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女(설녀;유키온나) 7

납량특집 호러 판타지 멜로

by 발검무적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았나 보지?”

마치 눈보라가 거대한 거인의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름한 어부의 식당 문을 찢듯이 부수고 열어젖혔다. 멀리 오르골당의 첨탑 위로 유이가 그들을 노려보면서 세찬 눈보라를 채찍처럼 휘둘러쳤다.

“뭐, 뭐죠? 저건?”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의 눈에 유이의 모습을 또렷이 보였다. 빨갛게 늘어뜨린 옷자락에 손목과 발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천 사이로 길어진 손톱과 하늘을 찌를 듯한 하얀 머리카락을 한 요괴가 눈보라의 중심에서 그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주변은 얼어붙는 것처럼 기둥에서부터 주변 건물들이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차들이 멈춰 서고 뒷 차에 부딪히고 버스는 통째로 얼어붙으면서 안에 있던 승객들이 갇혀버렸다. 통째로 도시를 얼어붙게 만들려는 듯이 희고 뿌연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만두지 못해!”

소명이 염주를 움켜쥐고 유이에 맞섰다.

“흥! 용케도 어제는 내 손아귀에서 도망쳤겠다? 코유키! 모두 얼려버려!”

가만히 그녀의 뒤에서 코유키의 모습이 겹쳐 나왔다. 역시 오타루를 얼려가고 있던 것은 유이의 능력이 아닌 코유키의 능력이었다.

“유키 짱!”

근석이 그녀를 보고 놀라 외쳤다. 슬픈 눈을 하고는 애써 근석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 뒤로 또 하나의 손가락이 스멀거리며 기어 나왔다.

“이런이런! 저런 녀석이었단 말이지? 우리 코유키를 홀딱 홀린 녀석이?”

목소리만으로도 몸에서 벌레가 기어 나올 것 같은 스멀거리는 손가락이 나무뿌리처럼 긴 손톱으로 이어진 요사스러운 늙은 여자가 천을 찢고 나오듯 공간 속에서 코유키의 몸을 감싸며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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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女(유키온나)!”

소명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요괴들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던 옛 민담과 전설집에 그려져 있던 모습 그대로인 요녀였다.

“음. 제법이야. 날 알아볼 정도로 수행한 스님도 계셨군. 오랜만의 식사로 손색이 없겠어. 안 그렇니? 유이!”

“그러게 말이에요. 어머니.”

유이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명을 노려보았다.

“저게 이제까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살인범의 정체인 건가?”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지만 쿠와노는 지금 시꺼먼 하늘에서 눈보라를 뿌리고 있는 세 요괴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저런 저런! 요괴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인간까지··· 이거 정말 다양한 메뉴로군그래.”

설녀가 입맛을 다시며 긴 혀를 내둘렀다.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러울 정도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코유키! 이 에미가 하는 말을 새겨들으렴. 수명의 힘이 약한 인간과 폭설의 틈에 숨어 눈을 하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어울리지 않아. 인간은 우리가 잠자코 있는 틈을 타서 아스팔트라는 것을 깔고 산을 부수고 건물을 만들어 우리를 쫓아내 버리고 있단 말이다. 이젠 이런 낡은 건물만이 우리의 안식처가 되고 말았어.”

“인(印)! 표(俵)! 상(象)! 지(指)!”

소명이 재빨리 수인을 맺으며 염주를 돌려 그들에게 달려드는 눈보라를 가까스로 막으며 그녀들에게 조금씩 다가섰다. 소명의 입장에서도 근석과 쿠와노를 지키며 세 요괴와 대적하는 것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어디서 이런 요괴들이 갑자기 나타난 거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설녀의 긴 손가락이 그들을 향하자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가 싶었던 거리 이상으로 뒤로 튕겨져 나왔다.

“지금까지 나 혼자서는 제멋대로인 인간들과 이 흉측한 도시에 대적할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해. 수백 년에 걸쳐 내가 완성시킨 이 순수한 눈의 결정인 코유키가 있는 이상은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유이까지 있으니 이제 난 내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게지.”

“이런 제길!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거야?”

쿠와노가 총을 꺼내 들고 그들을 겨누며 몇 발이나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지만 총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소명에게 묻지 않아도 그 역시 직감적으로 이미 알 수 있었다.

“코유키는 강대한 폭설의 힘을 슬픔으로밖에 분출할 수가 없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면 돼. 코유키! 뭣하면 네가 가장 슬퍼할 수 있도록 네가 사랑한다고 하는 저 녀석을 당장이라도 얼어붙게 만들어 버릴까?”

인간을 얼리며 가지고 노는 것이 즐거운 듯 비아냥거리는 설녀의 도발에 코유키가 울부짖듯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어머니! 제발!”

