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8

여덟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95


얼마나 잤을까, 일어나서 머리맡의 시계를 보려고 하는 순간 머리가 띵해져 다시 누웠다. 머리에 약간의 한기 어린 땀이 있었다. 다시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온 몸이 송글거리는 땀으로 감싸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일어나기가 어렵다. 방안에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보일러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기온이 떨어져서는 아니었다. 계속 불안하던 몸살 기운이 이내 영혼이 웅크리고 들어앉아있을 뼛속부터 스멀스멀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전화가 왔었던 것도 같은데, 싶어서 언뜻 고개를 돌려 전화기의 자동응답기를 보니 이전 메시지인지 붉은색으로 ‘2’라는 숫자를 담고 있다. 술을 마시고 잔 것도 아닌데 머리가 온통 깨질 것만 같다.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를 훨씬 넘어있는데도 방안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같이 느껴진다. 음산한 어둠이 방 안에 들어차 있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니 거실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날이 비가 오려는 듯 아주 컴컴한 하늘을 내리깔고 있다. 거실의 소파 위로 은영이 이리저리 벗어던진 실크 블라우스에 체크무늬 스커트며 팬티스타킹 따위가 이리저리 널려있다. 발에 걸리는 대로 집어서 다용도실 앞의 빨래통에 넣고 욕실 쪽으로 가는데 브래지어며 팬티까지 욕실 앞에 널브러진 채로 있다.


도대체 어제 얼마나 난리를 부린 거지?

냉장고에서 얼음을 받아 차가운 물 한잔을 마시고 나서야 어제의 난리굿이 머릿속에 다시 영사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 소란을 피우며 들어온 은영은 지금 제 방 침대에서 시체처럼 나뒹굴고 있다.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고 본능적으로 약통을 찾는다.

어딘가 전에 지어둔 약이 있을 텐데.

어둑어둑한 기운이 스며들어오며 물먹은 솜처럼 기분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시력이 돌아오지 않은 탓인가 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베란다의 커다란 이중 커튼을 열어젖힌다. 잠시 약통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겠다고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가 은영의 열려져 있는 방안을 치어다본다. 대강 씻고 자라고 했는데도 화장도 채 지우지 않고 몸에 닿았던 천이란 천은 모두 찢듯 내던지고서 침대에 쓰러져 있는 은영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이제 스물셋밖에 안된 은영의 모습은 너무도 화려하다 못해 지나치게 화려해서 널브러진 자신의 속옷만큼이나 나이 들어 보이고 제 나이 또래에서 느껴져야 할 20대 초반의 풋풋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천천히 머릿속의 뇌가 제 위치를 찾아갈 즈음, 다시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마녀의 집에서 마셨던 달콤하기 그지없었던 그 카푸치노 생각이 왜 지금 여기서 나는 걸까? 생각이 마녀에게 가 미치자 문득 잊고 있던 어젯밤 일들이 떠올랐다.

남자였다.

은영을 데리고 온 남자와 어색하게 마주치는 그 순간, 앞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던 사람은 분명히 남자였다. 그 시각에, 양복을 말쑥하니 차려입은, 마녀만큼이나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나왔던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 남자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애인? 남편? 그러고 보니 남자가 문을 나설 때 닫히는 문 사이로도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냥 문을 혼자서 나서고 자동문이 철컥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그게, 새벽 3시쯤이었나?



영 맘에 들게 풀리지 않는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어 읽으며 연한 커피를 머그잔으로 다섯 잔째 마시고 있을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언젠가 들었던 그 낯선 남자의 음성은 은영이 만취상태라며 자신도 약간은 횡설수설하는 혀가 풀린 이완된 정신상태로 수화기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전화도 전화였지만 기껏 집중할만한데 방해를 받은 것 같아서 한껏 날카로워진 음성으로 대꾸했던 것 같다.


