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女(설녀;유키온나) 8

납량특집 호러 판타지 멜로

by 발검무적

“그게 코유키 씨예요.”

“뭐라구? 당신 함부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어!”

얌전한 것 같던 근석이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소명의 멱살을 잡아끌며 당장이라도 소명을 때릴 듯 노려보았다. 소명은 피할 생각도 뿌리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근석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날 치고 가버리면 되잖아! 거짓말 따윈 할 줄도 모른다고, 난!”

소명의 눈빛을 보며 근석의 시선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내가 졌습니다.”

손에 온 몸에 맥이 빠진 사람처럼 멱살을 잡은 손을 놓으며 근석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그 말, 믿기로 하지요. 당신의 눈을 보면 거짓인지 아닌지 정도는 나도 짐작이 가니까요.”

“코유키 씨는 인간을 증오하는 설녀가 만들어낸 존재예요.”

소명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설녀는 코유키 씨의 순정한 힘을 길러내서 자신의 힘과 합쳐 인간들을 모두 얼려일 심산이에요. 홋카이도를 설국으로 만들어버릴 속셈인 것 같아요.”

“설마···유키 짱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근석이 다시 소명에게 항변하듯 외쳤다.

“내 대사형은 그들을 퇴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죽음을 당했어요. 나는 대사형을 위해서라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코유키 씨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될지 몰라요.”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일을···”

“최근 일기 상태를 보면 이들이 노리는 날이 있을 거예요. 그것이 그들의 힘이 가득 차는 만월의 날이든, 아니면 어떤 특정한 날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쉽게 물러날 요괴들이 아닌데 이렇게 쉽게 물러나는 걸 봐도···”

“그럼 유키 짱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근석이 소명에게 애원하듯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제가 고야산의 주지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볼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라도 김상은 절대 그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돼요. 이건 큰 도움은 아니겠지만 당분간 당신의 영혼이 내뿜는 고유의 빛을 그들이 볼 수 없게 도와줄 겁니다. ”

소명이 바랑에서 작은 묵주처럼 만들어진 염주를 꺼냈다.

“몸에 지니고 다니세요.”

목각 부적이 새겨진 염주 팔찌였다. 근석은 어차피 시계탑에 가도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소명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오타루로 다시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의 코트 뒤에 붙어 있는 작은 짐승의 털 같은 것이 하늘거리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바로 쿠와노의 집에 돌아온 소명은 그간의 정황을 전서구에 담아 고야산으로 날려 보냈다. 조만간 공해 선사에게 회답이 올 터였다.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쿠와노였다.

“아무래도 너무 일이 커진 것 같아. 팀장에게만 말해봤는데 역시 미친놈 취급이야. 윗선에서 고야산 쪽에 도움을 청했던 분도 어쩌질 못하나 봐. 그나저나 신관광 준공식인지 뭔지 반대하는 시위가 도심 한복판에서 터졌어. 못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집 좀 잘 보고 있어.”

“예?”

“어차피 인간이 내가 있어도 어쩔 수 없잖아? 또 부른다. 나 가봐야 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끊는다!”

영락없이 주인 없는 집에서 고야산에서 돌아올 전서구를 기다릴 판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류 씨를 만나봐야겠어.’

다시 바랑을 챙겨 소명이 집을 나선 것은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4시 반이었다.

공방에 돌아온 근석은 탈의실에 코트를 걸었다. 그리고 작업복을 갈아입으려다가 팔목에 걸려 있는 염주를 보았다.

‘꼭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소명의 당부가 뇌리에 스쳤지만 나무로 된 물건을 감고 긴 장갑을 낀 채 작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심스레 손목에서 끌러 락카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요 며칠 사이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터져버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는 그저 뜨거운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며 뭔가에 몰두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음을 그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에 아까 그의 코트에 붙어 있던 털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이 스며들어가는 것도 알 턱이 없었다.

