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12

열두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999


“여보세요? 수은 씨?”


마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싱그럽다. 아니, 최소한 내 생각에는 그랬다. 아마도 그녀가 누군가를 유혹하려고 하거나 설득하려고 한다면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나는.


“네. 안녕하세요.”

“어머! 바로 아네요? 내 목소리만 듣고도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아요?”

“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독특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특징적이라고 뭐라 설명할 수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는 여자 아나운서나 라디오 디제이를 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예쁘고 호감이 가지만 그것을 어떤 목소리라고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목소리로 먹고사는 상위 1%에 해당하는 그들의 기준에 맞는 평범한(?) 톤의 목소리일지도 몰랐다. 유독 나에게만 그렇게 독특하게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설명하라고 하면 그녀의 목소리가 갖는 특징을 뽑아내기는 어려웠다.


“바빠요?”

“아니에요. 이제 막 출근하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그렇구나. 나가기로 한 거예요? 출판사? 잡지사?”


그녀가 약간은 주춤하다가 내가 출근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잡지사 일, 일단 시작하기로 해서요.”

“그랬구나. 그럼 용건만 얘기할게요. 우리 지난번에 약속했던 음악회 말인데…, 표가 생겨서요. 내일 저녁인데 어때요? 바쁠까요?”

“아직 모르겠어요. 연말 특대호 준비라고 해서 요즘 정신이 좀 없어서요.”

“그러면 오늘 저녁에 나한테 전화해줄래요? 괜찮은 공연이라고 하던데…”

“예. 그럴게요. 그럼.”


전화를 끊고 달력을 무심코 바라본다. 달력은 이제 딱 한 장을 남겨놓고 있어서인지 앞부분이 얇게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크리스마스.

달력에 붉은 표시로 25일이 마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이것저것 지저분하게 마감이니 촬영이니 적혀있는 메모들을 보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이렇게 출근하기 전에 대강이라도 달력을 봐서 다행이다 싶었다. 정 부장에게 넘어간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이전에 보았던 효진이처럼 잡지사 일정에 치이고 몰려있었다.


정 부장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일은 힘들었다. 가능한 한 늦지 않게 해 주겠다는 정 부장의 약속은 내가 알아서 요량껏 일을 다 끝냈을 경우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그만두겠다고 공언하던 효진이는 인수인계 비슷한 것을 하고는 다음 직장으로 바로 옮겨 창간호를 준비 중이다.


크리스마스를 열흘도 채 남겨두고 있지 않지만, 오빠와의 연락이 두절된 시간도 그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출근을 하자마자 스튜디오로 향한다.


“자자! 모여주세요.”


아직 나이가 어린 중고생 모델들이 모여있었다. 녀석들은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더 능숙하고 노련했다. 벌써부터 전문 코디가 있는 녀석들도 있었고, 엄마와 함께 와서 엄마가 모든 것을 챙겨주느라 정신없는 아이도 있었다.


진행이라고 해봐야 사진작가와 상의하며 콘셉트에 맞춰 촬영하고 그 안에 내가 글을 집어넣는 것이 전부긴 했지만, 일일이 봐 두지 않고서는 글을 메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계속 머릿속에 글감을 채워 넣으며 메모해야만 했다.


재미있다고까지야 할 것은 아니었지만, 옷 보푸라기가 폴폴 날리는 스튜디오에서 여기저기 옷을 갈아 있는 여자 모델들과 소품이 준비되었는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아르바이트생들을 보면 바깥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출판사 건에 대한 것 때문이라도 연락이 왔으면 했는데, 내가 삐삐를 갖게 되었으니까 누구보다 먼저 번호를 알려줘야 하는데. 오빠와의 오해는 풀어야 맘이 좀 편할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먼저 전화를 하거나 삐삐의 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기는 용기 있는 행동은 여전히 나와는 걸맞지 않은 옷처럼 선뜻 손이 가지 못했다. 오빠가 이럴 때 전화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었냐고만 물어준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상상해보는 것이 고작이다.


창문도 없는 스튜디오 안에 있으면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시간관념이 옅어진다. 내가 맡아야 할 페이지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나는 내 고정 페이지를 기획 회의안에 적혀 있는 대로 해결해야만 한다. 정 부장은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패턴 외에도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데스크임에 확실했다.


“정 기자님! 데스크가 올라오라는데요!”


바로 옆의 건물에 따로 있는 스튜디오에서 있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정 부장의 호출은 대중없었다. 물론 인터폰을 겸한 전화가 스튜디오에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편하게 전화로 이야기를 해서는 데스크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별 대단치도 않은 충고나 요구를 하는 것이 데스크의 고유 권한이라고 여기듯 그녀는 꼭 자신의 앞에 와서 직접 들으라며 호출을 했다.

“부르셨어요? 부장님.”

“응. 수은 씨. 다른 게 아니고 정란이가 맡은 인터뷰 페이지가 펑크가 나버렸어. 이번에 국제영화제에서 상 받은 강 수현 감독 있잖아. 인터뷰, 자기가 좀 따와야겠다. 정란이가 그 인간이랑 무슨 트러블이 있는 건지 완전히 못하겠다고 두 손 두발 다 들고 못하겠다네?”

“네? 전 지금 촬영만으로도…”

“지금 촬영을 정란이가 맡아서 마무리해주겠다고 하더라구. 우리 쪽에서는 흔히 있는 진행 중의 체인징 파트너니까 수은 씨도 한번 해봐. 자기가 그래도 원고 하나는 확실하잖아. 아, 그러고 보니 인터뷰는 처음이던가? 하여간 부탁해. 여보세요?”


전화를 핑계로 눈을 찡긋해 보이는 화장이 눌러붙은 악당 마녀의 얼굴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 이 일을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였다. 내가 거절을 못한다는 확신이라도 가지고 있었던가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나 아니고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마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강수현…누구였지?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정란 선배가 튀어나왔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그녀는 우리 팀의 막내에서 졸지에 나라는 막내를 갖게 되어 좋아라 하는 표정을 가감 없이 내보였던 알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수은 씨! 미안해. 인터뷰 처음이라며? 그래도 수은 씨가 가면 될 거야. 이 인간이 워낙 괴짜라서 난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어. 그렇다고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하면 악당 마녀가 난리를 칠 게 뻔하잖아.”

졸지에 스튜디오 촬영에서 해방이 되긴 했지만 정란 선배가 건네준 것이라고는 명함 한 장이 고작이었다. 그것을 들고 벌써 퇴근길로 접어든 용산의 골목을 빠져나왔다. 터벅이며 아파트로 접어드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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