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6

여섯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85


“아니요. 거기 아니구요. 그래요. 거기요. 거기.”

묘하게 잠 속에서 나를 끄집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환한 햇빛처럼 조금씩 밀려 들어왔다.


누가 이사라도 오나?


건장한 남자들의 웅성거리는 듯한 말소리와 짐을 옮기는 소리, 차가 움직이고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머리가 아파서 쓰러지듯 잠들었던 것만 같은데 머리가 개운해진 느낌이 들었다. 더 자야 한다는 생각도 아직 가슴골 안 가운데 다 흘러 내려가지 않은 상태였던 터라 그러기로 마음먹고 커튼을 다시 제대로 치고 방해받은 수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자세를 편히 누웠다.


그러나 조그맣던 그 소리들은 점차 가까이 가까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내 정신상태는 이제 수면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도저히 어려워졌다.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울리는 듯한 지속적인 톤으로, 마치 날 깨우는 새소리처럼, 그녀의 독특한 목소리가 귀에 맑게 울렸다. 같은 여자인 내가 듣기에도 묘한 느낌이 들게끔 하는 청량한 계속 듣고 싶어 지는 목소리였다.


대개 이사를 하거나 집안 청소를 하더라도 여자의 목소리란 대개 높은 하이 소프라노나 질그릇 깨지는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여자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청소도 완벽하고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필수 방식 정도라 여기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당시, 그나마 우리 가족끼리 행복한 잠시를 보냈던 까마득한 내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그 역할을 담당했었는데,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돌아가시기까지 그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그런 내게,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은데도 실제로 톤은 작으면서 차분하고 침착한 느낌이 묻어나는 그녀의 음성은 사람을 가만히 끌어당기는 은은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목으로 감겨오는 그 묘한 부드러움, 그것은 언젠가 커피 광고에서 들었던 지적인 역할을 주로 맡던 남자 성우의 감미로운 목소리 같은 느낌 같은, 아니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내 역할로 나와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너무도 그윽하고 은은한 미소를 띄웠던 그녀가 냈을 법한 목소리였다.


침대 끝에 웅크리고 뉘었던 몸을 일으키고 방안을 한 번 둘러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전히 난 두꺼운 커튼은 그대로 놔두고 그 안쪽의 부드러운 실크 커튼만 쳐둔 채 거실로 걸어 나온다. 소주병은 얌전히 문 옆에 세워두고는 정작 읽던 책은 휘휘 침대 옆에 던져둔 채 너저분하게 잠이 들었나 보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따사로운 봄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거실 베란다를 향한다. 다시 내가 돌아온 자리에는, 창가엔 모조 프리지어가 담긴 향수 화분과 지극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며놔야 한다는 이모의 철학이 담긴 고급스러운 실크 커튼으로, 그리고 방음 창문이 두 겹으로 닫혀있다. 물론 한쪽으로 내가 열어둔 탓에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날 수 있었다.


쬐그만한, 그렇지만 굉장히 고가라는 뻐꾸기시계에서 작은 뻐꾸기가 나와서 입술을 요리조리 움직인다.


벌써 9시인가? 오늘이 며칠···


왜 느닷없이 나는 날짜를 알고 싶어 하는 걸까. 엉뚱한 나를 향한 질문 속에서 나는 상당히 유명하다는 화가의 그림이 그려진 달력의 옆의 놓인, 빵집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내’ 달력을 본다. 별로 화려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달력의 기능은 충분히 해내고 있는, 이 궁궐(나는 이제 이곳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안에 두고 지내는 몇 안 되는 내 물건 중 하나다. 원래 있던 달력에는 내 마음대로 뭔가 적을 자신이 없어서 가져다 두었는데 빨간 사인펜으로 오늘 날짜 아래 갈겨쓴 글씨가 있다.


은영.


맞다. 은영. 은영이가 오는 날이었다.

출판사와 잡지사에 나가는 일 이외에는 이제 별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던 내게 오늘은 늦잠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랬다.


은영이가 온다고 선포했던 날, 17일.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은영인 이모의 삼 남매 중에 큰딸로 지금은 유학 중인 것으로 되어 있던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물론 이모의 딸이었으니 조신하다거나 얌전한 축에 속하는 애는 절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정작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어려서 잠시 잠깐 본 것 이외에 우리 삼 남매에게 이모의 아이들이 사촌으로써 자기네 집이 더 부유하다는 것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 영은이와 영준이를 울렸다는 것 정도를 빼고는 그다지 기억할만한 사건도 추억도 없었다.


