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눈보라가 심해지고 있으니 밖으로 나가시는 손님 여러분들은 잠시 실내에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강한 눈폭풍이 몰아치고 있어 지금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오니 건물 내에 있는 분들은 안전한 대피장소로 피해있으시길 당부의 말씀드립니다. 오늘 오오도리 공원에서 예정되어 있던 신관광도시 준공식은 악천후로 인해 연기되었음을 공지해드립니다. 각 지역에서 오신 귀빈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안내의 말씀드립니다···”
마치 지진처럼 바닥을 움직이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지진은 아니었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이 삿포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신관광도시 준공식?”
쿠와노가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접니다. 팀장님. 지금 이상저온현상은 단순한 일기 현상이 아닙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절 믿고 JR을 비롯해서 다른 에너지 동선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기온이 점점 더 떨어져 갈 겁니다. 그리고 시계탑과 아카렌카 주변으로 긴급 공사팀을 보내주세요. 어쩌면 허물어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뭐라는 거야? 무슨 근거로 멀쩡한 시계탑과 아카렌카를 허물어? 자네 미쳤어?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더니 뭐하고 다니는 거야? 당장 서로 들어와서 보고서 작성해! 난 지금 오오도리 공원에 준공식에 나와 있다.”
“예? 오오도리 공원이요?”
2월 둘째 주에 있을 유키 마츠리의 눈조각을 위해 버팀목 공사를 시작하면서 자위대에서 파견 나올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신관광 준공식은 자연보호 단체의 데모로 꽤 많은 경찰이 지원을 나간 터였다.
“뉴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방금 있었던 진동은 지진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갑작스러운 눈폭풍의 영향으로 건물이 흔들린 것이라는 발표가 기상청에서 있었습니다. 현재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급격히 더 내려가고 있습니다. 삿포로를 중심으로 하코다테까지 급속도로 기온이 내려가고 있습니다. 급격한 도로 결빙과 기상악화로 인해 공항은 전면 폐쇄를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조만간 있게 될지 모를 전력 중단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한 대응을···”
홋카이도 방송에서 외치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방송이 끊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큰 울림이 다시 한번 삿포로 전체를 강타했다. 지진은 아니라고 했지만 마치 지구의 심장을 울리는 것처럼 삿포로 전체가 큰 북이 되어 ‘두근’하고 울리는 것 같이 건물과 지반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오오도리의 현장에서 아카렌카를 등지고 시계탑을 바라보는 쿠와노.
스스키노에서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어가는 차 안에서 꺼내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 엄마를 본 소명.
이제 막 준비를 마치고 모이와산을 내려오고 있던 류와 근석.
모두가 이 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온몸을 감아오는 긴장감의 무게만으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을 의미했다.
‘이 싸움의 끝을 낼 때가 온 것이다.’라고 네 사람은 직감했다.
‘시작됐구나!’
막 아카렌카를 지나 오오도리 쪽으로 들어서자 당황하고 소리를 지르며 눈폭풍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비귀환을 그려내고 있었다. 송신탑 쪽을 중심으로 마치 얼음이 파도를 타는 것처럼 바닥부터 자동차까지 통째로 액화질소 안에 담근 것처럼 모든 것을 얼려버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얼음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비명을 지르고 차에서 급히 뛰쳐나와 도망치느라 난리였다. 송신탑을 중심으로 전기가 하나둘씩 꺼지면서 음산한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류를 따르던 근석이 겨우겨우 인파를 헤집듯 파고 나가 힘겹게 눈보라를 뚫고 나오며 외쳤다.
“삿포로에 사는 내내 이런 추위와 눈이 동시에 왔던 적은 없었는데요.”
“지금 이건 단순한 눈보라나 눈폭풍이 아니야. 그나저나 이래서는 시계탑까지 가기도 전에 얼어붙고 말겠다. 이 방법밖에 없겠군.”
류가 칭칭 감고 있던 천을 풀었다. 마사무네가 특유의 푸른빛을 뿜자 반경 1미터가량 투명한 보호막 같은 것이 만들어져 그들의 앞에 반원을 그려내며 눈보라를 튕겨냈다.