글이 잘 풀리는 날도 그랬지만, 어제는 유독 이전에 써놓은 글들을 다시 만지기 시작한 날이어서 그런지 더욱더 날카롭고 짜증이 쌓여갔다. 그닥 오래되지도 않은 글을 보는데, 전혀 내 글 같지 않고 낯설게 느껴질뿐더러 그나마 기본적인 흐름도 편하게 읽혀 내려가지 않아, 이걸 통째로 Delete 버튼으로 날려버려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판을 만지작거리던 터였다.


그래도 쓴 것이 아까워 어떻게 해야 좀 더 세련된 문체로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나의 감정을 직접적이 아니면서도 보다 은미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에 대해 슬그머니 고민의 초점을 바꿔가던 중이었다.

그런 글쓰기를 할 때면 늘 도덕적 은폐 의식을 치르곤 하는데, 정적을 깨고 내 덜미를 잡는 듯 울리는 전화벨과 그 안의 남자는 충분히 날 서 있던 내게 있어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남자의 목소리 너머로 들리는 은영의 만취한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고민하던 글들을 모두 내쫓아버리고 말았다.


“어딘데요? 은영이한테 들어오든말든 지 마음대로 하라구 전해줘요! 지 집이니까… 알아서 기어 들어오라고 해요.”


다소 거칠게 쏘아붙이는 말투에 남자는 움찔하고 간극을 두었다. 그리고는 은영에게 뭐라고 떠드는 듯한 말소리가 들리고 은영의 술에 쩔은 목소리로 갈무리되며 다시 그가 말했다.


“집 앞에 다 왔거든요. 괜찮으시면 문 좀 열어주세요. 은영이가 너무 많이 마셔서··· 도통 정신을 못 차리네요.”

“괜찮아! 괜찮데두! 우리 그냥 호텔방 하나 잡아서 그리로 가서 밤새 마시자니까!”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대강 카디건을 두르고 문을 열었을 때, 앞 집 문 앞에 훤칠한 키의 중년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에게서 상쾌한 코롱향이 차가운 밤기운에 섞여 묻어 나왔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그 향의 주인공은 가만히 문을 닫고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남자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그대로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 버렸다.


가만히 아래쪽을 바라보며 은영을 찾던 내 눈에 고급스러운 세단이 아파트를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까 그 남자였다. 차가 미끄러져 나간 반대쪽에서 휘청거리며 들어오는 은영과 거의 부둥켜안고 끌고 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새벽에 다 나가고. 대체 누구였을까?

어젯밤의 일이 하나하나 명확해질 즈음, 온몸의 땀이 대강 식어가는 느낌이 오면서 오한이 다시 온몸을 엄습해 온다. 속도 아린 느낌이 든다.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았구나, 하는 걸 그제서야 깨닫는다. 아마도 어제 글을 만진답시고 계속 마셔댄 커피와 대강 빵으로 때운 저녁 탓이 컸을 게다. 은영을 위해 뭔가 만들 계획은 아니었지만, 옷을 추스르고 주방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쌀을 씻으려고 하다가 그냥 인스턴트 수프가 낫겠다고 생각을 바꾼다.

띵동-

“누구세요?”


찾아올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이제까지 그렇게 벨을 누르며 이 집을 찾은 사람이 없다는 내 경험 탓이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또 은영의 손님일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여간해서 이 동네에 외판원이나 교회 전도를 위한 사람들이 들어올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들어왔다간 아파트의 수위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되는 탓임을 반장 여자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은 씨 있어요?”


하프 같은 여자의 목소리. 마녀다.


“네?”


쬐그만 구멍으로 밖으로 노려보려고 했지만 어둑해진 날씨 탓인지 그녀의 형상이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대강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녀의 손에 접시가 들려있다는 정도였다. 어쨌거나 나는 자연스레 머리를 한번 뒤로 젖혀 바로잡고 문을 빼꼼히 열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기로 한다.


“수은씨, 있었네요? 다행이다. 이거 한번 만들어 봤는데 수은 씨 생각나서요.”

“네? 뭐 이런 걸…”


여자는 예쁜 동화 그림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접시에 덮개까지 만들어 접시 가득 뭔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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