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46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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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모순이라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기실 한국인의 기묘한 ‘집단주의’의 의식은 한국인들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과도 아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택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집단주의’의 기본성향이라면, 제가 앞서 한국인의 ‘집단주의’에 ‘기묘한’이라는 방점을 굳이 찍어가며 설명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배경에는, 집단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똑똑한 척하는 헛똑똑이들의 성향이 한국인들에게는 다분히 깔려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여러 사람들이 가는 쪽을 생각 없이 따라가려는 본래의 집단주의적 성향을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해서 그들이 가는 방향이 아닌 쪽으로 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반대급부에 걸고서 자신은 실패한 그들과는 달리 더 똑똑하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죠.
일생이 50대 50의 확률로 이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면 저쪽으로 가는 것의 두 가지만 있다면,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생을 도박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조차 그들은 작은 이익 앞에서 쉽게 간과하곤 합니다. ‘저 사람들과 나는 다를 거야’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매번 하고 패가망신의 길로 가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앞에서 살펴보았던 한국인의 심리 중에서, 내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내가 손해 본다라는 식의 묘한 심리는, 한국인들에게 먼저 사과를 하거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안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이상한(?) 상식으로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이 맞는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과정조차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나중에 집에 혼자 가서 할지언정 그 현장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피해심리마냥 작용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가슴 아픈 식민지 시기에서부터 그 잠재적 싹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는 물론 언어와 그 모든 것들을 부정당한 민초(民草)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은 그야말로 굴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치욕적인 굴욕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반항과 저항의식은 독립운동의 방식이든 아니면 소심하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문해력이 떨어져서 말을 알아듣지 않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경우,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의지가 처음부터 청자에게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것의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이 아닌, 아예 듣지 않을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 내용을 충분히 듣고 나서 반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형태라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상대를 무시하거나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형태의 소심한 반항을 드러내는 것이죠.
대단한 독립투사라서가 아니라 불합리하게 짓밟히는 대상에게서 보이는 반항심리 같은 것이 그들의 명령에 반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신에게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 최대한의 범위에서(혹은 그것을 넘나들지라도) 그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이 최대한의 반항이라고 본능적인 무언가가 꿈틀거렸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꼴 보기 싫었던 이들은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일본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혹은 탁월한 처세랍시고 그들의 곁에 붙어 같은 민족들을 더욱 핍박하고 옥죄였던 친일파들이었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같은 민족인 그들이 권력자의 곁에 붙어 가했던 명령과 억압들이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굴욕이고 모욕이며 치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단순히 동조하지 않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임을 명백하게 표명하는 또 다른 몸부림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뒤에 다루게 되겠지만, 식민지를 겪지도 않은 한국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일본은 무시하거나 일본과의 경쟁에서는 결코 져서는 안 된다며 이를 가는 묘한 피해의식도 이러한 과정에서 잉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사적 과정에서 보이는 심리를 여실히 증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직업군들이 있습니다. 바로 군인, 교사, 목사입니다. 아직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늘 군인들이 문제였습니다. 군사정권이 그 대표적인 흑역사의 살아있는 증거인 셈인데요. 군인은 명령이 생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령불복종은 처벌대상으로 엄격하게 상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직업이 바로 군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이죠.
그런데, 나라를 위한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대의명분이랍시고 내세워, 한 사람의 군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제멋대로 장기집권을 꿈꾸다가 결국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것을 보고 야망을 불태웠던 머리가 반질거리는 또 한 명의 군인이 자신도 못할 것이 없을 거라며 다시 군사정권을 꾸립니다. 최근 개봉하여 당시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분노측정 챌린지를 유행시킨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그 과정은 아주 잘 그려져 있습니다.
현실보다 더 현실스러운 그 영화 속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세대들, 특히 여성 관객들이 분노했던 부분은, 정의로움 따위보다는 나라를 위하는 군인이라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움직였다는 사실과 그 욕망덩어리들이 상관이랍시고 내린 명령에 군인이라 명령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익대차대조표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관객들이 더 불쾌했던 것은 그들 자신을 포함하여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군인, 교사, 목사들이 특히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 듣는 직업군의 대표로 꼽는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그 직업군의 공통점을 살펴볼까요? 맞습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직업군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거나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명령을 하여 행동을 촉구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바꾸거나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일을 주로 하는 자들이 정작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직업군 베스트 3에 꼽힌다는 것은, 자신이 그런 과정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 이면을 다 알고 있다고 혼자서 똑똑한 척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능에 더해, 한국인들이 독특한 특성이 가미되면서 최강의 사오정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성향을 보편적인 인간의 본능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몇 가지 결론적 특징이 나옵니다. 바로 전편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일단 이런 인간군들의 특징은 자신이 옳다고 믿습니다. 자기 최면의 수준까지 들어간 확증편향이 강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죠. 무엇보다 그런 자신이 옳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굉장히 강하다는 특징도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런 인간군의 특징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즉,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것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던 생존본능이든 간에 그들은 일단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자신의 패배인정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공식을 만들고 생활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고 이제까지 집단주의적 분위기에 휩쓸려 결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감의 결핍에도 기인합니다. 본래 50대 이후의 장년기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퇴화 및 강화현상들이 젊은이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 한다는 인상을 외국인들이 갖는 이유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 이제 인정하실 수 있으실까요?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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