오오도리 공원은 때 아닌 인파로 가득 찼다. 아직 유키 마츠리(눈축제)가 열리려면 두어 달이나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인파들이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근 정부에서 결정하고 홋카이도 지자체에서 자원한 신관광지에 일착으로 선정된 것에 대한 반대 시위 인파였다. 연 이틀째 전국, 아니 각국에서 온 자연보호 단체들까지 끼어 수많은 인파들이 스크럼을 짜서 경찰들과 대치중이었다.

“여러분! 해산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서 이러시는 것은 집회법을 위반한 불법행위입니다. 이렇게 시위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확성기를 들고 기동대장이 앞에서 계속해서 떠들어댔지만 이내 수많은 인파의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그야말로 법원을 중심으로 한 오오도리 공원의 일방통행로는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다. 12군데 모두가 빽빽한 시위 인원들로 꽉 차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오오도리 역 쪽에서는 어디서 오기 시작했는지 새로운 인파들이 꾸역꾸역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어떻게 할까요? 억지로라도 진압해야 할까요?”

난감한 표정의 쿠와노에게 신참 형사가 물었다.

“이 바보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린 그저 지원 나온 것뿐이니까 그냥 눈치껏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들어가면 그만이잖아. 무슨 시위를 제압하는데 강력반이 동원되냔 말이야? 도대체 팀장은 어디 있는 거야?”


빵빵-

사람들의 고성과 주변의 차량이 내뿜는 클락숀 소리로 오오도리 공원 일대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신관광지 정책.

10여 년 전 대지진 이후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제2의 버블경제라는 말이 들리면서 민주당이 실각하고 나서 다시 정권을 잡게 된 민자당의 나부토 총리가 회심의 정책이라며 꺼내 든 카드였다. 일본은 엄청난 국채로 시달렸고 일거리는 창출되지 않은 채 몇 년째 청년실업과 워킹푸어 현상이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뉴딜정책이 시도되었던 것처럼 뭔가 억지로 산업을 활성화시킬만한 계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결정된 것이 도시의 재건을 위한 시골 소외지역의 도시형 개발이었다. 대지진으로 대파된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재건을 위해서는 역시 건설업이 왕성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버블경제 때 도쿄를 중심으로 한 도심의 맨션과 부동산이 문제였다면 어차피 폐허가 된 도시와 전혀 개발이 되어 있지 않은 오키나와와 홋카이도의 경우는 방치된 자연을 대형 리조트나 펜션사업으로 활성화하여 노동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것으로 돈이 돌게 한다는 것이 그 정책의 기본 골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찬성하는 듯했다. 특히 처음 선포된 홋카이도의 경우, 홋카이도 출신의 민주당 총리가 나왔던 10여 년 전에도 그다지 좋은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이 시민들의 무관심과 연결되면서 이번 정책의 시범 지역으로는 적격이라는 판명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대지진 이전부터 지자체의 경제정책 붕괴로 인해 유바리시가 도산이라는 전대 미명의 사태를 겪으면서 그 이미지는 나빠질 대로 나빠져 이제 중앙정부의 제안을 거절할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그나마 삿포로 JR역에 다이마루 백화점이 생기기 전에는 삿포로시가 언제 도산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이번 정책의 첫 시범 지역으로 홋카이도가 지정된 것이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존의 자연친화형으로 개발하지 않던 숲과 산을 모두 철거하고 기존 낡은 건물들을 철거한다는 파격적인 기초공사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5년간의 준비기간 동안 얘기되지 않았던 토목공사와 대형 공사들이 바로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보도했던 지역방송 기자는 보도가 나간 직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의 사체가 발견될 즈음 극적으로 그 테이프를 입수한 NHK는 전격 폭로 방송을 날렸다.