“눈도 바람도 들어오질 못하는군요. 그럼?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 바보라고 이야기해주었던 퇴마사가···”
근석이 눈앞에 보이는 경관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놀란 눈으로 류를 보았다.
“서둘러야겠다. 이대로라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져!”
근석의 질문엔 대답해주지 않고 류가 발걸음을 서둘러 시계탑 쪽으로 향했다.
소명은 소명대로 스스키노에서 호신부를 붙여 내달려 빌딩의 사이사이로 살아 움직이는듯한 눈보라의 공격을 피하며 시계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히 시계탑으로 류도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서 힘을 합해야만 한다고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사무네를 쓰는 것이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내 발자국을 보고 그대로 달려 따라와!”
“사람 살려요!‘
멀리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보니 차 안에 갇힌 사람들이 온통 얼어붙은 차 안에서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어붙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신호등 위의 온도계는 이미 영하 4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쿠와노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움직이지도 못한 채 병력을 인솔하고 있었고, 그를 돕는 이들 중에는 대장 라멘의 주방장 노인도 섞여 있었다. 미리 류의 전서구를 통해 도움을 청해둔 스스키노의 어깨들이 노인의 지휘를 받으며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부적을 군데군데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지하철역 위로는 더 이상 눈보라가 요동치지 않고 하나하나 삿포로돔같은 형태의 임시 피난처가 마련되었다.
시계탑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근석의 눈에 눈보라 속에서 첨탑 꼭대기에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코유키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명이 막 도착해서 시계탑 아래에서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코유키 씨! 당장 이 눈보라를 그쳐요! 안 그러면 나는 정말로 당신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고요!”
“그만둬! 유키 짱! 넌 코유키잖아! 요괴 따위가 아니라고! 넌 이런 짓을 할 애가 아니잖아?”
근석이 도착한 것을 본 코유키가 슬픈 눈으로 입술을 앙 다문 채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닥쳐라, 인간!”
코유키의 긴 백발 뒤에서 발을 가르듯 튀어나온 설녀가 입을 벌려 강한 눈보라를 쏟아부었다.
“우와앗!”
마사무네 앞으로 나섰던 근석이 다시 뒤로 나동그라지는 것을 류가 받치고 섰다.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말로 한다고 듣지 않겠지?”
류의 모습을 보고 설녀가 놀란 듯 외쳤다.
“설마, 그 검은 마, 마사무네···? 그렇다면 넌···?”
“날 알아볼 정도라면 이 바닥에서도 꽤 오래 산 요물이라고 인정해주지. 그렇다고 인간의 말이 통하지는 않겠지만 말야.”
류가 근석을 뒤로 빼돌리듯 반원을 그리며 나와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어리석은 것! 그런 자를 데려 온다고 코유키의 마음이 변할 줄 알았더냐? 아무리 마사무네를 지닌 고야산의 호랑이라 해도 이 북국에서 얼음과 눈을 부리는 우리를 당할 수는 없어!”
설녀가 뼈만 앙상한 팔을 벌리며 먹이를 노리듯 직접 날아들었다.
“그건 붙어봐야 아는 거다!”
소명이 성급하게 몸을 날리며 양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봐주라를 세우고 정면에서 설녀의 공격을 맞았다.
“안돼! 그렇게 정면으로 가서는 승산이···”
류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옆으로 틀면서 바닥을 박차던 소명 쪽으로 설녀가 외쳤다.
“솟아오르거라! 수빙(樹氷)! 내게 힘을 다오! 은죽(銀竹)!”
그러자 두껍게 쌓여 있던 바닥의 눈에서 송곳 같은 고드름이 부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솟아 나와 소명의 온몸을 관통하고 시계탑 곁의 고드름 속에서 눈으로 된 송곳 같은 것들이 소명의 몸에 알알이 날아와 콱콱 박혀 들었다.
“욱!”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공중에서 이리저리 고드름에 찔려 소명이 피를 토했다.
“소명 스님!”
근석이 소리를 외치며 달려갔지만 손을 대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장삼에서 피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정(精)!”
