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괘씸죄> - 1

프롤로그 - 1

by 발검무적
전례 없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간의 갈등은 더더욱 심화되는 양상입니다. 오늘은 법무부 장관이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라는 책을 읽던 중 연필로 ‘특수통 검사들은 총장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중수부를 희생시키려’라는 부분에 밑줄을 치며 3시간 동안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날 자정까지 국회 본회의 자리를 지켰던 법무부 장관은 자정이 다된 시각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책을 읽은 독후감을 남기며 다시 한번 공수처와 검찰 개혁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연일 방송에서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간의 갈등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신나는 싸움 중계를 하고 있었다. 꽤 잘 나가는 시사추적 고발프로그램의 작가 팀장을 맡고 있는 내 입장에서 그런 메인이벤트에 귀를 닫고 있을 수도 없긴 했지만,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대단한 일인 양 끄집어내고 물어뜯고 할퀴는 종편의 나팔까지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나친 에너지 소모라는 생각이 막 들던 참이었다. 그런데 법무부장관이 읽었다는 뜬금없는 책과 그 내용, 저자에 대한 댓글을 보며 묘한 기시감이 떠올랐다. 종편은 법무부장관을 비아냥거리는 듯 할퀴면서 검찰 내부 게시판에 본래 그 책의 저자를 공격하는 댓글을 또박또박 읽어주고 있었다.


실제로 이 여자 변호사는 2002년에 1년 남짓 검사를 하고 그만둔 사람이란 말이죠. 검찰 게시판에는 1년 겨우 주마간산 격으로 검찰을 채 맛보지도 못한 애송이가 무슨 검찰의 수뇌부까지 이해하며 비판을 하느냐는 객관적인 지적에서부터, 20여 년 전에 검찰과 지금의 검찰이 같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의 주장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똑같은 비판의 잣대로 보는가 등등 합리적이고 날카로운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거대 언론의 또 다른 나팔수노릇을 톡톡히 해내던 종편의 진행자는 여전히 자신이 똘똘하고 냉철한 언론인인 양 손에 쥐어진 원고를 앵무새처럼 읽어 내려갔다. 나는 대부분의 이쪽 일을 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현 정권이나 법무부장관을 옹호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현 정부에 문제가 되는 사회 곳곳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작가 팀장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디 하나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존경받을 만한 사회의 어른다운 행동을 하는 쪽은 없다는 사실이 더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것은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이라는 마약의 속성에 하나였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새끼 작가로 시작해서 10년이 지나 지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권력을 잡게 되면 변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문득 볼륨을 키우고 그 말도 안 되는 종편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주저리는 말에 귀를 잠시나마 기울였던 이유는, 문득 이 겨울과 닮아 있던 10여 년 전 그 해 겨울, 홋카이도에서 선생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기억이, 나의 온 감각을 타고 다시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 작업실 책상 앞 수북이 쌓인 책 숲 속에서 구석에 먼지를 머금고 꽂혀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끄집어 들었다.


1976년에 발행된 한 문예지.

나에게 있어서는 운명의 나침반 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바로 그 책이었다. 보물 같은 책을 펼쳐 내가 그녀를 처음 받아들였던 기억을 더듬는다.


<조그만 체험기>

오랫동안 만지작거렸을 그 페이지의 오래된 종이에서 피어오르는 나무 냄새. 그 냄새는 나를 10년도 훨씬 전인 2008년 12월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으로 단번에 끌고 갔다.



유난히도 눈이 많던 겨울로 기억되지는 않지만, 제법 이른 11월 17일에 서울에 첫눈이 내린 것을 아직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 흩뿌리는 정도의 첫눈과는 상관없이, 말로만 들었던 파우더 스노우로 겨울 동안에는 시멘트 색깔을 볼 수 없다는 설국을 경험했던 것은 나에게 있어 생애 첫 호사라면 호사였다.


온통 흰색 세상이었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에 비친 비행기 창밖으로 비친 설국은 내가 그리도 와보고 싶었던 홋카이도에 도착했다는 실감을 하기에 충분했다.


“김 작가, 내릴 준비 해야지. 우리 짐이 많아. 얼른 움직여야 돼. 교수님도 와 계실 거야.”


피디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머리 위로 짐칸을 열어 사람들 틈으로 행렬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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