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56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816
한국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화중 기혼자들에게서 보이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새롭게 생기는 ‘가족’, 바로 ‘시월드’에 대한 다양한 갈등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텐데요. 시월드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결혼을 결정하게 되면 생기게 되는 새로운 두 집안의 결합은 결혼이 결코 사랑만으로 그리고 두 사람이 좋아서 함께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식의 형태에서부터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제도적 특성은 각 나라마다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들의 눈에 한국인들의 결혼문화가 가장 독특한 특성을 보이는 것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혼수문화가 아닐까 싶은데요.
위의 주제에 쓰여 있는 것처럼, 결혼을 하면서 함께 살 집을 장만할 때 한국에서는 너무도 당연히(?) 남자 측에서 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처럼 자리 잡았었습니다.(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최근 그나마 함께 집을 구하는 젊은 세대들도 제법 늘어났기 때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역시 남자가 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입니다.)
본래, 혼수(婚需; dowry)라는 용어는 혼인에 필요한 물품 혹은 금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서양 문화권의 전통은, 신부가 될 여자가 혼인할 때 갖고 가는 돈이나 물품으로 따로 특정하여, ‘신부지참금’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혼수, 예단, 예물 등은 바로 이 신부지참금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역사가 더 오래된 신랑이 여자집에 직접 건네주는 돈은 굳이 번역하자면 ‘신부값(bride price)’이라고 부르며 그 문화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문화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세계의 여러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혼인풍속은 혼인으로 인한 여자 측 손실(한 사람의 노동력이 여성의 집안에서 빠져나가 남성의 집안에 보충된다는 계산법)에 대한 보상이라는 성격을 띠기 때문인데요.
동양의 오래된 전통을 기록으로 찾아보더라도, 『삼국지三國志』 「동옥저전東沃沮傳」에 기록된 혼인 방법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여자가 10세가 되면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 그 여자를 맞이하여 장성할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여자 집으로 돌아간다. 여자 집에서 돈을 요구하는데, 지급이 끝나면 신랑 집으로 온다.”
이러한 문화가 굉장히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또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이전 성리학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면서 사회적 절대규범인 양 자리 잡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처가살이가 지배적이던 시절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부 측이 혼수를 많이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부가 혼인을 하게 되어도 자기가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이었는데요.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혼수는 청색과 홍색의 채단(綵緞)이 기본이었고, 그 밖에 집안 형편에 따라 혼숫감의 종류도 비단·광목(廣木)·옥양목(玉洋木)·목면(木綿)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혼인풍속이 시집살이의 형태로 바뀌면서 신부는 신랑 집으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자기가 평생 쓸 옷감이나 생활필수품 등을 혼수로 준비해야 했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런 사정은 20세기 전반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일제강점기의 서울 여성들은 혼수를 준비해 시댁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혼인풍속이 사회변화에 발맞춰 달라지면서 처가거주제(妻家居住制)나 시가거주제(媤家居住制), 신거주제(新居住制)에 따라 혼수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혼인 후에 처가나 시가에 거주할 때에는 이미 존재하는 가족 내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혼수가 비교적 명확하지만, 신접살이를 하게 되면 새로운 살림살이를 위한 혼수품을 세부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최근 변화된 한국 결혼문화들을 살펴보면, 통상 결혼할 때 식장의 연회비용은 축의금을 받은 신랑 측과 신부 측에서 자신들의 하객을 나누어 비용을 치르고, 공통으로 사용된 식장의 비용 등은 절반씩 내는 합리적인(?) 방식을 보이는 듯합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현실비용에 해당하는 살아야 할 집은 전술한 바와 같이, 남자 측에서 준비하고, 그 안에 들어갈 살림살이 일체는 여성 측에서 준비합니다. 여성이 혼수라는 이름으로 신혼살림에 들어갈 살림들을 모두 장만하는 것은 집안 살림을 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비롯되었는데요.
결혼예물이라고 하여, 두 사람이 낄 결혼반지에서 시작해서, 서로 각 부모님들의 옷, 그리고 시월드 측(?)에서는 신부의 보석류를 종류별로 한다던가 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다양한 ‘예단’이라는 이름의 혼수가 또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묘한 집단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사는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 어쩌고 하면서 혼수가 결혼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내내 두 집안간의 싸움거리 주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혼수 밀당 싸움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 보입니다.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이라는 책에서는, ‘혼인을 함에 있어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문중자(文中子; 王通)의 말을 인용하며, 혼담을 나눌 때 재물을 언급하는 사람과는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과다한 혼수에 대해서도 경계한 바 있어, 그 오랜 시절에도 제대로 된 비판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 구체적인 근거로 “혼인을 의논할 때에는 먼저 신랑과 신부의 성행과 가법(家法)이 어떠한지를 살펴야지, 구차하게 부귀를 흠모하지 말라.”라는 사마광(司馬光)의 말도 함께 인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혼인에서는 물질보다 혼인하는 사람의 인품을 보아야 하고, 혼인의 올바른 정신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옛 문헌자료들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미 그 당시부터 혼수 때문에 다양한 논쟁과 싸움이 있을 정도로 이 이상한(?) 문화로 인해 사회적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의 혼수를 대신하는 대체물 같은 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 남자가 집 장만을 한다는 문화인데요.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시댁으로 들어가 살던 시절, 즉, 분가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던 조선시대에는 남성 쪽에서 집 장만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성이 남성이 살던 집에 들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시대가 변화하면서 결혼을 하고 신접살림을 차리게 되면서 혼수문화도 묘하게 변화하게 되고, 무엇보다 신혼집을 누가 장만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의 집, 즉 시댁으로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적 흐름은 그 시댁을 대신하는 것이니 남성이 집을 장만하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 이후 문화가 묘한 융합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부모의 집에 살지 않고 바로 자동 분가를 하게 되는 경우, 시댁에서 제공해야 할 숙식을 시댁으로 시집‘오는’ 여성을 위해 남성이 준비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가 남성이 집을 제공하게 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었던 겁니다.
시댁으로 들어가던 시대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신혼집을 준비하던 시대가 그리 길지 않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다각도로 감안해 보면, 남성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한국의 독특한 혼수문화는 그야말로 가부장적인 제도가 짊어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제 시대가 변모하면서 둘이 같이 마련하거나 심지어 경제적인 상황이 더 좋은 여성 쪽에서 마련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부동산이 갖는 의미와 최근에 쭉쭉 늘어난 이혼율을 감안한다면 누가 집을 마련했는가와 경제적인 주도권 내지는 재산분할등의 의미를 살피는 것으로 한국인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상당히 유의미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또 논의하기로 하죠.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