그나마 내 기억에는 이모들의 자식들이 흔히 말하는 돈을 가진 생색을 엄청나게 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은영이가 좀 다른 아이였다는 거였다. 은영인 오히려 자신의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만’ 좋아했을 뿐 부모에 대해 결코 친근감을 보이지 않는 묘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물론 ‘상대적’이라는 단서는 붙여야 하겠지만, 사촌 형제들 중에서 그나마 은영인 분명히 다른 구석을 가진 아이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람들이 흔히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졸부’인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일찍부터 반항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며 대들어 가출도 한 적도 있었고, 음악을 하겠다고 이상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던 탓에 이모의 부탁으로 이상한 클럽에 가 있던 은영이를 잡아다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춘기의 그맘때 아이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반항 의식이었을 뿐, 언젠가 내가 백화점의 수입화장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적에도 아주 당연히 나를 쳐다보면서도 모르는 사람인 척하며 가격을 물어보는 행위로, 내가 아르바이트 점원이라는 현실적 격차를 확실히 인식시켜 준 모종의 사건도 있긴 했다. 그녀에 대한 소식은, 대학에 떨어지고 나서 평판을 중요시하던 이모와 가방끈의 길이에 한이 맺혀 있던 이모부의 협박과 회유로 처음엔 캐나다로 그다음은 일본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뉴질랜드로 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 은영에게서 뜬금없는 전화를 받은 것은 정확히 일주일 전날 밤 자정이 훨씬 넘어서였다.


“언니니? 나야. 은영이. 하이? 잘 지내지?”

“은영이?”

“그래. 나 은영이. 우리 엄마 아파트에 언니 혼자서 산다며? 혹시 옆에 웬 놈팡이라도 누워있는 거 아니지?”

“응? 으응.”


전날 동기모임으로 술이 과해 정신도 못 차리고 비몽사몽 헤매며 들어와 쓰러졌던 내게는 정신이 확 들게 하기엔 충분한 전화였다. 은영의 짤랑거리는 놋쇠종 속의 동전 같은 목소리가 그녀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과 작위적인 화장을 짙게 했던 앳된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농담이야. 언니가 뭐 그럴 오지랖이라도 되니? 뭘 그렇게 놀래고 그래?”

“너···어디야? 뉴질랜드에 갔다며? 한국에 온 거니?”


겨우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을 떼어 떠듬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마치 그녀는 내가 집을 잘 지키라고 묶어둔 강아지인 양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이 확 거슬려왔다. 이건 마치 주인 마나님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하녀 꼴이지 않은가?


“한국은 무슨? 여기 아직 뉴질랜드야. 얘기는 들었는데 이제 한 달쯤 됐지? 다른 게 아니구. 내가 쬐그만 사고를 하나 쳐서 이제 여기서 더 지낼 수 없게 됐거든···. 뭐 하긴 이제 좀이 쑤시던 참이긴 했고. 그렇다고 엄마한테 나간다고 했다간 난 보나 마나 머리채 잡아 뜯기는 걸로 시작해서 피 말라서 죽을지도 몰라. 학교도 짤리고 했는데 여기서 더 볼일도 없고 해서, 어차피 같이 놀던 애들 다 한국에 있는데 뭐… 그래서 들어가려구···”


내가 듣는지 마는지도 모른 채 은영인 계속해서 자기 엄마처럼 일방적으로 뭐라고 계속 자기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녀의 왱왱거리는 말소리 뒷켠으로 문득 그날의 기억이 스멀거리며 뇌수의 뒤편에서 기어 올라왔다.


엄마를 따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갓집에 차례를 지내러 갔던, 기실 엄마가 형편이 너무 어려워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손을 벌리려고 갔을지도 모를, 그리고 그 김에 인사를 빙자하여 자기 핏줄이라며 우리들을 보여주며 두 분 부모님의 결혼을 뒤늦게나마 인정받으러 갔던, 바로 그날이었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은영인 자기 삼 남매와 우리 삼 남매가 외가에서 어떻게 다른 대접을 받게 될지에 대해 확실하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듯했다.


같은 식탁에 앉아도, 마당쇠의 자식과 대갓집 자제분이 앉았을 때처럼 자신들이 우위의 대접받길 원하는 서영이와 수영이의 기세 아닌 기세 앞에서 그런 큰집에 처음 들어가 봤던 우리 삼 남매는 나를 필두로 그것이 모욕이라고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신기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어른들이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그것도 아버지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거대한 철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저녁을 차려주라는 외할머니의 말에 넷째 이모가 우리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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