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9

아홉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96


“니가 이 일을 할지 말지야 내가 뭐라고 참견하거나 조언할 생각은 없어. 니가 누구보다 날 봐와서 이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정 부장이 어떤 여자인지에 대해서는 알아 두라구. 그 악당 마녀가 이번 기회에 월급 쬐금 주는 확실한 일꾼을 잡고 싶어서 아주 혈안이 되어 있어, 니가 그동안 꼭지 하면서 매번 회의 끝나고 일주일 만에 원고 가져가 줬잖아. 얼마 준다고 얘기는 하디?”

“…”

“너 생각 잘해야 된다. 나두 박봉에다가 일만 디립다 많긴 하지만, 난 내년에 새로 창간하는 곳으로 옮기기로 했거든. 너두 데리고 가고 싶은데 아직 그런 정도 얘기할 수준은 아니고…”


처음부터 효진이가 이렇게 흥분해서 언성을 높인 것은 아니었다. 정 부장을 만나고 들어와 이것저것 씻고 정리하고 글을 쓰려고 막 앉는데 전화가 온 것이었다. 나는 그저 효진이의 이야기에 나의 반응이 심드렁했을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잡지사 기자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직 확실하게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효진이가 흥분하고 나선다는 것도 조금은 이상했지만 평소 정 부장에 대해 안 좋은 색안경을 끼고 있던 효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터였다. 물론 정 부장이 얘기했던 나가는 한 사람이 혜진 선배였지 효진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조금 황당되기는 했다.


“거의 원고료에다가 진행 일당 쳐서 주려고 계산하고 있더라구. 나쁜 년이지.”

“그래.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았어. 나도 생각해보고 물어볼 거 물어보고 결정할게. 걱정 마.”

“니가 그렇게 잘 물어보고 잘 따지고 하는 성격이면 내가 이렇게 득달같이 전화도 안 해. 하여간 지금은 나가봐야 하니까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얘기하자. 절대 정 부장한테 넘어가면 안 돼. 지금 엮이면 나중에 빠져나오기도 힘들어. 그 악당 마녀한테는 함부로 빈틈 같은 거 주면 안된다구. 알았지?”


효진이는 자신을 생각해서 충고한다고는 하지만 효진이가 이제까지 정 부장에게 당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감정적인 부분이 도드라져 나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악당 마녀라고 정 부장을 가리키는 효진이의 말에 그 진지함과는 상관없이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효진이가 바쁘다며 전화를 바로 끊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자신이 열과 성의를 다해 충고하며 자신을 걱정하는데 또 아무런 생각 없이 물러 터졌다고 한 잔소리 들었을 타이밍이었다.

나중에 전화를 끊는 버릇이 좋을 때도 있네.

그렇게 피식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악당 마녀라는 말에 또 앞집 그녀의 생각이 났다. 그녀에 대한 생각에 전날 받았던 카스텔라와 양파 수프의 그릇에 시선으로 가서 꽂힌다.


생각난 김에 가져다줘야겠다.

악당 마녀는 물론 아니었지만 그녀를 뭐든 만들어 내는 마녀라고 생각한 내게는 이제 ‘마녀’라는 단어마저도 그녀를 자연스레 떠올리는 하나의 코드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대로 그릇과 접시를 가져다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접시에 어제 들어오면서 사다둔 사탕을 소담스레 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스치며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사뭇 생소했다.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게 별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진초록 BMW를 타고 그 저녁 어디론가 가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조금 뜸을 들였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가지런하게 모아져 나왔다.


“저기 206혼데요. 그릇 돌려 드리려구요.”

“네?”


잠시 나는, 모습을 나타낸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서 멈칫했다. 다른 사람인 줄만 알았다. 바뀌어 있었다, 확. 문을 열고 머리를 내미는 그녀의 헤어 스타일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더 소녀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좀 도발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얼굴이 이전에 알고 있던 얼굴인지도 모를 정도로 여자는 달라져 있었다.


“아. 수은 씨구나! 들어와요. 어머! 이건 뭐예요? 이런 거 안 사 와도 되는데…”

“아니에요. 뭐 하시던 중이었나 본데…”


문득 내 생각만 하고 찾아왔지, 그녀가 뭘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를 방해한 것 같다는 느낌에 아차 싶었다. 여자가 뭔가 한참 하고 있는데 내가 불쑥 방해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새삼 발걸음이 쭈뼛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누가 뭣 좀 부탁해서, 일 좀 하고 있었어요. 대단한 거 아니에요. 들어와요. 이렇게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어서!”