오사카에서 혈기방장 한 시절을 보내던 쿠와노가 일련의 사건과 연루되어 홋카이도로 좌천된 이후 계속해서 홋카이도에 남겠다고 자원했던 이유도 그 광활한 자연을 마구 달릴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점에서는 쿠와노역시 신관광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자위대까지 투입되는 건가요?”

신참 형사의 질문에 쿠와노가 다시 담배를 비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신참! 자네 오키나와 출신이라고 했지? 왜 그리 어리숙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어? 유키 마츠리의 얼음 조각을 누가 만드는지 여태 몰라?”

“예? 눈 조각 작업을 자위대에서 합니까? 미술대학이나 뭐 이런 곳에서 하지 않구요?”

쿠와노가 어이없다는 듯이 뒤의 육상 자위대 마크가 찍힌 덤프트럭에 가득 실린 눈을 가리켰다.

“아!”

실제 유키 마츠리의 하이라이트는 20여 년 전부터 오오도리 공원을 가득 채운 눈 조각상들이었다. 매해 테마가 바뀌기는 하지만 아마추어들의 작품까지 쭉 늘어놓는 것을 보면 2월 둘째 주의 축제를 위해 두 달여 전부터 안전장치로 장막을 쳐두고 한참을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늘 눈이 부족해서 유럽에서 눈까지 수입하고는 했는데 올해는 이상저온으로 눈보라의 양이 많아지면서 예산을 아끼기 위해 미리 눈을 모아서 다지는 작업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요란한 소리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혼란을 깨며 오오도리 공원 전체의 스피커에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 잠시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동안 웅성거리던 삿포로의 시민과 시위군중들이 쥐 죽은 듯 마이크의 하우링과 함께 조용해졌다.

“공원 내에, 혹은 이 목소리를 들으시는 삿포로 시민 여러분들께 알려드립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 일본에 남아 있는 자연공간을 모조리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살기 전부터 이곳에서 자연을 지키고 있던 나무나 자연들은 너무도 소중한 유산입니다.”

“뭐라는 거야? 방송실을 점령당한 거야? 참! 여러 가지로 한다. 언제부터 일본이 이렇게 시위의 강한 목소리를 냈던 거냐?”

쿠와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기동대의 경찰 몇 명이 분주하게 방송실로 달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안돼! 지금 방송실을 들어가면! 오히려 이 사태를 막을 수 없다구~!”

이미 기동대장은 성난 얼굴로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계속 떠들면서 부하들을 데리고 폭주하듯 방송실 쪽을 뭉갤 기세로 쳐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스피커의 남자 목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듣고 있다 보니 너무 자연스러운 목소리다 싶었는데 일본인의 것과는 다른 묘한 위화감이 있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가 자손들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저는 한국에서 이곳에 공부하기 위해 왔다가 일본의 자연 단체에 가입하게 된 유학생입니다. 일본인도 아닌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께 자연을 지키자고 호소하는 것은 자연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이지 그저 자연을 방치하거나 지켜내자는 건방진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원래 자연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후손들의 것입니다. 그것을···”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기동대에게 진압되는 소리와 그들과 대치하는 민간인들의 목소리까지 그대로 방송을 탔다.

“얼른 마이크부터 꺼!”

기동대장의 목소리가 울리고 시위군중들의 와-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간신히 막고 있던 기동대의 장벽이 무너졌다. 먼저 침투해서 방송실을 점령했던 게릴라 조들이 무참히 제압당하는 소리를 듣고 이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난 군중이 되어 내일 있을 신관광 지정 선포식의 단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막을 수 없어. 이 정도가 되면 민간인을 대상으로 총을 쏠 수도 없고, 이런 날씨에 살수차나 최루가스를 쓰는 것도 문제가 된다구. 이미 외신들마저 들어와 있어.”

쿠와노는 강력반을 포함해서 경찰인력을 후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팀장이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자칫 유혈사태로 번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오사카의 거친 시위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본 바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아까 그 방송실을 점거한 녀석이 머리가 좋은 거야. 녀석이 이들을 한데 응집시켜버렸어. 스스로 뇌관이 된 거라구. 하여간 한국 녀석들은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멍청한 기동대장 같으니라구.”