“뭐라는 게냐? 내가 만든 눈 인형 주제에 감히 내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가까스로 눈보라와 요기를 튕겨내던 소명이 이를 악물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도저히 못 봐주겠군! 이 요녀! 그녀는 네 장난감 따위가 아니라구!”

“땡중! 위험해! 그만둬!”

쿠와노가 소명을 잡아채려 했지만 이미 소명이 설녀에게 달려든 후였다. 그러나 설녀가 거칠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한번 휘젓는 것만으로 땅바닥에 나뒹굴러 떨어진 것은 소명이었다.

“인간! 아무리 고야산의 고명한 퇴마승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북국(北國)! 나의 세계. 이곳에서는 너는 피라미에 지나지 않아. 이번 만은 눈감아 줄 테니 꺼져!”

코유키를 감싸 안 듯 키득거리며 바라보는 설녀에게 소명도 지지 않고 외쳤다.

“닥쳐! 나도 처음엔 그럴까 했어! 하지만 화가 나!”

소명이 봐주라의 빛을 모아 봉으로 만들어 설녀를 향해 뛰어올랐다.

“자기 딸이 좋아하는 자를 죽이겠다니···, 요괴와 인간은 잘 되지 않는다고? 그런 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라구! 갈(葛)!”

소명의 길어진 봐주라의 빛에서 둥글 게 인이 맺어져 강한 빛으로 화해 설녀를 향했다. 하지만 설녀는 여유로운 얼굴로 팔을 거두며 그 공격들을 모두 거둬냈다.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그의 말이 귀에 꽂힌 순간, 코유키가 멍한 표정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대로 안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간힘을 쓰며 설녀에게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그래···, 어쩌면···’

“건방진 놈! 이 정도의 힘으로 날 어쩔 수 있을 줄 알았냐? 유이! 저것들을 당장 얼려 죽여라!”

“예! 어머니!”

유이가 입을 크게 벌리자 강한 얼음덩어리가 섞인 눈보라를 퍼붓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소명의 다리가 바로 얼어붙으며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유이! 제발 그만해!”

코유키가 유이의 옆에서 날듯이 낚아채며 얼어가는 소명의 몸을 안고 쿠와노와 근석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무, 무슨 짓이냐, 코유키!”

유이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코유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유이의 외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녀를 바라보며 코유키가 조용히 말했다. 하반신이 얼어붙어가는 소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코유키의 품에서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할게요. 어머니 말씀을 따르겠다고요. 인간 남자 따윈 잊겠어요. 이 도시를 얼어붙게 만들겠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목숨만큼은 살려주세요.”

순간 설녀의 표정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고는 코유키가 세 사람을 그물에 건지듯 옷깃에 감싸 안아 품고서 선착장이 보이는 바닷가로 눈보라와 함께 사라져 갔다. 사라지는 코유키를 보며 설녀는 쫓지 않고서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쳇! 제멋대로 도망쳐버리다니···하필이면 왜 사랑이라는 것 따위를 해서···못난 것!”

뒤를 쫓아 요절을 내겠다는 눈빛으로 나서려는 유이가 설녀의 눈치를 살폈다. 설녀는 아무런 말이 없이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스물 거리는 옷을 거둬 검은 구름 안으로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따라 유이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앙 다물며 사라져 갔다.

“유키 짱··· 맞지?”

세 사람을 힐튼호텔의 옥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코유키가 조용히 돌아서는데 근석이 불러 세웠다. 잠시 주춤했지만 돌아보지 않은 채 코유키는 다시 삿포로가 있는 방향의 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웃고 있는 모습의 코유키에게서 눈의 결정이 산산이 부서지듯 쏟아져 내렸다.

“크르르르릉-”

삿포로가 멀리 보이는 산 중턱을 넘을 즈음에 중저음의 포효할 듯한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이봐!”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누구신가요?”

그녀의 앞쪽으로 구름을 밟고 선 호랑이의 등 위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역광이라 눈이 부셔 정확히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예사로운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을 위협할만한 힘을 지닌 존재라고 직감했다.

“왜 녀석들을 구했냐? 넌 이미 인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승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류였다. 호귀의 등에 걸터앉아 그녀가 이제까지 하는 행동을 유심하게 관찰하던 류가 그녀를 따라온 듯했다. 코유키는 그런 그의 날카로움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스님이···· 했던 말씀이 마음에 스며왔거든요.”

- 요괴와 인간은 잘 되지 않는다고? 그런 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라구! -

“어머니가 만든 설녀인 내게는 어머니의 말이 전부인데···. 지금까지 그런 말을 어느 누구도 내게 해 준 적이 없었거든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하늘을 보는 코유키의 머릿속에, 처음 만났을 때 근석의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고 말하고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오셨으니 지금부터 어머니와 함께 인간들에게 한랭 지옥을 선사하게 될 거예요. 이 세상을 온통 얼어붙게 만들 제게··· 달콤한 꿈을 꾸게 해 준 인사로 여겨주세요. 그들을 데리고 이 북국(北國)을 떠나 주세요.”

