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13

열세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2000


“눈 온다, 밖에.”


이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온기가 가시지 않은 신년호를 들고 정란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진눈깨비 비슷한 게 지난달 흩날리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함박눈으로는 처음인 셈이었다.

서울에 첫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잡지를 손에 쥔 그녀의 감성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막 출생한 잡지보다 눈이 온다는 말이 오히려 그녀의 감성에 파장을 남겼다. 매년 첫눈이 오면 유치하다고는 하지만 첫눈 약속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전화를 하거나 그녀가 있는 도서관으로 찾아오던 승주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여자는 전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전화기를 잡지는 않는다.


새삼스레 그에게 전화를 해서 뭐라고 할 것인가?


“정 기자! 전화! 3번 전화다!”


그때 여자를 부르는 전화 호출. 혹시나 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든다.


그가 내가 여기서 일하는 것을 알았을까? 효진이가 알려주기라도 했나?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응. 언니? 나야.”


아주 잠시였지만 여자의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깨어져나가며 다시 허탈해져 온다.

은영이었다.


“오늘 친구들하고 여행 갔다가 밤새 스키 타고 아마 크리스마스 날에도 못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라고…”

“응. 알았어.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 니 엄마가 전화했었어.”

“엄마가? 벌써 알았을 리가 없는데… 하여간 언니가 대답 잘했겠지 뭐. 알았어. 그럼 끊어.”


은영은 여전히 화려한 강남 백조 노릇을 하는데 쉼이 없었다. 여자는 간신히 최종 원고를 털어냈고 잡지사에 들어온 신고식을 톡톡히 치러냈다. 그냥 평범한 달도 아닌 연말에 갑작스럽게 투입되어서 눈코 뜰 새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닌 꼴 하고는. 자신이 맡았던 꼭지들을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불만스러운 부분은 발견되지 않는다. 희미하게 찍어달라는 요청대로 강 감독의 스타일리시만을 담아낸 인터뷰 건을 포함해서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우리 나가서 포장마차에서 소주라도 한 잔 할까?”


부장의 오른팔 격인 복희가 먼저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마지막에 잔뜩 긴장했던 탓인지 기분도 그렇고 왠지 몸살 기운이 온몸으로 한꺼번에 퍼질 것 같았다. 마지못해 하는 그녀를 잡아끌고 잡지팀이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들의 입에서는 모두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눈 보고 좋아하는 걸 보니 니들이 여자는 여잔가보다. 난 먼저 갈게. 오늘 마신 건 내일 영수증 올려. 내가 쏘는 거다.”


정 부장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준다. 정 부장이 먼저 퇴근하고 포장마차에서 가볍게 한 잔을 하고서 집에 들어갈 즈음엔 벌써 1시가 넘어 있었다.

현관에서 옷에 묻어 있는 눈을 털고 막 계단을 올라가는데 206호 앞에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놀라긴 했지만 지난번에 보았던 그 새벽의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자연스레 눈인사까지 건넬 여유가 있었다.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 청량한 코롱 향의 남자가 자연스레 눈을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얼른 자기 집 열쇠를 문에 꽂는다. 남자가 다시 한번 벨을 누르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여기 사시는 분, 어디 가셨는지 아시나요?”


문을 열고 냉큼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를 남자의 질문이 부여잡아 끌었다.


“네?”


그녀가 놀라서 다시 돌아본다. 현관의 불이 자동으로 들어오면서 남자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잘 빗어 넘긴 머리와 언뜻 보아도 180은 넘어 보이는 키에 적당히 연륜이 묻어 있는 호남형의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글쎄요. 늘 계셨는데… 연말이라 바쁘신 거 아닐까요?”


여자는 자신이 마녀의 일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하기사 그녀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는 해도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그녀에게는, 마녀가 평상시에 무엇을 하고 지내는 지나 마녀가 언제쯤 퇴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방법도 여유도 없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있고 관심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은 마녀를 만나고 있는 동안뿐이 아니었을까 하는 미안한 생각이 스친다.


“전화도 어제부터 안되고 해서 걱정이 돼서 와 봤는데… 그럼 실례했습니다. 혼자 사는 친구라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괜찮다면 이 메모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남자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수첩을 꺼내 뭔가 만년필로 적는다. 그녀의 서재에서 보았던 그 한정판이라는 고급스러운 만년필이다. 집에 들어가려다 말고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가도 마녀에 대한 모종의 책임의식 같은 것이 자신에게도 전가될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럼 부탁합니다.”


남자는 수첩을 찢어 그녀에게 내밀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문을 닫고서 얼른 베란다 쪽으로 나가본다. 은색 메르세데스 벤츠가 소복이 쌓인 눈을 그대로 싣고 천천히 눈길을 빠져나간다.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여보세요?”

“······”


말이 없다.


“··· 오빠예요?”


그녀는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잘 지냈니?”


역시 그였다. 그의 목소리가 예상대로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여자 쪽에서 침묵이 흐른다.


“…”

“그냥 했어. 잡지사에 들어갔다구…? 효진이한테 들었다.”

“오빤 잘 지내요? 오늘 눈…”


눈이 와서 생각이 났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을 흐린다. 남자에게 전화를 한 번쯤 해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화가 오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세우고 자시고 할 마음도 없었는데 오랜만인지 분위기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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