뒤로 철수하면서 쿠와노가 근석을 떠올렸다.

‘그런데 녀석들은 어떻게 할 작정인 거지?’

근석은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그간 준비해왔던 선물을 완성해두기로 마음먹었다. 남은 것은 받침이 되는 크리스털 모양이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조심스럽게 받침을 연결한 작품을 꺼냈다. 유리로 만든 둥글고 긴 투명한 유리 안에 삿포로 시계탑이 들어있고 그 안에 소녀가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오르골 태엽을 감았다가 가만히 세워놓으면 위로 올라온 눈이 계속해서 내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영화 「가위손」에서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돌고 있는 위노라 라이더 같은 소녀의 형체가 빙글거리며 돌고 있었다.

받침 그대로 모양을 장식해서 맞춰 넣으면 이제 끝나는 작업이었다. 밖은 밤인지 새벽인지 모를 어둠으로 휘감겨 있었다.

“근석 씨!”

뒤에서 그를 부르는 그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유, 유키 짱?”

근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검은 머리에 전날 보았던 무서운 표정과 백발을 날리던 그녀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늘 자신을 시계탑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다가서는 근석의 모습을 그녀는 주춤하며 뒷걸음질로 외면하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미안해요. 나 때문에···내가 설녀인 것을 먼저 말하지 못한 것도···”

그녀의 눈에서 그렁그렁 다시 눈물이 고였다.

“상관없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난 그저···”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속마음을 느낀 근석이 더 큰 미안함을 느꼈다.

“미안한 건 오히려 나야. 요괴니 설녀니 그런 말을 듣고 그렇지 않을 거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바랬던 게 내 욕심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미안해. 난 유키 짱이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려고 마음먹어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자기가 결정할 수 없었던 걸 가지고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당신이 설녀인 것 역시 당신이 정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그래도 먼저 말하지 못해서···”

그때 근석이 차갑기 그지없는 코유키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늘 이렇게 손이 차갑도록 놔두지 말라고 했잖아. 장갑은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아무런 말없이 손을 잡아주는 근석의 모습에 그렁거리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 일 없는 거지?”

소명이 전에 했던 말이 걸렸는지 근석이 물었다. 차마 ‘인간들을 모두 얼려 죽인다느니, 이 도시를 모두 한랭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느니’하는 말이 진실이냐고 꼭 짚어서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날 이해했어요. 이제 아무런 일도 없을 거예요.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럼 됐어. 가자. 여태 일만 했더니 배고프다. 나가자, 우리.”

근석이 황급히 만들고 있던 선물상자와 오르골을 헝겊을 던져 덮었다.

“네.”

오타루는 이제 막 캔들 축제의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관광객들이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오타루 운하를 중심으로 준비된 캔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꽤나 운치 있는 장면이 연출되어 보였다. 멀리 여기저기 조명들이, 마치 영화 촬영장처럼 어느 한 사람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더 고즈넉해 보였다.

“다 꿈만 같아요. 이렇게 근석 씨와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니···”

“24시간 식당도 안 보이고 어떻게 하지? 공방에서 라면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겠다.”

오타루 운하의 끝에서 예전 우체국 건물이 있었던 곳까지 거닐었지만 새벽 시간에 열려 있는 식당이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공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할 때 있던 근석의 창고방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앉아.”

근석은 지저분한 담요를 치우고 이것저것 널려 있는 캔이니 라면 봉지니 하는 것들을 한쪽으로 거둬냈다.

“여기서···혼자 지냈던 거예요?”

“응? 처음 왔었나? 아니 지난 캔들 축제할 때 잠깐 왔었잖아?”

라면을 끓이려고 전기포트에 코드를 꽂고 스위치를 올리며 근석이 말했다.

