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특집 호러 판타지 멜로
웅크리고 누워 따뜻한 기운에 기분 좋게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던 소명은 이상한 소리에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머리에 밀려왔다. 속도 메슥거리고 갑자기 설사도 나올 것 같은 뱃속이 부글거렸다.
“비켜! 뭐 하는 거야?”
막 눈을 뜨고 정신도 채 못 차린 소명의 눈앞으로 온몸에 호랑이 문신을 한 남자가 떡 벌어진 어깨를 하고는 벌거벗은 채 지나갔다.
“에?”
자신이 잠들어 있던 곳이 공중목욕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몸이 건장한 남자들이 모두 옷을 벗고 수건 하나만으로 중요부위를 가린 채 터벅거리며 김이 나오는 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팔목에도 번호표가 달린 열쇠가 끼워져 있었다. 열쇠 번호를 찾아 문을 열어보니 문에 포스트잇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얼른 옷 벗고 중 냄새 좀 뺄 것! 홋카이도에 와서 온천욕은 기본!
갈겨쓴 글씨를 보고 자신의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킁킁거리다가 이내 옷을 하나씩 부끄럽게 벗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평범한 일반인들은 한 명도 없는지 모두가 몸에 그림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야쿠자들 투성이인 묘한 목욕탕이었다.
조그만 수건으로 중요부위를 가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 안으로 들어서는데 막 설사가 나오려는 신호가 느껴져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한참 설사를 하고 나서야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무서운 아저씨의 표정을 뒤로하고 잽싸게 물을 부어 몸을 덥혔다. 탕 안에 들어가려고 발을 담그니 고야산에서 하던 천연욕이 생각났다.
“어허! 좋다.”
물이 튀는 것에 눈을 부릅뜨는 스킨헤드 아저씨를 보고 조용히 물속에서 움직여 구석으로 가 벽을 기대어 조용히 앉았다.
“어때? 속은 좀 나아졌나?”
바로 옆에서 수건을 머리에 얹어 기대어 쉬고 있던 남자가 귀에 익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 보즈(스님). 아니 류··씨?”
“누가 누구더라 보즈(스님)라고 하는 거야? 산사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수건을 내리며 류가 씨익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나이가 있는 얼굴이었다.
“어때? 역시 온천은 홋카이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물론 노보리베츠나 토카치만은 못하지만 그런대로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잖아. 위를 봐! 그래도 명색이 노천탕이라고.”
남자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정말 자세히 보니 이제 동이 막 트기 시작했는지 하늘이 불그레한 것이 온통 빌딩 숲의 한가운데 나무로 벽을 만든 노천탕이었다.
“류 씨. 사실은 제가··”
“쉿! 지금은 어젯밤에 자네 간에 스며들어간 술독을 빼는 것에 집중하자고.”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 조용하라는 표시를 하고는 다시 류가 수건을 머리에 얹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뭔가 빨리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워낙 작은 탕이어서 큰 소리를 냈다가는 온 몸에 그림으로 도배를 한 야쿠자 아저씨들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서서히 몸이 달궈지면서 탕에 더 이상 오래 있기도 싫어졌다.
“참을성이 여간 없는 친구로군. 그럼 나가서 아침식사라도 하자고.”
천천히 탕에서 일어나는 그를 보면서 소명은 흡사 물속에서 용이 올라오고 있는 환상을 보는 착각에 빠질 뻔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용문신은 마치 용문신이 아니라 몸 전체를 휘감고 있는 살아있는 생물 같아 보였다. 게다가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는 잔근육이 알알이 박혀 있는 그의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험한 수행을 해왔는지 알만했다. 류가 나가는 주위로 야쿠자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트며 일일이 목례를 하는 진풍경도 마냥 신기해 보였다. 가볍게 손을 들어앉으라는 표시를 하며 류가 탕을 나왔고 소명이 쭈뼛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호텔과 붙어 있던 목욕탕은 작지만 아담했다. 옷장에는 간편한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비슷하게 편한 복장을 한 류와 소명이 마주 앉은 것은 호텔 지하의 전통식당이었다.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시골의 소바집 같은 분위기에 가마솥에서 밥을 꺼내 주는 독특한 곳이었다.
“오늘은 일행이 있어서요. 늘 먹던 것으로 두 개 주세요.”
