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이야기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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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물론 이 집에 들어와서 쓰기 시작한 일기도 그대로 쓰고 있다. 누구의 공간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읽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소설과 일기를 자신의 공간에 시간 나는 대로 옮겨나가고 있었다.
여자가 글을 쓰겠다고, 소설이란 걸 써보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던 계기는 남자에게 주기 위한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거였다.
일기라고는 했지만 대단한 생각이나 사념보다는, 말 그대로 그저 일상을 경험하고 든 감상 정도를 적는 수준이었다. 캠퍼스 한편에서 멍하니 사람들이 노닐고 얘기하고 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성들이나 자신이 그날 느꼈던 감정들이나 그런 것들을 적었다가 노트째로 그에게 주는 것이 여자는 좋았다.
그렇게 적었다가 건네준 노트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리고 그를 만나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는 동안 한 권 두권 늘어나서 이미 그에게는 꽤 많은 그녀의 일기장이 전해졌다. 그녀의 감정이 그렇게 한켠한켠 소복이 쌓이는 눈처럼 소리 없이 늘어갔다. 그건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사소한 감정이나 일상 등이 오롯이 담긴 또 다른 그녀였다.
차마 말로 드러내지 못한 맘속에 있는 이야기를 그가 없는 동안 적어 내려가면서 자기감정이 훨씬 깊어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설을 본격으로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정작 그녀의 습작 몇 편을 읽은 그가 그녀를 독려하게 된 지금의 상황은 그전에 그녀가 쓰던 일기와는 완전히 맥락이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국문과라서 글을 잘 쓴다거나, 아니면 글을 써야 ‘만’ 한다거나 막연히 글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따위의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쓴 글을 다듬어주거나 그가 쓴 글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독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충실한 독자 역할을 하는 것만큼은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그것은 남이 아닌 그의 글이었기에, 읽고 평하고 함께 생각을 격의 없이 나눌 뿐, 그녀 자신이 전문적인 글을 쓴다는 것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누구보다 글쓰기가 그리 노곤 노곤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생전 부대낌이라고는 없던 그와 날 선 감정으로 부대끼기 시작한 것도 결국은 그놈의 글 때문이라는 것이 싫었다.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안에 살고 있는 그녀와 부딪히는 일이 너무도 힘겨웠기에,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골방에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가만히 아랫목의 온기만을 느끼며 가는 숨을 내쉬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뭔가가 제대로 딱 부러진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탓이라고 그녀는 결정짓는다.
정 부장의 페이스에 말려서 이미 시작한 잡지사의 일은 어쩔 수 없다손치더라도, 타인에 의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해버리게 된다는 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에게 있어서나 그녀를 알고 있는 누가 보든 간에 문제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잡지사에 다니게 된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정 부장의 설득처럼, 일단 한번 시작해보면서 직접 판단해보자는 정도로 스스로를 말랑하게 위안했다.
물론 그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맘 속에 살고 있는 8번째 자아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만한 사실이었고, 그녀 자신도 그러한 식의 생각이나 일의 진행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정 부장과 잡지사 정직원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집을 나서던 날, 문득 걸려온 전화는 그런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을 갖게 했다. 교수에게 추천을 받았노라며 전화를 걸어온 그 사람은 세진그룹 비서실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희가 사람을 구하는데…, 정수은 씨가 같은 분이 오면 서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요. 페이는 연봉 2000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보너스는 별도로 지급됩니다. 물론 돈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 조건에 사보사에서 일하실 수 있는 곳은 저희 그룹 정도가 아니면 없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특히 저희는 따로 야근을 한다거나 하는 특이사항도 없거든요.”
“아,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연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건이 좋고 든든한 대기업의 사보사라면 국문과 출신이 아니고서라도 누구나가 탐내는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잡지사보다 페이도 훨씬 센 편이고, 일도 그만큼 힘들지 않아서 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꿀 떨어지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결정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일단 정 부장에게 확실히 정규직은 고사하고 지금 하는 원고 쓰는 일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거절하겠다고 나간 자리에서 그녀는 다시 정 부장의 설득 아닌 설득에 말리고 말았던 거였다.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려고 만났던 승주와의 상담도 그저 오래된 연인들의 데이트에 지나지 않았다. 승주가 다른 날과 달리 기분이 너무 가라앉은 것 같다는 생각은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든 뒤늦은 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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