“그, 그랬었나요? 기억이 잘···”

“뭐 워낙 오래됐으니까 한 해가 지난 일인데···웁!”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물컹하는 느낌이 들며 코유키의 가슴이 등으로 느껴졌다. 보드라운 느낌이 따스함과 함께 느껴졌다. 당황한 근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갑자기 왜···”

돌아보려는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꼭 붙잡고 코유키가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줘요. 아무 말하지 말고···”

그렇게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근석의 앞으로 코유키가 다가왔다. 근석이 떨리는 손을 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근석은 너무 놀라 뒤로 그녀를 밀쳤다.

“으악!”

“왜 그래요?”

코유키가 놀라며 뒤로 물러나며 서운한 표정으로 금세 울상이 되어버렸다. 근석은 방금 유리 공방의 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기다란 꼬리를 세우고 귀가 쫑긋 서 있는 짐승의 형태를 한 키타 키츠네(홋카이도 여우)가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유리에 비쳐 있었다.

“쳇! 결국 들키고 만 건가?”

긴 머리를 앞으로 쏠리게 한 뒤 고개를 뒤로 젖힌 코유키의 얼굴이 유이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죽기 전 마지막 선물로 황홀한 첫 경험을 선물해주려고 했는데 그런 복도 네게는 없나 보구나.”

근석은 그녀의 모습에 곁에 있던 부지깽이를 들어 대항했다.

“호호호! 재미있는 인간이네. 내게 힘으로 맞서겠다고?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다운 생각이네. 어디 덤벼보겠니?”

“코유키는 어떻게 한 거야?”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유이에게 달려들며 소리치는 근석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가 비웃으며 높은 지붕의 공방위로 몸을 피했다.

훅-하는 소리를 내며 입으로 강한 바람을 불어넣자 근석의 몸으로 유리파편들이 하나 둘 날아들며 몸에 생채기를 냈다. 손에 있던 부지깽이가 떨어져 나갔다.

“욱!”

“바보 같은 놈. 눈의 결정체인 코유키는 이런 뜨거운 곳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쯤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인간이랍시고 객기를 부리기는···이런 외지에서 죽는 것도 영광인 줄 알라구!”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인간을 미워하는 거지? 너도 요괴나 귀신인 건가?”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뭐 나야 코유키 같은 미생물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구. 난 키타 키츠네야. 아까 저 영혼이 담긴 유리에 비치고 말긴 했지만! 뭐 저런 유리가 사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야. 어쨌거나 난 인간들의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온 식구가 굴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 죽고 만 키타 키츠네의 영혼이라구. 다행히 어머니가 대설산에서 오오누마로 오는 길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이렇게 부활할 수 있었으니 단순히 키타키츠네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너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렇게 따끈한 피를 마시고 너처럼 수수하고 맑은 정기를 어머니에게 가져다 바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이야. 안 그래? 호호호호!”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부여잡고 근석이 불쏘시개를 다시 들었다.

“호오! 또 덤벼 보겠다구?”

“유키 짱은, 우리 코유키를 어떻게 한 거야? 지금 어디 있어?”

“뭐 코유키야 이 도시를 얼어붙게 만들기 위한 촉매제 정도로 어머니가 사용하고 나면 끝이지. 도시를 모두 얼게 만들 정도라면 영력이 모두 소진해버려 다시 눈으로 돌아가고 말 꺼야. 물론 코유키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구. 모든 존재는 그것을 만든 존재를 향하기 마련이거든. 코유키나 나나 어차피 어머니의 것이니까 어머니의 의지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게 본능이라구. 알겠어?”

“닥쳐!”

근석이 빨갛게 달아오른 불쏘시개를 들고 유이의 앞으로 휘둘렀다. 끝에 붙어 있던 유리가 떨어지며 붉은 비처럼 흩뿌려졌다.

치이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가 타들어갔다.