류는 주방 아주머니에게 조용히 인사말을 건넸다.
“제가 누군지, 여기 왜 왔는지, 이미 아시는 듯한데요.”
소명이 참지 못하고 첫 숟갈을 뜨는 류에게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음. 오늘도 밥이 꼬슬꼬슬하니 맛있게 잘됐군. 먹어봐. 이곳 아침은 정말 기가 막히다니까. 거기 날계란 하고 간장도 좀 집어주고.”
엉겁결에 류가 시키는 대로 바구니 안에 있던 계란을 건네고 간장을 주자 밥에 날계란을 깨뜨리고 간장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는 김을 얹어 입 안에 욱여넣고는 미소시루를 마셨다.
꿀꺽하며 자신도 모르게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설사로 속을 모두 비운 탓인지 배가 어지간히 고프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조용히 소명도 그를 따라 밥을 입 안에 넣기 시작했다.
“한 그릇 더 주세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주방에 그릇을 들어 보이는 소명을 보고 주방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니가 직접 와서 받아가야지. 그릇을 들면 내가 가져다줄 줄 알았냐?”
“아, 네.”
소명은 세 공기나 비우고 나서야 배를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밥다운 밥을 먹는 것이 삿포로에 온 지 3일 만이었다.
“이거 마지막으로 맛봐!”
류가 작은 항아리 모양의 요거트 병을 건넸다.
“에? 전 인스턴트는 그닥···”
“일단 먹어봐. 홋카이도에 와서 맥주, 게, 유제품, 이 세 가지를 못 먹고 가면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억울해서 운다.”
그의 말에 뚜껑을 열고 작은 숟가락으로 한입 떠먹어본 소명이 자신도 모르게 눈이 커지며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우왓! 정말! 이건··· 이런 맛이···”
“그렇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어른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다.”
“그건 어디 속담이에요?”
벌써 요거트를 한 개 비우고 주방 끝의 디저트 접시 위로 두 개를 더 들고 오면서 소명이 물었다.
“한국!”
“아! 그러고 보니···”
‘한국’이라는 말에 그 한국인 유학생이 퍼뜩 떠올랐다. 호귀(虎鬼)가 말한 용(龍)이 분명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다짜고짜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온천욕도 했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니 이제 고야산으로 돌아가. 네가 할 일은 이곳엔 없다. 최소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이다.”
“예?”
3병째 요거트를 먹던 소명이 입가에 흰 요거트를 묻힌 채 그를 쳐다봤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거야. 그게 요괴든 사람이든 어쨌거나 연애 놀음에 너 같은 애송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대사형이 이곳에서 행방불명이 된 것은···”
“니가 말하는 대사형이라는 이가 혜능을 말하나 본데 녀석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어서 벌어진 일이야. 그렇게 될 일이었다면 어차피 막을 수 없었던 거야. 녀석의 천명이 그것밖에 안되었던 거고.”
“지금 대사형이 죽었다고 하시는 겁니까? 봤습니까, 당신이?”
“당신?”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류의 눈매가 순간 매섭게 반짝였다.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이기는 했지만 이런 강한 살기는 어지간한 야생동물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에게도 우여곡절이 있듯이 요괴에게도 그런 일이란 똑같이 있는 거야. 알겠나, 이 겁 없는 참견쟁이야. 네 사형이 혜능에 대해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네 사형보다 네가 더 낫지 않다는 전제하에 혜능을 죽인 요괴에게 네가 맞설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 그건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소명이 대들듯이 외쳤다.
“좋아. 한 녀석이 죽던 두 녀석이 죽던 이제 고야산의 일은 어차피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난 지금 이 생활이 좋고 너희들 일에 말려들기도 싫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누가 나에 대해 말해줬는지 모르겠다만··· 날 끌어들이지만 않는다면 난 네가 죽든 살든 상관치 않을 테니까···”
“류 씨에 대해서 말해준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호귀였습니다.”
“뭐? 호귀(虎鬼)?”
류의 눈썹 한쪽이 신경질적으로 툭 치며 올라갔다 내려왔다.
“얘기하자면 긴데, 강력계 형사에게 붙어 있는 호귀(虎鬼)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도 마치 대명천왕같은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관계없어. 그놈이 왜 자네에게 내 얘길 했는지 몰라도, 난 자네에게 해줄 말도 도와줄 것도 없어.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조용히 이 길로 고야산으로 돌아가서 공해 그 영감탱이에게 직접 오라고 말해.”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세요?”