한 손에 수인을 지으며 류가 마사무네를 휘두르자 소명을 관통하고 있던 얼음과 고드름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소명이 나뒹굴었다.
“괜찮아요?”
근석이 그를 부축하고 엄호했다.
슬프지만 단호한 눈으로 백발을 날리며 코유키는 손을 꼬옥 쥔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북국에선 영하의 모든 것들이 내 발아래 있다. 내가 부릴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눈보라 정도가 아니란 말이다. 태풍 같은 우박으로 끝장을 내주마.”
설녀가 자신의 몸을 감고 있던 기다란 천을 꺼내자 이번엔 천이 살아있는 기운을 담고 있는 것처럼 태극모양을 그리며 설녀의 후면에 원을 그리다가 한 손으로 앞을 내려치자 그 기세와 동시에 천의 원안에서 보석같이 단단한 얼음덩어리가 한도 끝도 없이 소명 일행을 향해 퍼붓듯 쏟아져 내렸다.
“안돼요.”
움직이지 못하는 소명을 근석이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날 놔두고 어서 도망쳐요!”
소명이 외쳤지만 쏟아지는 우박은 낡은 시계탑의 여기저기를 폭탄처럼 부수며 날아들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우박 덩어리가 폭탄처럼 그들에게 내리 박혀버렸다.
코유키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망울로 포염 같은 눈안개의 틈에서 근석의 모습을 찾는 듯했다.
“호호! 니가 사랑하는 남자도 죽어버리고 말았구나!”
설녀를 둘러싸고 있던 천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감싸며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폭음이 가신 자리에 소명과 근석이 멀쩡한 모습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우박을 피했단 말이냐?”
짜증스럽고 날카로운 굉음 같은 목소리로 설녀가 외쳤다. 자신도 모르게 코유키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설녀의 뒤에서 두 손을 꼬옥 쥐었다. 커다란 검흔이 반달 모양으로 두 사람의 앞에 깊이 패어 있었다.
“그 자는 어디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위로 솟아오르는 검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설녀의 눈이 사색이 되었다.
“제길!”
“살(殺)!”
첫 일격을 가까스로 피한 설녀의 위로 다시 뛰어오르며 피하려는 설녀의 몸으로 마사무네가 쉐에엑 바람을 가르며 시퍼런 빛을 그어 내렸다.
“커어억! 이, 이···놈!”
설녀가 희뿌연 진액을 뿌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 기회를 놓칠 새라 다시 검을 고쳐 든 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수결을 맺으며 최후의 일격을 위해 몸을 날렸다.
“각오해라!”
검끝이 설녀의 몸을 관통할 듯 닿을 찰나 엄청난 눈폭풍이 류의 온몸을 후려치듯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류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반쯤 몸이 얼음으로 휘감기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류 선생님!”
근석이 그를 받겠다고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는지 몸에 얼음이 돋기 시작한 류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어억!”
“그래. 잘했다. 코유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녀가 겨우 코유키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공중에 떠 있었다.
“어머니를 해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입김에서 드라이아이스의 연기 같은 것이 그녀의 입가에 다시 모여들 듯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웁!”
그런 코유키의 모습을 보자 류의 몸을 받치고 서 있던 근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분노로 화해갔다.
“내가 가겠다, 코유키!”
근석은 설녀가 눈치채기 전에 그대로 앞으로 내달려 철로 된 울타리를 넘어 출입금지라고 쓰인 시계탑 문을 부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엔 온통 그간 자신이 보아왔던 코유키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자기를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려 주고, 따뜻한 미소로 늘 행복해하던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 풍선처럼 떠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내달려 낡은 계단을 뛰어올랐다.
‘코유키! 안돼!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두란 말이야!’
‘넌 그런 아이가 아니란 말이야!’
마음속으로 외치는 그의 소리가 그녀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바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녀의 몸에 나 있던 검흔은 다시 천천히 그 흔적이 사라지며 회복하는 듯했다. 설녀는 쓰러져 있는 소명과 류를 보면서 흡족해했다.