“인간들에게 지옥이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주 좋은 생각이군.”

호귀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코유키를 바라보았다. 퍽-하고 류의 주먹이 호귀의 머리에 턱 하고 내려지니 다시 호귀가 고개를 떨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이만···”

떠나려는 그녀의 귓가에 스치듯 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잊을 수 있겠나? 좋아하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있어?”

멈칫하고 그녀의 움직임이, 숨이 멎었다. 류의 시니컬한 목소리는 여지없이 그녀의 마음속 빈틈을 후벼 팠다.

“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지저분한 인간들을 죽이는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어. 하지만 선량한 다른 인간들에게까지 나쁜 짓을 하려 든다면···, 게다가 이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고 예쁜 언니들로 넘치는 내 즐거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난 너희를 가만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하지만···”

코유키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은 무슨? 녀석을 좋아하잖아. 정말로 녀석과 이 도시를 얼어붙게 만들 셈이야?”

말없이 스스륵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류는 못 박듯이 외쳤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코유키!”

“흐흐흑!”

코유키는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의 결정을 뿌리며 삿포로의 하늘을 향해 사라져 갔다.

“이봐 맹호!”

진회색 슈트를 입은 류가 호귀에게 말을 걸었다.

“응?”

호귀가 다시 몸을 일으켜 그를 보았다.

“이런 모습을 나에게 다시 보여주기 위해 부른 건가?”

“나야 지금 붙어 있는 친구에게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니가 그렇게 과거의 후회에 얽매여서 자신의 몸에 맞지도 않는 그런 이상한 옷을 입고서 지낸다고 해서 이전의 니 모습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어. 요괴로 수천 년을 살다 보면 그런 것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

호귀의 말에 그가 피식 실소를 토하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나도 저랬었나? 역시나 세월이 지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건 괴로운 일이잖나! 하지만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 걸, 저 녀석들은···?”

“맘대로 하시구려. 누가 천하의 용을 말리겠나. 하지만 싸워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굳이 참견하지 않겠어. 난 인간의 일이든 요괴의 일이든 이제 참견하는 건 질색이라구.”

“넌 여전하군, 그 성격은. 말버릇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럼 이제 놈들을 치는 건가?”

“아니 일단 설녀를 인간으로 만들 방법을 알아야겠어!”

“뭐?”

“고야산에서 온 녀석도 이대로라면 안 물러날 테고, 저 녀석도 이대로라면 설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거야. 그럼 쉬운 싸움이 되진 않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난 이제 여자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흥! 십수 년을 술에 절어 놀더니만 정신까지 이상해진 거 아냐? 난 맹호라고. 너에게 깃든 그 천룡을 잡아먹기 위해 네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모든 귀신들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 내가 뭘 위해서 그런 것까지 도와줘야 한다는 거지?”

“내가 죽어 천룡을 풀어주지. 그다음에 잡아먹든 너희들이 어떤 짓을 하든 난 상관할 필요가 없다구.”

“뭐라구?”

호귀가 손톱을 세우며 으르렁거리는 모양새로 그를 노려봤다.

“지금 하찮은 연애 놀음을 시작한 요괴와 허접한 외국인을 위해 네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냐?”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 연기를 뿜으며 류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복잡한 건 모르겠고 난 그냥 여자가 우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러려면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어. 내가 알고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방법은 없거든. 어차피 요괴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테고···”

“좋아. 약속한 거다. 그만한 약속이라면 내가 이 북국의 모든 요괴들을 족쳐서라도 그 방법을 알아오도록 하지. 잊지 마라.”

구름을 움켜쥐듯 허공을 달려 나가는 호귀를 보며 피우고 있던 담배를 튕겨 던지며 류가 담뱃갑을 구겼다.

“이젠 이 좋아하던 담배도 얼마 피우지 못하게 생겼군.”

“어떻게 된 거죠? 왜 유키 짱이 저렇게 된 거죠?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

근석은 호텔 옥상에서 사라져 가는 코유키의 모습을 뒤로하고 소명에게 물었다. 소명은 막 녹아내린 얼음을 떨구며 근석에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봐! 이 친구도 지금 정상이 아니라구! 그렇게 다그칠 게 아니잖아!”

쿠와노가 흥분한 근석을 소명에게서 떼어놓았다.

“일단 난 코유키에게 가서 확인해봐야겠어요.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근석이 터벅거리며 옥상을 먼저 내려갔다. 쿠와노가 멍해있는 표정의 소명과 멀어져 가는 근석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저대로 가만두면 아까 그것들에게 당하고 말 꺼야.”

