은 중놈까지 하나 더 있었는데 내가 막 잡으려는 찰나에 그 놈들을 낼름 빼내 준 년이 있더라는 거지.”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자신들을 쫓던 여자 요괴가 분명했다. ‘코유키’라고 불린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유이’라는 불린 여자 요괴를 다그쳤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어쨌거나 난 네 언니고 서열이 내가 더 위니까 내가 니 언니라고 불리는 거야. 눈보라를 일으켜 인간들을 모두 얼어 죽게 만드는 일에는 나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니가 함부로 입 놀릴 일이 아니야!”

“흥! 최선? 니가 과연 그렇게 하고서도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제대로 일을 했다고 칭찬받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예정대로라면 벌써부터 삿포로의 반쯤은 얼어 있어야 정상 아니던가? 왜 사랑하는 사람이 오타루에 있기 때문에 도저히 얼릴 엄두가 안 난 것은 아니고?”

“닥쳐! 함부로 날 그렇게 매도한다고 해서 니가 언니가 될 수는 없어! 너야말로 함부로 사람들을 죽여서 뉴스에 화젯거리나 된 것을 보면 어머니께서 참 좋아하시겠구나.”

“뭐라구? 난 너완 달라! 난 인간의 정기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그저 눈만 먹고살 수 있는 너 따위와는 달라!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귀한 존재라고! 알아? 그나저나 이곳에서 인간의 냄새가 나는걸? 어서 숨겨둔 인간이나 내놓으시지.”

“미쳤구나, 이젠! 내가 내 숙소에 인간을 데리고 온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까지 지어내는 걸 보니···”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 혹시 이 방안 어디에라도 숨긴 것이 들킬까 봐 겁나? 어차피 그 인간을 내 손으로 잡아 코유키, 네가 보는 앞에서 모든 정기를 빨아먹는 걸 보여줄게. 알잖아, 내 솜씨.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을 거라고!”

“나가! 조용히 악기를 연주할 여유도 가질 수 없다니··· 너와의 대화는 무의미해.”

“흥! 언제까지고 어머니가 널 내 언니라고 대접해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 너의 능력을 모두 활용하고 이 북국을 얼음나라로 만들어 인간을 멸종시키고 나면 어차피 네 능력이란 쓸모없는 것뿐이니까 말야.”

“알았으니까 그만 떠들어대고 나가라구!”

“오늘은 또 어떤 녀석에게 사랑의 무서움을 심어줄까? 오타루에나 가볼까?”

코유키를 약 올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유이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건들거리며 방을 나섰다. 가만히 목에 걸려 있는 크리스털 목걸이를 만지고 있던 코유키에게 나간 줄 알았던 유이가 문을 벌컥 열며 들이닥쳤다.

“혹시 그 목걸이 안에라도 담아두었나?”

순식간에 코유키의 코앞까지 달려든 유이의 눈을 바라보며 코유키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유이를 밀쳐냈다.

“이 목걸이가 램프의 요정이 사는 램프라도 된다는 거니? 더 이상 너와 동화 얘기를 하고 싶은 맘도 없으니까 나가서 사람을 잡던, 술집 여자 행세를 계속하던 니 하던 대로 하고 살아. 다신 널 도와줄 일 없으니까 나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말고!”

“흥! 그 땡중을 죽인 게 너라고 생색이라고 내고 싶은가 보지? 내가 잡아먹지 못하도록 다이아몬드 더스트로 만들어버린 주제에, 뭘 잘했답시고····”

그렇게 문이 쾅 닫히고 이번엔 정말 유이가 완전히 떠나간 듯했다. 코유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중한 목걸이의 입구를 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기가 뭉글 거리며 나와 두 사람을 싸고 있는 흰 천이 다시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녀의 가슴 골안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향수 모양의 병 안에 그들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었다.

“코유키!”

“근석 씨!”

뻘쭘한 표정으로 멀뚱하니 서 있는 소명은 신경 쓰지도 않고 근석이 코유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소명은 잠시 헷갈렸다. 여자는 아까 근석이 설명한 대로 얇은 레이스 원피스에 긴 흑발을 허리까지 드리우고 피부가 희다 못해 창백한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없어요. 얼른 이곳을 나가야만 해요. 이곳은 당신들이 숨어 있을 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에요. 너무 급해서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빨리 나가지 않으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는 사이라는 것은 소명도 느낄 수 있었다. 묘한 압력이 숨쉬기 곤란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낀 것도 동시였다. 공간 자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낼 것만 같았다. 사실 그보다 더 거슬렸던 것은 아까 ‘유이’라는 여자 요괴가 죽은 사형을 언급하는 듯이 했던 말이었다.

“같이 나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당신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내 전화는 왜 받지 않았던 거고?”

근석은 코유키의 손을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애틋함과 간절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런 그의 시선은 애써 피하며 어쩌지 못하는 코유키의 모습도 그에 대한 간절함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음을 소명은 느낄 수 있었다.

“근석 씨. 일단 이곳에서 나가고 봅시다. 당신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곳은 인간이 있기에는 정말로 위험한 곳이에요.”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코유키를 이곳에 두고 가자는 말씀이세요?”

근석이 소명을 무섭게 쏘아붙이며 다그쳤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나가도록 해요.”

그때 갑자기 그녀가 근석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입가에서 흰 김이 서려 나오는가 싶더니 근석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스님. 죄송해요. 근석 씨를 데리고 가주세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유이는 근석 씨를 가만두지 않을 속셈이에요. 나중에 절 어떻게 하셔도 좋으니까 제발 이 사람을 지켜주세요. 네?”

코유키가 소명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부탁했다.

“이곳은···”

“예. 이 공간(異空間)이에요. 인간들이 오래 있을 수 없는 곳이에요. 아까는 너무 급해서 유이를 피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스님의 영혼이 갖는 향이 워낙 짙어서 유이도 곧 눈치를 챌 거예요. 행여 어머니라도 돌아오시는 날엔 정말 큰일 날 거예요. 얼른 이곳을 나가세요. 저 그림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족자의 그림을 가리켰다. 어제 보았던 붉은 벽돌의 청사를 멀리서 바라본 그림인 듯싶었다. 손을 넣자 그림 안으로 손이 쑥 하고 들어갔다.

“그럼, 오늘은 이만.”

소명이 근석을 들러 엎고 슬픈 표정의 코유키를 뒤로 하고 그림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그림 안으로 다 들어왔다고 생각한 순간, 시커먼 거울이 파문을 일며 발하나가 불쑥 나왔다.

“에그머니!”

복도의 안쪽에서 걸어 나오던 키 작은 청소아줌마가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하며 쓰러졌다.

“할머니, 아니 그게···”

소명은 근석을 둘러업고 경비의 호루라기 소리를 뒤로 한 채 삿포로 역이 있는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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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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