“자, 코유키! 저 녀석들은 네가 처리해라. 더 큰 눈보라와 더 큰 눈폭풍으로 이 도시를 얼려버려! 그래서 우리를 쫓아내고 오만하게 설쳐대는 인간들의 도시를 얼음으로 만들어 버렷!”
아직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삿포로의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버렸다. 눈보라와 폭풍이 거세지면서 송신탑의 전원이 내려가면서 도시의 전원이 파도를 타듯 남구에서 하코다테에 이르기까지 기온이 내려가는 정도가 빨라지는 만큼 더 빠르게 전력공급이 중단되어 버렸다. 온 도시는 어둠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과 괴성으로 가득해져만 갔다.
“네, 어머니!”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듯 코유키가 두 팔을 들자 바람이 더욱 거세지며 그녀의 눈이 점점 진한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돼, 코유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다시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와 주춤 뒤를 돌아보았다.
시계탑의 창문을 통해 가까스로 눈 절벽을 기어 올라온 근석이었다. 근석은 아래보다 한층 더 떨어진 기온을 못 견디겠는지 입가에서 거친 숨결을 몰아내 쉬었다.
“근, 근석 씨!”
“뭐냐! 이 끈질긴 인간 녀석!”
설녀가 그의 등장에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녀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늙은 노인의 모습에 가까워져 보였다.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근석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코유키를 향해 외쳤다.
“모두 죽는단 말야! 차 안에 갇힌 사람들이나 이 도시에 사는 아이들, 노인들마저···눈보라를 그쳐, 코유키!”
절규하는 근석을 보는 코유키의 눈빛이 흔들렸다.
“넌 무조건 사람을 증오하고 죽이려는 요괴가 아니잖아!”
흔들리는 코유키를 보며 근석을 해치려는 듯 설녀가 달려들 기세로 소리쳤다.
“이놈 코유키를 꼬실 속셈이냐?”
그러자 지지 않고 근석이 죽을힘을 다해 설녀에게 맞서서 외쳤다.
“그러고도 네가 진정 코유키의 엄마냐? 자신의 증오에 자식까지 끌어넣는 어리석은 부모에게 한 가지만 꼭 일러주마!”
숨이 턱까지 와서 핏기가 하나 없는 얼굴을 되어서도 근석은 결코 기세에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손가락질을 하며 설녀에게 외쳤다.
“자식이건 그 누구이건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것이다. 코유키의 운명은 코유키더러 선택하라고 하란 말이야!”
“닥쳐! 카악!”
소리를 지르며 설녀가 입을 크게 벌리며 아까보다 더 큰 우박 덩어리를 근석에게 쏟아냈다. 하지만 이번엔 아까와 다르게 근석도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날려 설녀를 향해 달겨 들었다.
“코유키가 결정하게 맡겨두란 말이야!”
근석의 몸이 공중에 뜨면서 기운이 빠진 설녀의 양팔을 부여잡고 겨우 매달렸다. 온몸으로 설녀를 붙들고 선 근석이 고개를 돌려 코유키를 바라보며 소리쳐 물었다.
“자아, 코유키! 선택해! 넌 이런 증오에 가득 찬 요괴가 시키는 대로 이 도시를 얼려버릴 셈이야?”
그리고 조금 주저하는 듯하다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
겨우 설녀를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 버둥대는 근석의 모습을 보며 코유키가 주저했다. 순간 자신을 잡고 있던 근석을 반대로 잡으며 목을 조이듯 감싸 안아 코유키를 향해 설녀가 소리쳤다.
“닥쳐! 닥치라구!”
“허억!”
순식간에 근석의 머리가 그녀가 목을 감싼 어깨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인간이 설녀의 몸을 붙들었으니 체온이 내려가 금세 피가 얼어붙고 육체가 썩어갈 거다.”
고통스러워하는 근석의 모습을 보며 즐거운 듯이 설녀가 외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쳐들고 고통을 이겨내며 근석이 씨익 웃어 보였다.
“코유키는 말야. 코유키는 아마도 안으면 이런 느낌은 아닐 거야, 그치? 얼마나 상냥하고 귀여운 녀석인데···. 욱!”
