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5

다섯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84


그 집에서 뛰쳐나왔던 그 겨울이 새삼 떠올랐던 건 왜였을까?


잡히지도 않는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가에 한참을 서 있어도 택시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데 자꾸만 서러워져 눈물이 더 쏟아져 흘렀다. 그래서 천천히 큰 길가를 따라 걷기로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쏟아지는 진눈깨비를 맞자니 뜨끈한 눈물이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여자는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악마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난다.


그렇게 시작하는 바스콘셀레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책의 서두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이브날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생일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집을 뛰쳐나온 후에도 동생을 통해 약간의 용돈을 건네주었을 뿐 결코 엄마에게 연락을 하거나 집을 찾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달에 한 번 정도 동생들의 학교 근처에 가서 동생들과 만나고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신촌 학교 근처로 데려와 경양식 레스토랑이라고 적힌 가게에 데려가서 밥을 먹이고, 자신의 용돈을 쪼개 모아뒀던 돈을 봉투에 담아주는 것을 의식처럼 치르곤 했다.


여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오는 ‘제제’라는 아이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자신이 그 안에 박제되어 있는 것 같다고 늘 생각해왔다. 특히나, ‘악마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난다’는 명제 같은 문구는 아름다운 동화라고는 하지만 자신에게만큼은 그것이 아름다운 동화랄 수 없는 느낌이 들어, 그 책이 유독 오랫동안 부적처럼 따라다니곤 했다.


교대를 막 졸업하고 처음 배정받은 학교의 첫 졸업생을 맞았던 그녀의 담임이 그녀에게 졸업 선물로 준 책이 바로 그 책이었던 것을 보면, 그 책과 함께 자신의 운명 같은 마력이 옮겨 붙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더랬다.


여자에게 있어 크리스마스이브, 그러니까 그녀의 생일은 언제나 악마를 연상케 만드는 불행의 모티브에 다름 아니었다.


처음 아버지가 쓰러지던 겨울이 그랬고, 그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했던 때도 이브를 즈음해서였으며, 대학을 가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것도 그즈음이었으며, 결국 그렇게 돌아서서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라고는 없이 울면서 기어들어갔던 것도 그 겨울의 이브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눈물을 닦고, 겨우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어 준 것은 가르치던 아이와 동갑내기였던 동생 영은이었다. 영은은 눈이 퉁퉁 부은 언니의 붉게 충혈된 눈을 보고 나서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며 밤샘하러 나간 남동생과 밀린 외상값을 받겠다며 나간 엄마는 마침 집에 없었다.


가만히 집에 들어온 그녀에게 동생은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보리차를 한잔 가져다주었다.


“저녁 안 먹었지? 좀 있어, 뭐라고 대강 만들어다 줄게.”

“됐어, 영은아.”


동생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는 부엌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한 그녀는 동생을 만류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다. 주전자에서 보리차가 끓는 소리가 잔잔히 주기적으로 음악처럼 흐르면서 그녀는 초라하고 비좁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집이긴 하지만, 엄마의 냄새가 포근하게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아, 역시 우리 집이 최고라는 빤한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주책맞게 다시 눈앞이 그렁거린다. 집을 뛰쳐나가던 그날 엄마가 만지작거리며 완성시키려던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결국엔 손찌검까지 하면서 그녀를 다그쳤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은 예전 그대로인 듯 변함이 없다. 가만히 웅크리고 몸을 웅크리는데 그녀의 오른손에 툭하고 장롱 밑에 있던 엄마의 가계부가 걸렸다.


100원어치 콩나물 가격에서부터 이것저것 익숙한 엄마의 글씨가 보인다. 뭘 그렇게 적을 것이 있다고 엄마는 가계부까지 이리 꼼꼼히 적었을까. 그녀는 가만히 글씨들을 보며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뭔가를 적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엄마가 적은 것을 본 일은 없다. 가계부는 3년도 훨씬 지난 건데 엄마는 그 위에 숫자와 날짜를 새로 고쳐 적어가며 몇 년째 쓰고 있는 듯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녀가 갑자기 손을 뚝하고 멈췄다. 날짜는 그녀가 1년여 전에 집을 뛰쳐나가던 바로 그날이었다. 이것저것 가격 따위가 적혀있는 한 틈으로 아주 작고 깨알 같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은아, 넌 그럴 수밖에 없었니?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이 쓰릴 줄은 몰랐구나.

우리 형편에···,

아니, 네가 싫어하는 말이니 약속대로 쓰진 않으마.

네게 안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던 니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엄마가 너 가고 싶어 하던 대학의

국문과에 합격한 것이 왜 기쁘지 않았겠니?

그래서 기뻐야 하는데···기뻐하고 싶은데…

너를 안고 수고했다고, 이런 가정 형편에 너무 수고하고 장하다구, 말해야 줘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냥 손가락으로 적기만 했구나. 안아주고 기뻐해줬어야 했는데…

이 엄마가 그렇게 해주질 못했구나.

너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말았구나, 이 못난 엄마가.

이렇게 가슴만 미어져 오는 게,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게

너무… 너무 미안하다.

일기였다. 그녀를 그렇게 때리고 당황스러워하던 1년 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것은 작업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엄마는 자신의 마음을 손가락으로 인형에게 적어나가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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