“할아버지? 벌써 공해가 그럴 나이가 되었나? 세월 참 빠르군. 공해의 손자였군. 그래서 이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셨던 거군. 어쨌거나 더 이상 엮이는 일 없도록 하자. 난 이만 일어서겠네.”
“류 씨.”
붙잡는 소명의 외침에도 류는 단 한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식당을 나섰다.
“다 끝났습니다.”
“오호. 멋지군. 이렇게 숨 막히게 뭔가를 구경해 본 건, 어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인 것 같아.”
박수를 치면서 쿠와노가 벌떡 일어났다. 방금 소명이 오타루 역에 잘못 내렸다고 길을 어떻게 찾아가느냐는 전화가 온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그토록 숨죽이고 업무 이외로 뭔가에 장시간 집중해 본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안으로 뛰어 들어간 근석이 나오는 동안 주변에 하나둘 공방 사람들이 작업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쿠와노는 먼저 밖으로 나가 근석을 기다렸다.
“가시죠. 관광지 말고 제가 알고 있는 맛있는 곳으로 모실게요.”
“잠깐! 그 멍청한 고야산 땡중이 지금 이리로 오는 길이야.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대, 자네에게.”
“그래요? 안 그래도 기절한 절 업고 쿠와노 씨 댁까지 데려다주셨다면서요. 잘 되었네요. 한꺼번에 신세를 갚아야죠. 언제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쿠와노 씨~!”
오르골당 오거리에서 차들을 이리저리 피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소명이 두 사람을 불렀다. 대만에서 온 여행객들이 한꺼번에 깃발을 따라 움직이며 여기저기 소명을 밀치며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아 김상! 좀 괜찮아요?”
“안녕하세요.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통 기억에 없어서요. 아직 점심 전이시죠? 저희도 식사하러 가는 중이었거든요.”
“에? 난 아침을 잔뜩 먹어서···”
“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셔. 그리고 자네는 신문 배달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대접을 한다는 거야? 안내나 하지. 오늘은 내가 쏠 테니.”
쿠와노와 소명은 일단 근석이 가자는 데로 오르골당의 뒤편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미나미 오타루 역이 있는 반대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 들어가자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택가 같은 골목이 나오고 그중 얇은 유리가 달린 오래된 가게 안으로 근석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간판 하나 없이 나무틀에 유리가 들어간 문짝에 ‘식당’이라고 페인트로 적은 게 전부인 가게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로 된 탁자에 웬 노인이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 김짱! 오랜만이군!”
노인이 먼저 근석에게 말을 건넸다.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어요. 오늘은 괜찮은 것들로 챙겨주세요. 제가 대접하는 거니까요.”
어색해하며 낡고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는 쿠와노와 소명을 보며 노인이 힘껏 팔에 힘을 주며 밥이 담긴 통을 덮은 천을 거뒀다.
“지난번 고쳐준 시계를 할멈이 어찌나 맘에 들어하던지 오르골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고 아이처럼 좋아해. 김짱에게 귀한 손님이라면 내가 오늘은 한턱 단단히 쏘기로 하지. 오늘 잡힌 녀석들은 꽤 팔팔하다구.”
노인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손질하고 초밥을 만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 솜씨도 솜씨였지만 막 나온 흰 살 생선을 입에 넣는 순간 쿠와노는 고급 정식 집에서도 느끼지 못한 맛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나를 다시 들어 멀뚱히 있는 소명의 입에 넣었다.
“괜찮죠? 오타루에서 40년째 어부를 하신 분이세요. 제가 오타루에 와서 처음 사귄 소중한 분들이세요.”
소명은 방금 넣어준 초밥의 맛에 젖어 어느 사이엔가 아침에 잔뜩 먹은 밥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초밥을 움켜잡았다.
“그런데 아까 자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
“코유키 씨를 말하는 거겠죠?”
소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근석이 놀란 표정으로 소명과 쿠와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네. 그런데 혹시 저를 처음 만났던 날도 그렇고, 어제 저와 만났을 때 시계탑 앞에 코유키가 있지 않았나요? 어제 분명히 코유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으음. 그게, 사실은…, 그 문제로 얘기해 줄 게 있는데요.”