“모르겠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소명이 기운이 모두 소진된 냥 천천히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업혀. 일단 저 친구를 따라가자고. 분명히 또 그녀를 만나려 들 테니까··· 범인이 인간이 아니라고 서에 가서 말해봐야 아무도 날 믿지 않을 거라구. 아니 미친놈 취급을 하겠지. 이게 뭐하는 짓인지···”

삿포로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세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근석을 바라보는 쿠와노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소명, 그렇게 그들은 천천히 그들만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명은 왜 자신이 설녀의 말에 분개하고 코유키의 사랑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요괴는 요괴, 사람은 사람의 운명을 갖고 있어. 내버려 두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어쩌면 류 씨의 말처럼 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이 열차는 곧 삿포로, 삿포로 역에 도착합니다.

열차의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을 듣고는 근석이 열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플랫폼을 빠져나와 스텔라 플레이스와 다이마루 백화점 사이의 남문을 통해 남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다려요! 김상!”

뭔가 결심이 섰는지 쿠와노를 뒤로 하고 소명이 근석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달리는 근석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곁에 다가선 소명을 힐끗 보고서도 계속해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까 내가 말한 진실과 대면할 준비가 되었나요?”

소명이 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실?”

순간 달리던 근석이 우뚝 멈춰 섰다.

“말해줘요, 그 진실. 그녀가 어떤 존재든 간에 난 어디라도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근석의 반짝이는 시선 앞에 소명이 입을 다물고 마주 섰다.

시계탑으로 돌아온 코유키는 여지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아아···!”

나는 누구일까?

이 차가운 북국에 내린 눈의 정수(精髓)로 만들어진 눈사람.

그 애환이 눈보라를 일으키고 대기조차 얼어붙게 하는 설녀의 후예.

하지만 나는 인간을 사모하고 말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지만 눈보라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증오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무작정 미워하고 죽여야만 한다는 게 너무도 싫었어.

눈이 내리는 기간에만 바깥세상에 나와 살 수 있는 이런 운명이 너무 싫었어.

그때.

재미 삼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내게 그 사람이 말을 걸어 주었을 때부터 내 안에서 뭔가가 변해갔던 거야.


“코유키! 내 딸아!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눈보라가 뭉쳐져 그녀의 몸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사람의 형체로 변해갔다. 이내 설녀가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녜요. 어머니.”

시계탑을 중심으로 한 눈보라는 설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더욱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보다 강력한 눈과 얼음을 부를 수 있을지 생각 중이었어요.”

나무껍질 같은 기다란 손가락을 감추며 코유키의 뺨으로 살며시 얼굴을 내밀며 설녀가 사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 그래야지. 남자 인간 따위는 눈보라 저편으로 날려버리고 잊거라.”

살가운 척 구는 설녀의 행동에도 코유키의 시선은 아무런 감정도 싣고 있지 않은 듯했다.

나는···

늘 인간들을 여기에서 보아왔지.

왜 인간들은 저렇게 무리를 지어 다니길 좋아하는 걸까?

왜 인간은 숨을 쉬면 저렇게 숨결이 하얗게 보이는 걸까?

여름에 나는 어머니가 만든 형태대로 시계탑의 기관부 천정의 영하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한 덩어리의 얼음 속에 몸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어.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차마 대설산에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가는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었던 거야.

그 작은 물방울 같은 얼음 속에 갇혀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왜 인간은 저 따스한 세계에서 사는데 나는 살 수 없을까?

눈의 요괴인 내게 있어 죽음을 뜻하는 열기 속에서 어떻게 저들은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작년 첫눈이 내리던 그날, 얼음 밖으로 나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땅에 발을 디뎌봤지.

아무도 없는 새벽 처음으로 땅을 디뎠던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왠지 기분만큼은 들떠 있었어.

거리에서 아이들이 곧잘 만드는 눈사람.

어머니도 이렇게 해서 날 만들었을까?

그때였어. 나를 보고 그가 말을 건 거야.

“여어! 이런 데서 애인이라도 기다리는 거야?”

그 사람은 생전 한 번도 사람과 말을 나눈 적 없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왔어. 아니 무엇보다 내 모습을 그가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지.

그 후로 나는 새벽마다 그 자리에서 서 있게 된 거야.

이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날씨인 한은

인간 이외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사람은 알지 못하기에 나는 그 사실에 주의하며 말해야 했었지만···.

그와 함께 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의 즐거움이란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어.

하지만···.

나는 인간에게 증오받는 어머니, 설녀가 그들에게 원한을 담아 만든 눈사람.

나는 눈보라를 일으켜 인간들을, 이 북국을 모두 얼어붙게 하지 않으면 안 돼.

그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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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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