몸이 얼어붙어 가는지 얇은 얼음 같은 회색빛이 근석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설녀에게 대항하듯 가늘어져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이유였군. 그녀가 나와 손을 잡지도, 한번 편하게 안기지 못했던 이유가 말야. 그래도 그녀의 품은 아마 따뜻하고 폭신한 느낌일 거야.”
마치 얼어 죽어가기 직전의 사람이 꿈을 꾸듯 근석의 말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불안하고 슬퍼하던 코유키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갔다.
“그러셔? 그럼 실컷 망상을 꿈꾸며 얼어 죽어가라고! 오호호호!”
그의 몸을 한층 더 옭아매듯 움켜쥐어 짜는 듯 끌어안으며 설녀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으악!”
얼어붙은 뼈마디와 살들이 터지고 깨어지는 고통에 근석이 비명을 질렀다.
“안돼요, 어머니!”
근석의 비명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코유키가 몸을 날려 근석을 빼내기 위해 설녀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코유키, 너···, 네가 감히!”
무섭게 노려보는 설녀에게 코유키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어머니! 제발요.”
그러나 설녀는 단박에 그녀를 한 손으로 밀치며 근석을 품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단념해. 인간과 설녀는 절대로 안 어울려! 이 녀석은 지금 여기서 죽을 게다.”
“어머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코유키가 절규했다.
그때 밑에서 스릉-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리며 바람을 가르고 마사무네가 날아들었다. 설녀가 움찔하며 근석을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근석을 향해 코유키가 입김으로 눈보라를 날려 다치지 않도록 받아냈다. 설녀를 공격한 마사무네는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저절로 주인 류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류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이 녀석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다. 괜찮냐, 꼬마?”
“예.”
근석이 얼어붙던 몸의 얼음을 떨구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류 선생님이야말로, 그 몸으로···”
근석은 오히려 그가 검을 사용할수록 영력의 소모가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은 부들거리는 그의 다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꼬마! 똑소리 나던데? 자기 운명은 자기가 선택한단 말, 말이다. 난 말이지, 내가 운명과 마주 섰을 때 왜 좀 더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운명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도망쳐야 했는지 평생 후회할 뻔했었다. 난 내 몸에 이 녀석을 담아둔 채 이렇게 숨어서 사는 것으로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폼을 잡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주눅이 들어 도망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방금 네 말에 정신이 퍼뜩 나더군. 역시 운명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거겠지? 난 내가 선택한 운명에 애원할 참이었는데 그건 변명일 뿐이었어.”
마사무네의 검신을 한주먹에 움켜쥐고 내리그어 피를 묻히자 마사무네가 붉은 빛으로 달군 쇠처럼 달아오른 듯 보였다. 역시 피를 먹는 요도임에는 틀림없었다. 피가 흐르는 손에 옷을 찢어 감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류가 외쳤다.
“그러니까 앞으로 분발하기 위해서라도 저 꼬마 설녀와 네 녀석의 웃는 얼굴을 난 꼭 봐야겠단 말이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녀가 완전한 할멈의 얼굴이 된 채 외쳤다.
“안됐구나! 넌 못 봐! 그렇게 피를 흘리고서 이것을 받아칠 수는 없을 테니까”
다시 설녀의 뒤로 천이 태극 모양을 그리면서 그녀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우박 덩어리와 눈보라가 쏟아져냈다. 마사무네를 쥐고 있던 류가 단호한 표정으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쏟아지는 우박에 맞서 검기로 맞받아냈지만 점차 설녀의 기운에 밀려 류의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곁에서 바라보고만 있던 코유키가 ‘어머니!’라고 절규하듯 더 강한 눈폭풍과 우박을 입으로 쏟아내며 설녀의 눈보라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근석을 막아서 있던 류는 그 자리에서 겨우 마사무네로 지탱하며 휘청거리는 몸을 버티고 섰다.
“무, 무슨 짓이냐? 코유키?”
설녀가 기운이 빠진 퀭한 눈으로 무섭게 노려보며 코유키를 다그쳤다.