여자는 예의 그 찰랑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방긋이 웃고 있었다. 전에도 느꼈던 것이긴 했는데, 여자의 그 밝은 미소를 보면서 거절한다기보다는 그녀와 좀 더 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불과 몇 번 대화라고는 나눠보지도 못한 그녀에게.

“잠시만요. 하던 것 좀 대강 치우고 올게요. 음… 앉아요.”

“네.”

마땅히 앉아 있기가 뭐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여자는 쏙 하고 서재로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닫히지 않아 여자가 무엇을 하는지가 자연스레 거실의 커다란 유리에 비쳐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책상에서 노트북 안을 두드리며 뭔가 정리하는 것 같았다. 원고 따위들이 널려있는 근사한 오크나무로 된 그 책상은 서재의 한가운데 멋진 색깔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여자가 대강 정리를 끝냈는지 노트북을 닫고 원고들을 한쪽 켠으로 정리하고 책들을 갈피를 끼우며 덮었다. 난 여자의 서재가 참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열린 문으로 여자가 정리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순간이동을 한 마녀가 나를 신기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내가 그녀가 나오는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녀의 재미있어하는 표정과 마주치고 나서였다.

“서재…, 구경할래요? 별로 대단한 건 없는데…”

“네? 아니요.”


여자는 선선히 서재로 들어가라며 길을 열어주었다.


“괜찮아요. 구경해요 그럼 나는 차라도 준비할게요. 뭐 딱히 볼 것도 없겠지만.”


여자는 나를 그렇게 남겨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만히 서재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내게는 없지만 왠지 익숙한 향이 방 안에서 느껴진다. 묵향 같기도 한 것이, 아, 잉크 냄새였다. 책상에는 고풍스러운 만년필이 있었다. 저 만년필은 언젠가 백화점에서 백만 원도 훨씬 넘는다고 해서 신기하게 보았던, 승주가 유명한 출판사의 사장이 되면 사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그 몇 자루 안된다는 명품 만년필이 분명했다.


도대체 여자는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이렇게 비싼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걸까.

내게는 낯선 노트북도 잘은 모르지만 아주 얇고 단단해 보였다. 처음 보는 물건이긴 하지만 은색으로 막대 모양처럼 조금은 두툼하게 생긴 기계도 눈에 띄었지만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지 못했다. 여자는 의외로 첨단 기기들에도 강한 면모를 가지고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넘긴다. 무엇보다 압권은 아까 자세히 보지 못했던 서재 사방을 장악하고 있는 책장이었다.


벽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문이 있는 벽을 제외하고 전체를 가득 책장으로 맞춰 짜 놓은 듯 고풍스러운 영국 대학의 거대한 도서관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의 서재라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아까 코 끝에 묻어난 것은 단순한 잉크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된 책에서만 맡을 수 있는 독특한 나무 냄새가 잉크와 섞인 냄새인 듯했다. 묵직하지만 퀴퀴하지 않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이 담긴 듯한 향이었다. 책상과 같은 나무인듯한 고급스러운 오크 나뭇결이 묻어나는 책장.

책장에는 빈틈이 거의 없이 빼곡하게 온갖 책들이 가득하게 꽂혀 있었다. 각기 다른 책들이기는 했지만 마치 도서관에 온 것처럼 가지런히 마치 분류별로 정리된 듯해 보였다. 조그만 개인 도서관을 온 것처럼 한국어로 된 것뿐만 아니라 외국어로 된 것은 그 나라 외국어 별로 정리가 되어 있었고, 백과사전류는 물론이고 외국어 사전도 한 공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것이 여자의 독서취향이나 지식수준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도서관 수준이었다.


심지어 악보로 보이는 책과는 전혀 다른 판형의 악보집이나 커다란 원판 화보집으로 보이는 책들까지 칸을 짜 맞춰 그것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 원래 그 자리인 듯 종류나 분량, 어느 면에서 보아도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한 면씩 마치 미술관의 미술품을 감상하듯 보고 있노라니 책을 빼어본 흔적이 있고 손이 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과시용으로 적당히 책을 사다가 끼워 만든 서재가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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