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95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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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워낙 많이들 쓰는 용어이고 막연하게나마 우리 집은 그 중산층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 법률로 정해놓은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한국에서의 중산층을 말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준을 물어보면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냥 딱 보기만 하더라도 위 다섯 가지 기준은 하나같이 경제적인 요소가 그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 비중은 약 60%라고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모순이죠. 한국의 60%나 되는 사람들이 위의 다섯 가지 기준에 맞출 수 있다고 한다면 누가 어렵게 전세를 살고, 대출을 갚아가며 하우스푸어로 헐떡이고 통장에 1억 원 이상이나 있는데 대출은 또 뭐하러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중산층의 기준은 어떻게 잡히는 거고, 도대체 중산층이 아닌 빈민층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왜 자신들을 중산층에 속한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일까요?
먼저, 중산층에 대한 개념이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처럼 경제적인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장 대별점이 크게 느껴지는 프랑스인들의 중산층 기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 역시 법률로 정하거나 어디에서 기준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아래의 기준은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면서 나온 키워드를 중심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프랑스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 선진국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한국인들도 적지 않겠죠? 그래서 영국과 미국에서 평균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중산층에 대한 기준도 가지고 와 봤습니다. 아래 한 번 그 기준을 비교해 보시죠.
자아, 뭔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차이가 나고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 인정이 되시나요? 선진국 3국의 기준과 비교해 보면 한국이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에 기준점을 두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재미있는 사실은 불과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과거, 조선시대에 중산층이라고 언급되었던 기준은 위에 살펴보았던 서구 선진국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으로 언급되었던 부분을 정리한 부분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본능 중에서 물질만능주의는 새삼스럽게 한국인에게만 도드라지는 특성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 선진국의 국민들이라고 해서 돈을 싫어하거나 돈에 가치를 두는 물질만능주의적 성향이 없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치 기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부분부터 다시 되짚어봐야 할 듯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인들 중에서 중산층은 그야말로 아주 가는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그리 두툼한 중산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손 치더라도 부채가 없는 30평대 아파트(그것도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긴 하겠으나 여기서의 방점은 ‘부채가 없는’이 아닐까 싶습니다.)나 통장 잔고에 1억 이상이 있는 집이 통계자료에서 나오듯이 한국민의 60%나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통계조사를 하면서, “중산층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이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 기준에 부합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모두가 좌절하며 자신이 중산층이 아닌 빈곤층 혹은 극빈층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통계조사에서는 아주 러프하게 “당신은 중산층이십니까?”라고 물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이 답변에 한국인들의 특성이 잔뜩 녹아들어 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잘하냐며 성적을 직접적으로 묻는 질문의 방식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를 묻는 것과 같은 묘한 한국인의 특성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어떤 학생도, “저는 1등입니다.”라던가 “저는 꼴찌입니다.”라고 구체적인 등수를 말하지 않죠. 대개 “그냥 그냥 중간정도예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말로 그 수많은 대답을 한 학생들이 정확하게 전교 성적에서 중간을 차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최소한 반 등수에서 중간을 차지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한국인들에게 중산층인지를 묻고,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질문은 아프고 아린 부분을 쑤셔 찔러 물어보는 것이라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내듯 중간정도는 하고 있다고 자부하죠. 그렇게 답변하는 심리적 저변에는 두 가지 이유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아주 위도 아니지만 아주 아래도 아닌 가장 많은 평균적인 이들이 속해 있는 곳에 있다고 말하는 익명성에 숨어 자신이 비교의 대상이 되거나 뾰족한 표본대상의 오차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피력하고자 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실제로 내 성적이 반에서 거의 뒤쪽이고 내가 사는 형편이 중산층은 고사하고 빈곤층에 가깝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그것을 입에 담고 명명화하는 순간, 그것이 공식화되고 특히 그것을 물어보거나 그 이야기를 드는 사람에게는 내가 인정한 사실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극히 피하고 싶어 하는 불안감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얼마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평범한 질문에 실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금액을 말하는 사람과 “적당히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의 심리가 판이한 것과 비슷한 결과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좀 되실까요?
한국인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기준이 위에 살펴보았던 서구 선진국과 크게 다릅니다. 내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행복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혹은 덜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자신의 행복이 정해진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반에서 2등을 하거나 심지어 1등을 하지만 전교에서는 10등을 한다면 어디 가서 성적을 묻는 이들에게 결코 나는 “1등이다.”라거나 “내가 그래도 상위 1%이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나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포식자에 대한 상대적 빈곤감이 심리저변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이런 비교우위를 기준점으로 삼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오래된 병폐는 단순히 사회적 경쟁을 초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적 비교로 인해 피폐해지는 정신적 붕괴를 막기 위한 반대급부들이 일어나는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할 텐데요. 수년 전에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던가 최근에 유행하는 특별한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등이 진정한 한국인의 절대다수에 해당하는 이들이 자신이 비교하위의 대상으로 지목당하는(?) 수치를 느끼고 싶지 않아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마치 한국사회나 주변 사람들의 억지에 못 이겨 비교하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만들고 그 굴레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 자신이니까요.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이미 경제적인 비교하위에 처한 현실을 인지하고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고 합니다. 연애는 하고 싶지만 연애 이후에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출산이나 육아를 포기하며, 서울은 언감생심 수도권에 30평 아파트는 고사하고 혼자서 살 공간조차 자가로 얻는 것은 포기한다고 합니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도 50세 이후까지 임원직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아예 구직 자체를 포기하고 캥거루족으로 부모님의 집에서 기생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죠.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거나 정부의 정책이 실패했거나 따위가 주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서구 선진국의 국민들이 한국인들보다 절대적으로 수입이 낫거나 상대적으로 더 윤택한 생활을 하지 않지만 행복지수가 한국인들보다 높은 이유는 그 가치가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사회가 처한, 한국인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실제로 가지고 있지 못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절대적 객관적 기준으로 빈곤하고 궁핍하여 그것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먹고살만하고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유를 찾지 못하고 그 유연함을 갖지 못하는 불안감이 내내 스스로를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며 미래가 없다고 자조하게 만드는 것이죠.
내가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하고 앞에 있어야 하며 더 빨라야 한다는 심리는 본래 한국인의 특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특성으로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현재 행복한 중산층 한국인이신가요?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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