“아악! 이런 건방진! 당장 네 몸에서 피를 모조리 뽑아주마!”

이제 서 있을 기운도 없어 휘청거리고 있는 그를 향해 유이가 빨려 들 듯 가까워져 갔다.

“탄(彈)!”

뭔가에 튕겨나가듯이 유이가 뒤로 튕겨져 나가며 공방의 끝 샹들리에까지 날아갔다.

“누구냐!”

유이가 본능적인 짐승의 모습으로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본능적인 여우의 눈동자처럼 얇게 동공이 위아래로 가늘게 변해 있었다.

“원래 키타키츠네는 귀여운 캐릭터라구···”

쩔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승복을 입은 남자가 삿갓을 눌러쓰고 기다란 석장(錫杖)을 들고서 근석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빌어먹을 놈의 땡중! 죽여도 죽여도 새로운 놈들이 다시 나타나는 이 빌어먹을 고야산의 땡중들 같으니라구! 너희 족속들을 내 오늘 갈갈이 다 찢어발겨주마!”

그녀가 짐승의 움직임처럼 긴 검은 손톱을 늘리며 근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금(禁)!”

남자가 한 손으로 수인을 지으며 석장을 앞으로 내밀자 큰 빛이 번지며 그녀의 몸을 벽에 박듯이 옴짝달싹 못하고 묶어버렸다. 그녀의 긴 손톱이 퇴마승의 삿갓을 반으로 갈랐다.

“뭐냐? 이 요기는? 넌 퇴마승이 아닌가?”

석장을 손잡이처럼 잡은 남자가 근석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어당기며 반으로 갈라진 삿갓 사이로 얼굴을 드러냈다. 류였다.

“제법 하는구나. 키타 키츠네 양. 내가 오랜만에 몸을 풀어서 힘 조절이 잘 안 될 것 같았는데 너 정도면 괜찮겠지? 네가 죽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제 그 정도면 너도 성불할 때가 되었지 싶구나.”

류가 석장을 거꾸로 잡고 천천히 반대쪽을 내렸다. 석장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스릉-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검신(檢身)이 몸을 드러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벽에 꽂혀 아무런 짓도 하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유이를 긴장시켰다.

“뭐, 뭐냐···그 검은? 중놈이 칼을 다 들고 다니질 않나···이 정도로 날 묶었다고 착각하지 마···라!”

투툭-하는 소리와 함께 유이가 빛의 봉을 깨뜨리며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요괴의 냄새가 나는 퇴마승이라··· 네 피맛은 어떤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구나.”

온몸의 옷이 핏빛으로 변하며 그녀가 정신을 모으자 방안에 눈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말마의 비명 같은 기합소리에 공방의 전체 유리가 밖으로 터져나가며 엄청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가 웅얼거리며 기운을 모으고 머리가 다 일어날 정도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류도 칼집을 땅에 박아두고 검에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간다!”

그녀가 있는 높이까지 한 번에 뛰어오른 류의 뒤로 거대한 포효가 들리며 호랑이 그림자 같은 것이 언뜻 비췄다. 달려드는 유이와 맞부딪혔다 싶은 순간 류가 몇 번이고 공중에서 칼을 휘두르고 붉은 옷을 흩날리며 검을 잡고 유이가 맞서는 것이 보였다. 이후에 두 사람의 모습보다는 빛이 뒤엉켜 환한 빛이 붉은 천 사이로 오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유이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악!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인간들에게 우리 숲을 빼앗긴 복수를 해야 하는데··· 나같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짐승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우욱···!”

붉은 옷의 한가운데로 칼로 베인 자국이 보이며 몸이 갈라지며 유이의 목이 뒤로 젖혀져 뜨거운 유리가 달궈진 용로 안으로 떨어졌다.

