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10

열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97


삐삐-삐삐-


그녀의 삐삐가 울렸다. 그녀는 삐삐를 들어 한번 슬쩍 보고서는 파워를 끄고는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별로 중요한 거 아니에요. 얼른 타요.”


마녀의 BMW에 오르는 것, 수은에게 있어서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물론 이모의 고급 외제차를 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로만 듣던 이런 외제차에 그것도 여자가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수은에게 익숙지 않은 일중 하나였다. 여자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차 문을 닫는다.

마녀가, 아니 그녀가 차에 오르고 가만히 차 시동을 건다. 수은은 느낌이긴 하지만 시동소리가 마녀의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차, 굳이 안 타고 가도 될 거리인 것 같은데…”


수은은 한 번쯤 더 말해두고 싶었다. 물론 여자가 가자고 하는데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그릇을 주러 갔다가 함께 쇼핑을 나온다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명품거리의 갤러리아까지는 굳이 차를 가지고 갈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수은에게 있어서는.


“알아요. 나도 가끔씩 걷기도 하는데, 오늘은 조금 짐이 무거울 것 같기도 하고 뭣보다 날씨도 을씨년스럽고 해서요. 나도 운전하는 거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닌데, 갤러리아 갈 때는 이게 젤 편해요. 혼자서 장 볼 때는 그렇게 많이 보거나 하지 않거든요. 수은 씨, 많이 먹어야 돼요, 오늘 아주 푸짐하게 차려볼 생각이니까. 하하! 알았죠?”


마녀는 즐거워 보였다. 무엇이 그렇게 즐겁냐고, 혹은 왜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이 나오려다가 말고 마녀의 웃음과 함께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한결같이 느꼈던 괴리감이나 자신만이 다른 시계에 속해있다는 느낌은 수은에게 있어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그녀 자신은 믿었다.


하지만 마녀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자신이 더 이상 이 세계의 타인이거나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최소한 마녀에게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그렇게 인식된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뭔가 그렇게 생각할만한 근거가 있거나 자신의 입장이 상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느낌만큼은 그랬다.


여자의 말처럼 크리스마스를 앞둔 갤러리아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해 있었다. 갤러리아 앞에 서 있는 커다란 트리는 이미 화려한 금색으로 치장된 지 오래였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쓴 광고 문구와 크리스마스 장식이 남의 나라의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 로데오 거리니 오렌지 족이니 하는 것들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다른 지역의 젊은이들은 물론 이상한 국적 불명의 아이들이 압구정동에서 눈에 띄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할 것도 없는 일종의 현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은영이 주로 다닌다는 명품관 너머 구찌 골목이라는 곳이 그러했고,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로데오 거리라고 불리는 복잡한 거리의 가게들이 수은에게만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마녀와의 쇼핑은 생각 외로 즐거웠다. 일단 그녀는 자신이 물건을 고르기 전에 수은에게 하나하나 선택권을 주듯 친절한 설명을 더해주었다.


파스타를 대강 어떻게 만들 것이며 스파게티를 대강 어떻게 만들 것인데 어떤 종류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먹을 건데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분명히 둘만을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마녀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생각보다 훨씬 많은 물건들을 사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디저트 용이라면서 호두가 잔뜩 들어가 있는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이나 굉장히 진해 보이는 다크 초콜릿을 두 개씩이나 살 필요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 마녀는 신이 나 있었다.


두 사람이 물건이 가득 찬 봉투를 들고 나오면서 마녀는 누군가를 위해 아주 오랜만에 만드는 이태리 요리라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수은은 집에서 이태리 요리를 먹어본 일도 없었거니와 이태리 요리를 누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다는 일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 잊은 거 있다!”


차에서 짐을 내리고 막 집안으로 다시 들어오려는데 마녀가 탄성을 외치듯 말했다.


“네?”

“와인이 있어야 하는데, 집에 사 둔 게 떨어졌을 것 같아. 개봉했던 건 안되잖아요, 음…”

“와인은 저희 집에 있어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수은은 가끔씩 마시는 다용도실의 와인이 생각나서 저녁 초대를 받은 것에 대한 답례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마녀가 와인 사는 것을 잊어버려서 다행이다,라고 수은은 생각했다. 얼떨결에 저녁 초대 아닌 초대를 받기는 했지만, 요리하는 것을 가르쳐주겠다느니 같이 요리를 해서 먹자느니 하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가져왔던 문화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외국 영화에서나 봐왔던 것이라고 여기던 중이었다.


이런 경우 영화에서 보면 초대해준 것에 대한 답례로 꽃이나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사 가지고 가는 장면이 마침 떠오른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수은은 생각했다. 어차피 집에 쟁여져 있던 것이고, 마침 그 와인을 답례로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은 그녀도 이런 문화에 영 촌년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먼저 들어가 재료를 준비하고 있을 동안 와인을 가지러 가면서 수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새삼스럽다는. 하지만 이런 교류를, 그것이 생경하다는 이유로 혹은 그녀와 다른 계층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치부하고 돌아서고 싶은 맘도 없었다. 결국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자위하고는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와인 한 병을 뽑아서는 다시 그녀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자동문이 닫혀 있질 않았다. 여자가 자신을 위해 문을 살짝 열어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 문을 직접 닫으며, 문득 외제 세단을 타고 사라진 중년의 신사가 떠올랐다.


“문이 자동으로 그냥 닫히는 건가 봐요?”


여자는 이미 물을 끓이고 있었고, 이것저것 재료 손질과 함께 준비를 거의 마쳤다.


“아! 자동 도어록이라고 해서 새로 나온 건데. 내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거든요.”


수은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새삼 마녀가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단순한 가난하고 무지한 촌년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만약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저 그렇게 무관심해지고 그렇게 소원해지는 관계를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겪어보지 못한 바도 아니었던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왠지 이런 관계들에 자신이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경계심마저 들었다.


“어머? 보졸레 누보네?”

“네? 보졸레 누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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