“어머니, 제가···, 선택하겠어요.”
눈보라 속에서 다소곳이 손을 모은 그녀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설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소명과 근석, 류 모두 놀란 눈으로 코유키를 응시했다.
가만히 한 팔을 들자 눈보라가 모두 그쳐버렸다. 설녀가 흥분해서 핏대를 세우며 가늘고 딱딱한 손가락으로 코유키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이 에미를 배신하겠다는 거냐, 코유키? 널 원래의 눈송이로 되돌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설녀와 달리 코유키는 다소 편안해진 얼굴로 다소곳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제 생명은 처음부터 어머니가 주신 것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코유키···”
근석이 뭔가 결심한 듯한 코유키의 표정에서 불안감을 느끼곤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나 코유키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였다.
‘어머니를 배신할 수도 없고, 근석 씨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차라리···’
그런 그녀의 결심을 읽었는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설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갔다. 그녀의 손이 점점 불투명한 얼음으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 옛날 인간은 날 쫓아내고, 배신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할멈의 얼굴에서 무서운 얼음 도깨비의 가면처럼 변하며 눈이 치켜 올라갔다.
“이젠 코유키마저 속이려 들었겠다! 은죽! 수빙! 북국에 있는 모든 살기여 이곳에 모여 이 녀석들의 심장을 꿰뚫어다오!”
피를 토하듯 설녀가 두 손을 후려치듯 허공에 때리자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뿌옇게 얼은 얼음송곳과 고드름 같은 것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눈밭에서 일어나 류와 근석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 되겠어요. 물러서!”
근석과 소명의 몸을 꿰뚫어버릴 듯한 굵고 긴 얼음송곳들이 그들을 향했다. 그때 다시 류가 마사무네로 붉은 원을 그리며 얼음송곳을 모두 날려버렸다. 이미 류는 피가 물든 손에 마사무네를 아예 묶어두고 꽉 움켜쥔 채 서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을 지키느라 이미 그의 장삼에는 서너 개나 되는 얼음송곳이 박혀 있었다. 다시 그런 그에게 얼음송곳이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를 향해 날아들던 얼음송곳들이 모조리 박살 나며 눈보라가 그친 하늘에 호랑이의 포효가 울렸다.
“맹··호냐?”
숨을 몰아쉬던 류의 가 눈앞에 호귀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한심스럽다니까··· 내가 널 죽이기 전에 어느 요괴도, 아니, 어떤 존재도 널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내 말을 잊고 있었던 거냐? 약속을 어기고 먼저 죽어버리겠다는 무책임한 짓을 하려던 것은 아니겠지?”
거대한 호귀의 등장에 설녀가 잠시 주춤하다가 코유키를 한 손에 감싸 안으며 웃었다. 코유키를 안자마자 다시 설녀의 얼굴이 예전 얼굴로 돌아가 기운을 되찾는 듯했다.
“뭐냐? 너도 요괴 아니냐? 요괴가 인간의 편을 들다니···인간의 편을 든다면 너 역시 그들과 함께 이 눈 속에 파묻어주마!”
“호오! 감히 북국의 설녀 따위가 천하의 맹호님께 시비를 걸겠다는 건가?”
호귀가 몸을 일으켜 세우듯 전투 자세를 취하려 드는 순간 호귀의 곁에서 구름이 일며 구름이 뭉치듯 엉기며 사람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기다려주시오. 이제부터 내가 말하겠소. 맹호!” 흰 수염으로 얼굴의 반을 뒤덮은 산신령이 지팡이를 짚고 모습을 드러냈다.
“카,칸나 카무이···”
설녀가 놀란 듯이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주석.
수빙(樹氷)
어는점 아래에서 얼지 않은 구름 · 안개의 입자들이 나뭇가지 등에 부딪쳐서 얼어붙는 현상을 말한다. 연한 상고대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무빙(霧氷)으로부터 발달한다. 약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받이[風上] 쪽에 발달하고 깃털 모양의 백색 얼음으로 섬유상의 구조이다. 기온 -5℃ 이하, 풍속 1∼5m/s로 세지 않을 때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