칼을 석장 안에 넣으며 놀란 근석의 앞으로 다가온 류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어때? 네 모진 운명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게냐?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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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이 남자는 공방에서 대강 짐을 챙겨 나오라고 해놓고는 특별히 말이 없다. 새빨간 바디의 파이어 버드를 타고 운전하며 삿포로로 향하는 내내 특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격하게 운전을 하면서도, 긴장해서 안전벨트까지 꽉 쥐고 있는 자신에 비해 너무도 침착하고 아무렇지 않게 180 이상의 스피드를 유지하는 모습이 어색하다고 근석은 생각했다.

“이상한가? 이런 복장에 스포츠카라니?”

“아니요. 그보다 누구신지··· 소명 스님과 일행이신 분인가요?”

근석의 질문에 거칠게 다시 차선을 변경하며 그가 말했다.

“삿포로 시내로 들어가면 이렇게 속도도 못 내니 원. 난 와타베 아츠로라고 하네. 내 주변 사람들은 그냥 류라고 부르지. 전에 소명처럼 퇴마승을 한 적도 있긴 하네만···”

JR을 타고도 5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그는 스스키노까지 아무리 새벽이긴 하지만 거의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중간에 경찰차의 사이렌이 언뜻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이미 그의 차를 따라오는 것은 무리였다.

“왜 저를 데리고 가시는 건가요?”

“몰랐나? 자네가 설녀들에게 뇌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 때문에 시계탑에서 울고 있는 그 아이의 우는 소리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하질 못하잖아. 좀처럼 시끄럽고 거기에 눈까지 수시로 뿌려대서 아무래도 이번 일만큼은 처리를 해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난 여자가 우는 건 질색이거든.”

“예?”

근석이 뜻 모를 그의 설명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때문에 코유키가 위험해지거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한 아까 그 여자 요괴의 말은···”

“아, 그거?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키타키츠네도 여우라고. 여우는 거짓말이 좀 심하지. 내리자구 여기가 내 집이야. 일단 이곳에 들러 가지고 가야 할 것들도 있고 준비를 좀 해야겠어. 아까 가지고 온 목각 부적도 이젠 몸에서 떼어놓지 말고!”

삿포로 서쪽 모이와산 쪽의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곳 사이로 작은 절처럼 다이몬이 장식된 앞에 그가 차를 세웠다. 천천히 올라가니 마치 암자처럼 작은 별장 같은 집이 나왔다. 산의 가장 위에 있어 집 앞에서도 삿포로 시내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안에 들어서자 짙은 향 내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특별히 절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오래된 물건들이 벽과 거실을 장식하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 한가운데 그랜드 피아노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사방 벽이 책으로 둘러싸인 것 외에는 다른 가구나 물건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커다란 호랑이의 가죽이 바닥에 시체처럼 깔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좀 앉아. 키타 키츠네가 없어졌으니까 설녀도 함부로 요동치고 다니지는 못할 거야. 당분간 코유키인지 그 아가씨도 시계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보라를 부를 테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원한이 모여야 할 모양이니까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은 조금이라도 있는 셈이라고 봐야지. 아마 모레쯤이 될 꺼야. 그러니까 자네도 이것저것 준비를 좀 해두는 게 좋아. 뭐 당장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날아 가버리는 것도 좋은 선택 중의 하나이고. 근데, 술 좀 마시나?”

주방 쪽으로 걸어간 류가 커다란 맥주캔을 6개 통째로 가지고 나오면서 사과를 하나 던졌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메달이라구! 먹어둬.”

삿포로 특산이라는 글이 박힌 별이 그려진 맥주캔도 내밀었다. 피아노 의자에 기대어 앉은 류가 맥주를 한 번에 모두 들이켜고 나서 맥주캔을 우그러뜨리며 다음 캔을 땄다.

“불편한가 보군. 하긴, 설녀를 애인으로 둔 사람이 많은 건 아니니까··· 내가 긴장도 풀 겸 자네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바보 녀석의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그렇게 언제 있었던 것인지 모를 한 남자의 옛날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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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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