소명은 아무래도 그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쿠와노가 소명의 말을 막았다.
“일단 이 친구 얘기를 먼저 들어보고 자네가 하려는 말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아, 예. 뭐 좋아요. 저에게 안 좋은 일을 하실만한 분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았으니까요. 좀 창피하긴 하지만 얘기해드릴게요.”
근석이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새 그는 그녀, 코유키를 만나던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사실 그날도 갑자기 눈이 엄청나게 내리던 아침이었어요. 저는 한국에서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일본어도 서툴렀고 어학연수 수업에 아르바이트는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용돈 정도는 벌어야겠다고 맘먹고, 겨우 알아본 것이 일본 학생들이 기피한다는 신문배달이었죠. 특히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즈음에는 신문을 배달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거든요. 마침 중앙구 시계탑 주변 지역 사무실과 가게에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을 모집하고 있어서 운 좋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죠.”
눈이 엄청나게 내리던 그날도 근석은 눈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가락을 곧추세우며 눈보라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담당구역 300세대에 모두 제때 신문을 전달하는 것은 눈이 오지 않은 때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지쳐버렸다.
“하아하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입김이 짙은 안개처럼 서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 시계탑을 막 지나려는데, 시계탑 앞의 철 울타리 앞에 한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폭설이 내려 새벽녘에 지나는 차 몇 대를 제외하고 사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그 시계탑 사거리에서 눈이 소복하게 쌓인 눈 속에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그것이 그녀와 근석의 첫 만남이었다.
한참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던 근석의 시선이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물체로 자연스레 돌아갔다.
‘눈사람? 이상한 애다.’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작은 눈사람이었다.
“이봐! 이런 데서 애인이라도 기다리고 있니?”
근석이 용기를 내어 서툰 일본어로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녀가 동그래진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요.”
“그래? 아하하하!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따뜻하게 겉옷이라고 입고 나와야지. 감기 걸리겠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 대꾸를 하지 못하는 소녀를 보면서 근석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내가···, 보여요?”
소녀의 엉뚱한 질문에 오히려 근석이 움찔했다. 일본어를 잘못 알아들었나 싶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건네주었다.
“손이 하얗게 됐어. 집이 이 근처니? 난 뛰어다녀서 괜찮으니까 이걸 껴. 비싼 건 아니지만 꽤 따뜻해. 그럼 얼른 들어가!”
근석은 그녀에게 그렇게 장갑을 남겨둔 채 남은 세대에 신문을 돌리기 위해 잰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근석과 코유키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근석은 늘 비슷한 시간에 그녀가 시계탑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변함없이 늘 같은 옷을 입고 자신이 준 장갑을 들고 서 수줍은 표정으로 시선을 떨군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여어! 또 있었구나?”
“네. 신문배달은 끝났어요?”
“금방 끝날 꺼야.”
“그래요?”
“눈사람을 또 만들었구나.”
그녀가 늘 눈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것은 이젠 어색할 일도 아니었다.
“눈은 봄이 되면 사라지죠. 눈으로 만든 이 눈사람도 그림자조차 남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얼굴이 왠지 슬퍼 보였다. 근석은 그녀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내년에도 눈은 또 올 거야.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그렇군요.”
근석의 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듯 소녀는 금세 다시 밝은 표정으로 근석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추운 날도 이런 예쁜 아가씨를 기다리게 하다니. 몹쓸 녀석이군.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할 걸?”
“후훗!”
근석의 과장되고 어색한 일본어가 우스웠는지 소녀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 난 김 근석이라고 해. 한국인이지. 내 어색한 일본어를 들으면 금세 외국인인 걸 알겠지?”
“전 코유키(小雪)라고 해요.”
“코유키. 예쁜 이름이네. 홋카이도에 어울리는···”
근석이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은 신문배달도 금방 끝났고 금세 또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서 뭐라도 마시는 거 괜찮을까? 여기 이렇게 있으면 춥다구~”
그의 제안에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근석을 따랐다. 시계탑 맞은편에 있는 건물 로비에 자판기가 보였다. 2층이 카페였지만 이런 새벽부터 문을 열고 차를 내어줄 리가 없었다. 주머니의 동전을 털어 넣고 뜨거운 커피캔을 꺼내려 손을 넣으며 근석이 물었다.
