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4

네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83


그렇게 심청이 팔려가듯 남의 집살이로 들어가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그런 고급 집에 들어가 살 호사를 누려볼 수 있겠니?


막 고등학교를 들어갈 준비를 하던 영은이에게 그렇게 센 척 말하긴 했지만, 결국 남의 집 살이로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던 4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던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저 단순하게 고래 등 같은 부잣집에 들어가 산다는 유사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는 귀가 먹지도 않았을 내가 그들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혼란함을 느꼈던 것도 바로 그때가 처음이었다. 혹시 내가 무슨 장애라도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정서적 혼란을 처음 겪게 되었던 계기도 바로 그 일이 계기였다.


4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대학을 떠나는 지금도 그때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겨우 들어가겠다고 어려운 살림에 억지를 부려 원서를 넣고 시험을 보고 그 결과가 나온 다음의 일이었다. 일단 합격통지서를 받아내는 것까지는 나의 고집과 억지로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막상 ‘대학 등록금’이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나는 내가 뭔가 뾰족한 대안을 마련해놓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떻게라도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가난하면서도 현명하지 못한 오기만 남은 자의 오만의 소치였다.


“아니! 무슨 기집애를 대학까지 보낼려구 그런대, 큰언니두 참. 속도 좋아. 그래 수은이가 뭐 특출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가는 것두 아니구, 그것두 무슨 국문학과유? 국문학과는, 딱 배곯아서 사람 굶어죽기 딱 좋지. 사내애들두 안 보내는···, 그 밥벌이두 안되는···”


이모의 말이 새삼스레 내게 비수가 되어 꽂힐 정도로 독설에서 퍼진 독이 상처가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한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다가 다시 묘한 차림의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변해서 나타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던 이모의 말이 무게를 가질 턱이 없었다.


그나마 열아홉의 내가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 외할머니를 찾아가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였는데, 정작 엄마 앞에서 내가 가지고 온 대학 합격증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 무슨 죄인이나 되는 냥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못 꺼내고 있을 때 이모가 나타난 것이었다. 물론 이모의 같잖은 힐난 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내게 있어 엄마의 결정은 가장 큰 힘이 될 수도, 가차 없이 내려치는 단두대의 칼날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옆에서 똥파리처럼 앵앵거리는 이모의 추임새에 나는 뭐라고 말을 더 꺼낼 수가 없었다.


타이밍이 안 좋기는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민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와 엄마가 장사를 자리 잡을 만하고 겨우 생계를 이어나갈 정도가 된 직후라 엄마에게 내 대학 등록금은 그야말로 의외의 폭탄 같은 난관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절대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되뇌던 엄마의 엄마에게 찾아가겠다고 요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엄마!”


엄마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식의 무반응과 계속된 침묵.


내가 엄마에게 기대했던 최고의 반응은 ‘묵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럴 경우 무반응과 침묵으로 상대의 의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희석시켜 버리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이모만큼 다혈질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명쾌한 답을 내놓고 그 해답으로 빨리 행동을 옮기는 쪽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보내는 과정을 거치며 엄마는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새로운 모습들을 몇 가지 갖추었다. 쌓여가는 빚 독촉과 여기저기 들어가야 할 돈문제를 급한 대로 막아가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는 현실은 엄마에게 무반응과 침묵 등의 마법을 갖출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성이 풍부해서 책을 읽다가도 눈물을 흘리고 예쁜 것을 보면 여지없이 소녀처럼 탄성을 지르며 우리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시던 엄마의 모습은 점차 그 형체를 잃어갔다. 이젠 슬픔이 있어도 그저 입안으로 넣어 한번 꿀꺽 넘겨 삼키고 동생들이 무슨 일이 생겨 울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도 결코 부둥켜안아주고 보듬어주는 일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부엌에서 나오지 않은 채 굽은 등을 보이며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근히 한 두 마디 툭 던지는 것만이 전부인 형태로 공기가 바뀌어 갔다. 그래서 외할머니에게 찾아가서 입학 등록금만이라도 부탁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엄마가 그저 조용히 묵인해주면 그것으로 단걸음에 외갓집이라는 곳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 이모가 있었기 때문에 내 뜻을 외할머니에게 전할 수 있는 전달자까지 마련되었다고 나 혼자만 성큼성큼 앞서가 있었다.


그러나 묵인과 침묵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엄마는 내 얘기 자체를 듣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있던 인형 부업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숨을 죽이고 뭔가 더 얘기하지 못한 채 엄마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앞에 내놓은 합격증과 등록금 고지서를 보면서도, 옆에서 뭔가 주절거리고 있는 이모를 보면서도, 엄마는 아무런 말도, 그 어떤 반응도 꺼내지 않았다.


엄마의 무반응 곁에서 계속 굳이 대학을 보낼 필요도 없고 돈을 쓸 필요도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드는 이모의 앵앵거리는 소리가 점점 거슬려왔지만 그렇다고 엄마 앞에서 그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이모는 엄마에게서 꿔간 돈을 갚으라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두려웠을 게 뻔했다. 그 돈이면 최소한 내 등록금과 당분간의 생활비는 충분히 치를 수 있을 테니까.


이모는 날 탓하고 싶은 건지 엄마를 탓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과 같은 부류에 자신의 언니와 언니의 딸이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탓하고 싶은 건지 무척이나 흥분해서 언성까지 높여가며 이것저것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윗입술을 아랫입술로 바짝 당겨 이모가 보이지 않게 손톱이 살점을 파고 들어가도록 꼬옥 쥐고 눈물이 흐르지 말라고 입 속으로 주문 같은 것을 되뇌었다.


자세하게 내 감정을 분석해볼 여유도 없었지만, 그렇게 눈물이 핑 돌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엄마의 침묵과 무반응이 가진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을 거라 생각한다.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그 형편에 내가 대학을 가려고 했다면 집안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고, 학비도 전액 장학금을 받는 곳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사립대학교의 국문학과에 들어가면서 입시 때도 상의나 상담은 고사하고 담임과의 상담도 나 혼자 들어갔던 것을 감안한다면, 엄마에게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인 것은 분명했고, 내가 엄마에게 그런 딜레마를 던져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나 역시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의 미명 하에 엄마에게 더 힘든 결정을 강요하고 있었던 거였다.


“나…, 대학 가고 싶어요, 엄마! 할머니한테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안될 것 같구나, 도저히 그것만큼은….”


다 쓰러져가는 시민아파트의 언덕으로 간혹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고 불어왔다. 내 말을 틀어막는 엄마의 아무런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대답이 그 바람소리에 묻힐 뻔했지만, 난 분명히 그 말을 들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이모의 목소리가 거슬렸던지 옆집에서 들리던 TV 볼륨이 더 커졌다. 깔깔거리는 코미디 프로의 녹음된 청중의 웃음소리에 엄마의 목소리가 덮일 만도 했지만 내 귀에 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안된다고 했다, 엄마가.


그건 나만 들었던 착각이 아니었을까? 난 분명히 잘못 들었다고, 엄마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내 앞의 사물들이 물에 젖어들면서 언뜻 비추었던 엄마의 모습은 단호하게 입술을 앙다물고 눈물이 고여가고 있는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긴 했지만,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여가고 있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쩌면 내 눈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들어차서 보인 착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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