“앗! 뜨거. 넌 뭘로 할래?”
그렇게 뜨거운 줄 몰랐는지 따끈한 커피캔을 이리저리 손에 옮겨 들며 코유키는 무엇을 마실 것인지 손가락을 펼쳐 자판기를 가리켰다.
“아, 나는 찬 것을···”
“엉? 이봐! 춥지 않냐? 이런 날씨에 찬 음료라니···”
근석이 황당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코유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cold라고 쓰여 있는 음료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아니, 괜찮아요. 벌써 따뜻한 걸요.”
코유키는 왠지 모를 행복한 표정으로 근석만을 응시했다. 근석 역시 뭐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그런 맑은 미소가 좋았다.
진로를 결정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둘이서 함께 했던 12월에 있었던 오타루 캔들 축제였다. 가끔 아카렌카(빨간 벽돌의 옛 청사)까지 산책을 하기도 하고 큰 맘먹고 하코다테의 야경을 보러 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닌 곳은 삿포로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던 오타루였다.
코유키의 안내로 홋카이도에 와 처음으로 오타루를 가보게 된 근석은 처음으로 오르골이라는 것을 접하고 유리공예를 알게 되었다. 그냥 봐도 예쁘긴 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들으며 마냥 행복해하는 코유키의 모습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런 코유키를 위해 아름다운 유리 공예 작품에 오르골을 넣어준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가 유리공예를 공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유키 짱! 나 이걸 정식으로 공부해보고 싶어 졌어.”
“네? 이걸 근석 씨가 직접 만든다고요?”
“응. 꽤 뜨겁고 만만찮은 작업이라고들 하는데, 오늘 기타이치 거리에 가서 가장 맘에 드는 공예품을 보았던 공방에 선생님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가 볼 생각이야. 어때?”
“이제 곧 눈이 그치고 날이 따뜻해지면 저도 아무래도 아사히카와에 있는 다이세츠 산(大雪山)에 다니러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아마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겨울이나 되어야 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렇게나 오래?”
근석이 실망스러워하는 모습에 코유키도 눈물이 그렁거릴 정도로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근석도 그녀의 집안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도리가 없다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근석은 아사히카와까지 가진 못하더라도 자주 연락하면서 지내자고 약속하고 그때까지 열심히 유리공예를 배워두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신문배달을 마치고 그녀와 시계탑 주변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툰 그의 일본어 숙제를 봐주거나는 하는 식의 데이트가 자연스럽게 지속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근석의 일본어 실력이 학교에서 배우는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능숙해져 있을 무렵, 유키 마츠리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4월이 되면서 더 이상 홋카이도에는 눈이 내리지 않게 되었다. 눈의 시즌이 끝나고 땅이 드러나고 초록이 보이는 홋카이도의 여름이 시작할 즈음이 된 것이었다.
매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몰랐지만 막상 그녀가 사라지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능숙해지고 눈도 내리지 않자, 신문배달은 점점 짧게 끝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즈음이 되자 어학연수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결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녀와의 수많은 만남을 통해 그는 이미 공부하고 싶은 것을 정한 터였다. 둘이 거닐던 오타루로 가 유리공예를 배우겠다고 가라스 공방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여름의 일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오타루에서 수행하는 느낌으로 공방 생활을 하고 있다가 겨울이 되어서 다시 코유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삿포로에서 계속 만났던 거예요.”
근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명은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다짐한 듯 말을 꺼냈다.
“김상.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길 잘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이 ‘예스’라면 날 따라와 줘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연을 말해줄 테니. 단, ‘노’라면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도, 나도 그 여자애도 그냥 환상이었다고 여기고 그냥 잊어버려줘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뜬금없이!”
쿠와노가 소명을 제지하려 하였으나 소명은 단호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 여자애를 좋아합니까?”
“네?”
근석이 갑자기 빨라진 소명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듯 되물었다.
“설령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몇 달이 아니라 영영 사라져 버린다 해도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냐구요!”
소명의 진지한 표정에 근석이 소명의 팔목을 잡고 다짐하듯 말했다.
“어디까지라도 따라갈 테니까 그녀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말해줘요.”
바로 그때, 세찬 눈보라가 부실한 창문을 내리치듯 부수며 소명의 염주에 새겨진 문구들에서 환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7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